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37년 봄, 처음으로 원화(源花)제도를 두었다.
초기에,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 낼 수 없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친구들끼리 여럿이 모여 서로 어울리도록 하고, 그들의 행동 거지를 살펴 본 후에 적절한 자를 천거하여 임용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마침내 남모와 준정이라는 미녀 두 사람을 선발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3백여 명의 무리를 모았다. 그런데 두 여자가 미모를 다투어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술을 강권하였다. 준정은 남모가 취한 후에 그녀를 끌어 내어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모인 무리들은 화목하지 못하여 해산하였다.
그 후 다시 얼굴이 잘생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시켜, '화랑'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하고, 그를 떠받들게 하였다. 그러자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그들은 더러는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더러는 노래와 음악을 서로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 유람하여, 먼 곳이라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인품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었으니, 그 중에서 선량한 인물을 택하여 조정에 추천하였다.
김 대문의 [화랑세기]에는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에서 생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 치원의 난랑비 서문에는 "우리 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하였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밝혀져 있는데, 실제적으로는 유불선의 세 가지 교를 포괄하여 중생을 교화하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집에서는 효도하고, 집밖에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뜻이요, 무위의 일에 처하며,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요, 모든 악행을 하지 않고, 모든 선행을 실천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와 같은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 나라 영고징의 [신라국기]에는 "귀인의 자제 중에서 훌륭한 자를 선발하여 곱게 꾸민 다음,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백성들이 모두 떠받들어 섬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