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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사료

고구려 진대법

작성자빈구름|작성시간11.08.17|조회수850 목록 댓글 0

고국천왕 16년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였다. 길가에 앉아 우는 자를 보고 우는 이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가난하여 항상 품팔이로 어머님을 봉양하였습니다. 금년에는 흉년이 들어 품팔이 할 곳이 없어 곡식 한 되나 한 말도 얻을 수 없기에 우는 것입니다" 왕이 "아아!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을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구나. 내 죄이다"라 하며 옷과 음식을 주어 위로하였다. 이어서 서울과 지방의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늙은이·늙고 병들고 가난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널리 찾아내어 구제하게 하였다. 봄 3월부터 가을 7월까지 관의 곡식을 풀었다. 백성들의 식구가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 있게 구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겨울 10월에 상환하게 하는 것을 법규로 정하였다. 모든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해설 진(賑)은 흉년에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뜻하고, 대(貸)는 봄에 양곡을 꾸어주어 가을걷이 후 거두어 들인다는 뜻이다. 고구려 고국천왕 16년(194년) 10월 왕권강화를 위해 국상(國相) 을파소(乙巴素)의 건의에 따라, 매년 3~7월에 관가의 곡식을 가구(家口)수에 따라 차등을 두어 대여하였다가 10월에 환납(還納)하는 것을 상식(常式)으로 시행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진대법 실시 최초 기록이다.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국가적 차원에서의 진휼사업(賑恤事業)이 행하여졌다. 고려시대는 진휼기관인 의창(義倉)을 설치하고 은면지제(恩免之制)·재면지제(災免之制)·환과고독진대지제(鰥寡孤獨賑貸之制)·수한역려진대지제(水旱疫賑貸之制) 등의 방법으로 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상평(常平)·환곡(還穀)의 제도로 그 범위가 확대, 정비되어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시행된 이러한 진대법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계급적 대립을 완화시켜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한편 의창, 상평창의 환곡제도와 함께 조선 세종때 중국 제도(송때 주자의 건의로 만들어짐)를 본받아 민간자치적 성격이 강한 사창(社倉)이 마련되어 그 후 폐지와 부활을 거듭하였다. 사창의 사(社)는 행정단위로서 현재의 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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