금번 진주 양민이 소동을 일으킨 것은 오로지 우병사 백낙신의 탐욕하고 고약한 까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가 도임한 이래 한 짓은 법에 어긋나고 인정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 없고,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였다. 신유년(1861) 겨울 환자 곡식을 받아들일 때에 돈으로 계산하여 덧붙여 먹은 것이 4,100여 냥이다. 이는 나쁜 전례를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병고(兵庫)에 있는 돈을 이용해 먹은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다. 병고의 돈 3,800여 냥으로 쌀 1,266석을 장만해 가지고 이를 병고 구폐미라 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가을에 가서 가외로 매석에 5냥을 더 받아 모두 6,966냥을 만들었다. 본전은 넣고 나머지를 먹은 것이 3,166냥이며 또 보상금 1,465냥도 모조리 사용해 버렸다.(중략) 이상 가지가지의 원망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고 그 원한은 뼈에 사무치게 되었다. 본 진주 고을의 폐단을 도결로 없애는 계책도 민간에서는 좋아하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병영의 아전들이 먹어치워 부족하게 된 환자곡을 걷어들이기 위하여 고을 안의 우두머리 급 백성을 초청하여다가 잔치를 채려 꾀기도 하고 잡아가두는 등 위협도 하면서 6만여 냥을 집집마다 이유 없이 징수하였다. 이에 군중들의 감정은 크게 비등하고, 많은 사람들의 노여움이 일시에 폭발하였다.
<진주초군작변등록> 제 10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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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경남 단성에서 시작된 1862년 농민 항쟁은 19세기를 민란의 시대라고 할만큼 여러 곳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하였다. 그 가운데 진주 농민 항쟁은 대표적인 것이었다. 도결과 통환의 폐단으로 시작된 진주 농민 항쟁은 향회(鄕會)와 이회(里會)를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전개되어 정부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