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帝國이 武力으로 亂을 鎭壓하고 文德으로 年號를 바꾼 해(888)의 暢月(11월), 달이 이지러진 뒤 7일, 해가 咸池에 잠길 무렵(해질 때), 海東兩朝의 國師 禪和尙이 목욕을 마치고 跏趺坐를 하고 入寂하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두 눈을 잃은 듯한데, 하물며 門下의 여러 弟子에게 있어서랴!
아아! 東方에 태어난 지 89年이요, 西方의 佛戒를 받은 지 65年이라. 세상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났어도 繩座에 기대어 엄연히 낯빛이 살아 있는 듯하였다.
문인 詢乂 등이 울부짖으며 遺體를 받들어 禪室안에 임시 殯所를 마련하였다. 임금께서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며, 파발꾼을 보내어 글로 弔問하고 穀食으로 賻儀하였으니, 淨潔한 供養을 돕고 죽은 이의 冥福을 넉넉히 함이라.
2년 뒤에 돌을 다듬어 層層의 塔을 쌓았는데, 소리가 임금이 계신 서울(慶州)까지 들렸다. 菩薩戒弟子인 武州(光州)都督 蘇判 鎰과 執事侍郞 寬柔, 浿江(大洞江)都護 咸雄, 全州別駕 英雄이 모두 王孫인데, 둘린 城처럼 임금의 德을 補佐하였고 험한 길에서 스승의 恩惠에 힘입었으니, 어찌 반드시 出家한 뒤라야 入室(佛弟子로서 높은 경지에 달함)할 수 있으리요.
드디어 門人인 昭玄大德 釋通賢과 四天王寺 上座 釋愼符와 더불어 議論하여 말하기를,
大師께서 돌아가심에 임금께서도 서러워하였거늘 어찌 우리들이 차마 마음을 사그러뜨리고 입을 다물어서 스승에게 報恩할 일을 빠트리리요.
라고 하였다. 이에 門人들이 서로 호응하여, 謚號와 銘塔을 내려 줄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께서) 下敎하여 '좋다'고 말씀하고, 곧 王孫인 兵部의 第二卿 禹珪에게 命하여 桂苑의 行人이며 侍御史인 崔致遠을 부르니 (崔致遠이) 蓬萊宮에 이르러 화려한 나무들을 곁으로 하고, 인하여 아름다운 계단을 올라서, 珠簾 밖에 꿇어 앉아 命令을 기다렸다.
임금께서 말하기를,
古人이 된 聖住大師는 진정 한 부처가 세상에 나심이라. 지난 날 景文王과 憲康王이 모두 스승으로 섬겨서 國家를 복되게 함이 오랜 세월이라. 내가 처음 뒤를 어어 우리 先世의 뜻을 잇고자 했으나, 하늘이 굳이 남겨 두지 않았으니 더욱 내 마음을 애닯게 한다. 나는 큰 行跡이 있는 이에게 큰 이름을 주어야 한다고 여기는 까닭에, 謚號를 追贈하여 '大郎慧'라 하고, 塔을 '白月보光'이라고 하노라. 너는 일찍이 中國에서 벼슬을 하고 출세하여 귀국하였다. 돌아보건대, 景文王게서는 國學의 學生으로 뽑아 너를 공부하도록 명하셨고, 憲康王께서는 國士로 여겨 정중히 대우 하셨으니, 너는 마땅히 國師의 銘을 지어 그것을 보답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臣이) 사례하며,
황공하옵니다. 殿下께서는 벼에 쭉정이가 많음을 용서하고 계수나무의 남은 향기에 오래 젖어 있는 줄로 여기시어, 글로써 恩德에 보답하라 하니, 진실로 하늘이 내린 幸運임을 감사히 여깁니다. 다만 大師께서는 人爲的인 것으로 가득찬 俗世에서 人爲的이지 않은 신비한 宗旨를 펼쳤는데, 小臣이 有限한 조그만 재주로 無限히 큰 行跡을 적는 것은 약한 수레에 무거운 짐을 싣는 것이요, 짧은 줄의 두레박으로 깊은 우물물을 끌어 오리는 것이니, 혹시 돌(碑石)이 딴 소리를 하거나 거북이 잘 돌보아 주지 않는다면, 결코 山이 빛나고 냇물이 아름답도록 하기가 어렵고 도리어 수풀이 부끄러워하고 澗水가 창피하게 여김만 남게 할 것이니 글짓는 길을 피하고자 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임금께서 말하기를,
사양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風俗이라 좋게 보면 좋을 따름이지만 진실로 능히 이 일을 할 수 없다면 黃金膀에 이름을 올린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너는 그것에 힘 쓰도록 하라.
라고 하며, 얼른 서까래만한 크기의 글 一篇을 내어 宦官을 시켜 주고 받게 했는데, 곧 門弟子가 바친 行狀이었다.
다시 생각컨데, 中國에서 遊學한 것은 大師와 내가 모두 같이 하였는데, 스승이 되는 자는 누구이며 글짓는 役이 된 자는 누구인가. 아마 心學者는 높고 口學者는 수고로운 것인가. 그러므로 옛날의 君子는 배우는 것을 신중히 했다. 그런데 心學者는 德을 세우고 口學者는 말을 세우는 것이니, 저 德이란 것은 혹 말에 의지하여야 가히 일컬어질 수 있으며 이 말이란 것은 혹 德에 기대어야 썩지 않고 오래도록 전할 것이다. 가히 일컬어질 수 있다면 마음이 능히 멀리 後來者에게 보일 것이며, 썩지 않고 오래도록 전한다면 말 또한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으리라. 가히 할 만한 일을 가히 할 만한 때에 하는 것이니 다시금 어찌 감히 글짓는 일을 굳게 사양하겠는가.
비로소 서까래만한 行狀을 풀어봄에, 大師께서 中國에 遊學하고 新羅로 돌아온 해, 佛戒를 받고 禪理를 깨우친 因緣, 公卿과 宰相들이 歸依하여 우러러본 일, 像殿과 影堂을 開創한 일 등은 故 翰林郞 金立之가 지은 聖住寺碑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고, 부처를 위하고 佛孫을 위하는 德化, 임금을 위하고 스승을 위하는 聲價와 世俗을 鎭定시키고, 魔賊을 降服시킨 威力, 붕새처럼 드러냈다가 鶴처럼 돌아온 動息은 贈太傅 獻康大王이 손수 지은 心妙寺碑에 갖추어 기록되어 있다. 돌아보건대, 腐儒가 이제 짓는 글은 마땅히 우리 大師께서 涅槃에 나아간 時期와 우리 임금께서 塔〔솔堵婆〕의 호를 높이신 것을 나타내는데 그칠 따름이다.
내 입이 장차 손과 議論하여 맡은 일을 형편에 맞도록 하려 했는데, 이때 首弟子인 比丘〔苾芻〕가 와서 글〔?臼〕을 재촉하기에 이러한 뜻으로 알렸던 바, (苾芻) 곧 말하기를,
金立之의 비는 세운 지 오래되었으나 오히려 (大師께서) 수십년 동안 남긴 美行이 빠져 있으며, 太傅王이 神妙한 筆致로 기록한 것은 대개 특별한 만남을 드러내 보여준 것일 뿐입니다. 그대는 입으로 성현의 글을 咀嚼하였고, 面前에서 現 임금의 命令을 받았으며, 귀로는 國師의 行跡을 실컷 들었고, 눈으로는 門生이 지은 行狀을 취토록 보았으며, 마땅히 널리 記錄하고 갖추어 말하여서 반드시 그것을 後生〔可畏〕에게 남기어, 始初를 찾고 終末을 살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中國으로 가는 〔西笑〕 자가 혹 碑文을 소매에 넣고 가서, 中國人의 비웃음을 免한다면 심히 다행입니다. 제가 감히 그 이상의 것을 구하겠습니까. 부디 번거로움을 꺼리지 말아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崔致遠이) 狂奴〔嚴光〕의 남은 態度로 문득 대답하여,
나는 이엉을 엮듯이 簡略히 적으려는데, 師는 채소를 팔 듯이 글의 分量을 늘리려 합니까.
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갈피를 못잡는 마음〔猿心〕을 붙잡아 억지로 붓〔兎翰〕을 움직이다가 《西漢書》 留侯傳을 생각했는데, 말미에 이르기를,
張良이 임금과 더불어 조용하게 天下의 일을 말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天下의 存亡에 관한 것이 아니므로 드러내 적지 않는다.
라고 하였으니, 곧 大師의 평생 동안의 事蹟 중에서 卓越한 것이 별처럼 많으나, 後學에게 깨우침이 되는 바가 아닌 것은 또한 記錄하지 않는다. 班氏의 歷史〔西漢書〕에서 그 一斑을 엿본 것으로 自負한다. 이제야 記錄하여 말한다.
빛이 盛大하고 알차서 온누리〔八紘〕를 밝게 하는 바탕으로는 아침 해보다 고른 것이 없으며, 氣가 따뜻하고 무르녹아 萬物을 기르는 功으로는 봄바람보다 넓은 것이 없다. 오직 봄바람〔俊風〕과 아침 해〔旭日〕는 함께 東方으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하늘이 이 두 가지 남은 慶事를 모으고 山嶽이 한 신령스러운 性品을 내리어, 君子國에서 誕生하여 梵王家에 우뚝이 서게 한 것이 우리 大師 그분이다.
法號는 無染으로 圓覺祖師에게 十世孫이 되며 俗性이 金氏고 武烈大王이 八代祖가 된다. 할아버지 周川은 品(骨品)이 眞骨이고 地位(官等)는 韓粲이었으며 高祖와 曾祖가 모두 將帥와 宰相稷에 드나든 것을 집집마다 알고 있다. 아버지 範淸의 代에 一族이 眞骨로부터 一等級 降等되어 '難得'〔六頭品〕이라고 했는데 〔나라에 五品이 있는데 聖骨·眞骨·難得(六頭品.難得은 얻기 어려운 貴姓이라는 뜻, 陸機의 文賦에 求易而得難이란 말이 있음) 그리고 五頭品·四頭品이다. 數字가 많을수록 貴한 것이니 一命에서 九命으로 올라갈수록 높은 것과 같이 六頭品은 五頭品·四頭品보다 높은 것이다. 五頭品·四頭品은 족히 말할 거이 못된다.〕 그는 晩年에 趙나라 文王의 일을 본받았다.
어머니 華氏가 꿈 속에서 긴 팔을 지닌 天人이 내려와 연꽃을 주는 것을 보고 이로 인하여 姙娠을 했다. 얼마 지났을 때 거듭 꿈에서 西域의 道人이 스스로 法藏이라 칭하면서 十護戒를 주어 胎敎에 充當하게 했으며, 1周年을 넘겨 大師를 낳았다.
阿孩〔方言에 '아이'를이르는 말,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름이 없다.〕 적에 걷거나 앉을 때 반드시 손을 合掌하고 跏趺를 하여 마주 앉았으며, 여러 아이들과 노는 데 이르러서는 벽에 그림을 그리고 모래를 모으는 데도 반드시 佛像과 佛塔의 모양으로 하였다. 그러면서 차마 하루도 부모 슬하를 떠나지 못하였다. 아홉 살에 비로소 學堂에서 글공부를 하였는데 눈으로 본 것을 입으로 반드시 외우니 사람들이 '海東神童'이라고 일컬었다.
열두 살을 넘기면서 九流를 좁게 여기는 뜻이 있어서, 佛道에 들어가기 위해, 먼저 어머니께 사뢰니 어머니는 이전의 꿈을 생각하고는 울면서 "그렇게 해라"고 말씀하였고, 뒤에 아버지께 아뢰니 아버지는 이미 늦게 깨달은 것을 후회하고 흔쾌히 "좋다"고 하였다.
드디어 雪山 五色石寺에서 머리를 깎고 僧服을 입고서, 입으로는 藥을 맛보는 데(經義의 耽味) 精密했고 힘으로는 하늘을 기울〔補天〕만큼 날래었다. 法性禪師란 분이 있었는데 일찍이 중국에서 x伽門(小乘法)을 두드린 분이다. 大師께서 스승을 섬긴 지 수년에 探索하여 조금도 남긴이 없자, 法性禪師가 감탄하여,
빠른 발로 달리면 뒤에 떠나더라도 앞서 도착한다는 것을 나는 그대에게서 體驗했노라. 나는 만족한다. 내가 그대에게 가히 남은 용기를 과시할 것이 없으니 그대와 같은 사람은 마땅히 中國으로 가야한다.
고 말하니, 大師께서 "예"라고 했다.
밤중에 새끼줄은 (뱀으로) 眩惑되기 쉽고 공중의 (가느다란) 실은 區分하기가 어려우며, 물고기는 나무에 올라서 가히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토끼는 그루터기를 지켜서 가히 기다릴 수 잇는 것이 아니다. 그러 까닭에 스승이 가르쳐 준 것과 자기가 깨달은 것에는 서로 보탬이 되는 것이 있다. 진실로 구슬과 불 이것이 (수중에) 들어 온다면 조개와 부싯돌은 가히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무릇 도에 뜻을 둔 사람에게 어찌 일정한 스승〔尙師〕이 있으리요.
이윽고 옮겨 가서 浮石山 釋燈大德에게 華嚴〔驃訶健拏〕을 물었다. 하루에 서른 사람의 몫에 필적하니 釋燈大德〔藍천〕이 얼굴빛을 변하며, 요堂과 盃水의 비유를 들어 말하기를,
동쪽으로 낯을 돌려 바라보면 서쪽의 담을 보지 못한다. 저쪽 언덕(中國)이 멀지 않은데 어찌 반드시 故土(新羅)만을 생각하리요.
라고 하였다. (大師는) 문득 산에서 나와 바다를 따라서 서쪽으로 해를 타고 갈 기회〔西泛〕를 엿보았다. 마침 國師가 瑞節을 가지고 天子의 宮闕〔象魏〕로 가거늘, 발을 의탁하여서쪽(中國)으로 향하였다. 大洋 가운데 이르러, 風濤가 갑자기 사납게 일어 큰 배가 사람들을 떨어뜨려 다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大師는 心友 道亮과 함께 외쪽 판자에 걸터 앉아 業風에 맡겼다. 밤낮으로 보름 정도를 漂流하다가 劍山島에 이르렀다. 무릎으로 기어 거친 언덕으로 가서 失意하여 한탄하며 한동안 있다가,
물고기 배 속에서 다행히 몸을 빼내었고, 龍의 턱 아래에 거의 손을 들이밀었는는데, 나의 마음은 돌이 아니니 어찌 굴러서 물러나리요.
라고 말하였다.
長慶(821~824)初에 이르러 朝正使 王子 昕이 唐恩浦에 배를 대거늘, 함께 타고 가기를 청하여 허락받았다. 之부山 기슭에 도달한 뒤에 처음에 어려웠고 나중에 쉬웠던 것을 돌이켜 보고서는 海神에게 揖하며, "잘 있거라 고래 물결, 잘싸워라 바람의 악마여!"라고 말하였다.
(그곳을) 떠나 가다가 大興城 南山의 至相寺에 이르러, 華嚴〔雜花〕을 說法하는 사람을 만나 浮石山에 있을 때와 같이 했다. 한 얼굴 검은 老人이 이끌어 말해 주기를, "멀리 事物에서 취하고자 하는 것보다 그대 마음 속의 부처를 認知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는데, 大師는 言下〔舌底〕에 크게 깨달았다.
이로부터 筆墨을 놓고 여러 곳을 다니다가 佛光寺에서 如滿에게 道를 물었다. 如滿은 江西의 印을 찼으며, 香山 白尙書 樂天과 空門(佛門)의 벗이 되는 사람인데 應對를 하다가 부끄러운 빛을 띠며,
내가 사람 겪기를 많이 하였으나, 이 新羅 젊은이와 같은 이는 거의 없었다. 뒷 날에 中國이 禪을 잃으면 장차 東夷에게서 그것을 물어야 할 것인가.
라고 말하였다.
麻谷 寶徹和尙을 가서 뵙고, 일을 근면하게 하여 가리는 것이 없으며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일을 자기는 반드시 쉽게 하니, 여러 사람들〔衆目〕이 말하기를, "禪門의 庾黔婁와 같은 異行이다"라고 하였다. 徹公이 (大師의) 苦節을 어질게 여겨, 일찍이 하루는 일러 말했다.
옛날에 나의 스승이신 馬和尙께서 나에게 遺言하기를, "봄꽃이 繁盛하고 가을의 열매가 적은 것은 菩提樹〔道樹〕를 오르는 사람이 슬퍼하고 탄식하는 바이다. 이제 너에게 印을 줄 것이니 뒷날에 배우는 무리들 가운데 奇異한 功이 있어 가히 封할 만한 자가 나타나거든 封하여서 (印이) 뭉크러지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으며, 다시 이르기를, "(佛法이) 東쪽으로 흐른다는 이야기는 대개 豫言〔鉤讖〕에서 나온 것인즉, 저 해뜨는 곳(新羅) 善男子의 根本이 거의 成熟되었을 것이다. 만약 네가 東方의 사람을 얻어서 가히 目語할 자가 있거든 잘 이끌어라〔견導之〕. 惠水가 바다 귀퉁이(新羅)에 널리 젖어들게 하면 德이 얕지 않으리라"라고 하였는데,스승의 말씀이 귀에 남아 있다. 나는 네가 온 것을 기뻐하며, 이제 印을 주어 東土에서 禪侯의 으뜸이 되게 하리니 가서 정성껏 할지어다. 그러면 나는 지난날 江西의 大兒요, 後世에 海東의 大父가 되는 것이니, 先師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되리라.
얼마 안 있어 스승(寶徹和尙)이 돌아 가시매 墨巾을 머리에 썼다. 이에 말하기를, "大船이 이미 버려졌는데 小舟가 어찌 매여 있으리요"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바람부는 대로 遊浪을 하였는데, 氣勢를 가히 막을 수가 없었고, 뜻을 가히 빼앗을 수가 없었다. 이에 汾水를 건너고 곽산(곽山)을 오르며, 古跡이라면 반드시 찾아 보고 眞僧이라면 반드시 나아겼다. 무릇 그가 머무는 곳은 人家〔人煙〕와 멀리 떨어져 있는데, 대개 그 위태함을 편안하게 여기고 그 괴로움을 달게 여기며, 四體를 수고로이 하기를 奴虜같이 하고, 一心을 받들기를 君主처럼하는데 뜻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에도 위독한 痼疾病者를 돌보고 孤獨한 자를 救恤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으며, 큰 추위와 지독한 더위가 오고, 또한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나거나 혹은 손발에 凍傷이 드는 경우에도 일찍이 게으른 모습을 하지 않았다. 名聲을 들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멀리서 禮를 갖추게 되고 떠들썩하게 東邦의 大菩薩이라고 하였는데, 그 三十여년 행한 일이 이와 같았다.
會昌 5년(845)에 (新羅로) 돌아왔는데 皇帝의 命令이었다. 나라 사람들이 서로 기뻐하며, "連城璧(大師)이 다시 돌아왔다. 하늘이 실로 그렇게 한 것이니 땅도 다행히 여기리라"라고 말했다.
이로부터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들이 (大師가) 이르는 곳마다 벼와 삼같이 빽빽히 모여 들었다. 王城에 들어가서 어머니를 뵈오니 크게 기뻐하여,
돌이켜보면내가 옛날에 꾼 꿈은 곧 優曇鉢羅樹가 한번 꽃 핀 것이 아니겠느냐. 來世를 濟度하기를 바라며, 나는 다시는 문을 기대어 기다리는 생각〔倚門之念〕에 흔들리지 않겠다. 이제 그만이다.(俗世 血緣의 情을 淸算하겠다는 뜻)
라고 말하였다.
이에 북쪽으로 가서 눈으로 직접 餘生을 몸붙일 곳〔終焉之所〕을 고르려 하였다. 때마침 王子 昕이 벼슬을 그만두고〔懸車〕山中宰相이 되어 있었는데, 우연히 만나 바라는 바가 합치되어 (大師에게) 일러 말했다.
대사와 나는 함께 龍樹乙粲(武烈大王)을 祖上으로 하는데, 大師는 內外로 龍樹의 令孫이 되었으니, 참으로 나는 멍하니 뒤진 채, 따라잡을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滄海의 밖(唐나라를 가리킴)에서 XX의 옛일을 밟았으니 곧 親舊의 因緣이 진실로 얕지 않습니다. 한 절이 熊川州 西南 모퉁이에 있는데 이는 나의 할아버지 臨海公〔할아버지 仁問이 예貊을 伐한 곳입니다. 그 사이에 큰 불이 災殃으로 번져 金田(寺院)이 반쯤 재가 되었으니 자애롭고 밝은 분이 아니면 누가 능히 없어진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이을 수 있겠습니까. 가히 억지로라도 쓸모없는 이몸을 위하여 住持의 자리를 맡아 주시겠습니까.
대사는 답하기를, "因緣이 있으면 머물게 되겠지요"라고 말했다.
大中(847~859)初에 비로소 나아가 머물고 또한 그것을 整齊하여 꾸미니 얼마 안 되어 도가 크게 행해지고 절이 크게 이루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 멀리서 이 절을 찾는〔問津〕 무리들이 千里를 반걸음같이 여기니 그 수를 헤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인원이었다. 大師께서는 鐘을 쳐주기를 기다리고 거울이 피곤함을 잊은 것 같이 하니, 찾아온 사람들은 慧炤로서 자신들의 눈을 이끌고 法喜로써 자신들의 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끊임없는 발자취가 이끌려오게 하고 어리석고 무지한 풍속을 변화시켰다. 文聖大王이 그이 運用 作爲가 모두 王의 敎化에 보탬이 된다는 것을 듣고, 매우 그를 존중하여 手敎를 급히 보내 넉넉히 위로하고 大師가 山相(王子 昕)에게 대답한 네 글자〔有緣則住〕를 중히 여겨서 절의 이름〔寺방〕을 바꾸어 聖住라 하고 인하여 大興輪寺에 編錄시켰다. 大師께서 使者에게 應答하기를,
절이 '聖住'로 이름을 삼은 것은 절〔招提〕로서는 실로 영광스러운 바이지만 庸劣한 僧을 지극히 寵愛하여 높은 지위에 猥濫되게 불러 올리니, 진실로 바람을 피한 새에게 견줄 만하고 안개에 숨어있는 표범에게 부끄러울 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에 憲安大王이 施主이며 舒發韓으로 追序된 魏昕(金陽의 字)과 南北相〔각기 그 벼슬자리를 지켜 左相·右相과 같음〕이 되어 있었는데, 멀리서 弟子의 禮〔攝齊禮〕를 펴고 香과 茶로써 폐백을 드리어 使者가 빠진 달이 없었으며, 名聲이 東國에 젖어 들도록 하는 데 이르렀으므로 士流로서 大師의 禪門을 알지 못하는 것을 一世의 수치로 생각하게끔 하였다.
(大師의) 발 아래 禮를 올린 사람들은 물러나와서는 반드시 탄성을 내어, "직접 뵙는 것이 귀로 듣는 것보다 백배나 낫다. (大師의) 말씀이 입으로 나오기도 전에 마음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조급하고 포악하기로 으뜸가는 사람들〔후虎而冠者〕도 그 조급함을 삭히고, 그 포악함을 고치어 다투어 좋은 길로 달렸다.
憲安王께서 王位를 이어받음에 미쳐 글을 내려 말씀을 구하니 大師는 대답하기를, "周禮에 魯公에게 대답한 말이 깊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禮經에 실려 있으니, 청컨대 자리 곁에 새겨 두십시오."라고 하였다.
贈太師 先大王께서 卽位함에 미쳐, (大師를) 공경하고 중히 여김이 先祖의 뜻과 같아, 날로 더욱 두터웠다. 무릇 施行할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사람을 급히 보내 諮問을 구한 뒤에 행하였다.
咸通12년(871)가을에 敎書〔鵠頭書〕를 날려 驛馬로 불러올리면서, "山林은 어찌 가깝게 하면서 城邑은 어찌 멀리 합니까"라고 말했다. 大師께서 生徒에게 일러 말하기를,
문득 伯宗에게 命令을 내리니 깊이 遠公에게 부끄럽다. 그러나 道가 장차 행해지려면 때를 가히 잃어 버릴 수 없으며 咐囑을 생각하여(國王大臣에게 佛法流通에 관한 도움을 부탁하기 위하여) 나는 갈 것이다.
라고 하였다.어느덧 都城〔穀下〕에 이르러 謁見하니,先大王이 冕服을 하고 절하여 國師로 삼았다. 王妃, 世子 및 太弟相國〔뒤에 惠成大王으로 謚號를 올려 받들었던 분〕그리고 여러 公子 公孫들이 빙둘러 우러르기를 한결같이 했는데, 마치 옛 伽藍 그림 벽면에 서방의 여러나라 君長들이 佛陀를 대접하는 모양을 그려낸 것같았다.
임금께서 말하기를,
弟子가 才操는 없으나 어려서부터 글짓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劉협의 《文心彫龍》을 살펴보았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有에만 執滯하고 無만 지키는 것은 한 것 銳利하기만 하고 偏僻하게 이해할 뿐이다. 참된 근원에 나아가고자 하면 般若의 絶境이라야 한다."했으니 境의 絶한 것을 가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대사는 대답하기를,
境이 이미 絶했음에 이 또한 無입니다. 이 印을 묵묵히 行할 따름입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말하기를, "과인은 진실로 조금 더 나아가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이에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들에게 명하여 차례로 질문을 하게〔갱수당격〕하고는, 매 질문마다 그 질문에 알맞는 적확한 답변을 해주었는데〔춘용진성〕, 막혔던 것을 트고 번잡했던 것을 깨끗이 떨어버리기를 가을 바람이 어두침침한 안개를 잘라내듯 하엿다. 이에 임금께서 크게 기뻐하고 대사를 늦게 만나보게 된 것을 한탄하며,
몸을 공손히 하고 임금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南宗을 알게 해주니, 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라고 하였다.
이미(宮을) 나왔으나 경상들이 다투어 영접하여 더불어 의논하기에 겨를이 없고 사서인들이달려와 떠받드니, 가고자 해도 갈 수 없었다. 이로부터 국인들임두 옷 속의 진주(마음 속의 진리)를 인식하게 되고 이웃의 장노들이 행랑의 보옥을 엇보는 젓(자기가 지닌 보배를 밖으로 내팽개친다는 뜻)을 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새장 속에 있는 듯 괴로워하여 곧 도망가듯 떠나갔다. 임금께서 억지로 붙들 수 없음을 알고, 이에 손수 글월〔지검〕을 내리어 상주의 심묘사가 서울에서 멀지 않으니 참선하는 별관으로 삼으라고 청하였다. 사양을 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가서 거처하였는데, 하루를 머물지라도 반드시 집을 수리하여 엄연히 화성(절)이되게 하였다.
건부 3년(876) 봄에선 대왕께서 편치 않으셨는데, 근시에게 명하기를, "급히 우리 대의왕을 맞아 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사자가 이르름에, 대사가 말하기를,
산승의 발이 왕문에 미치는 것이 한번도 심한 것이니, 나를 아는 사람은 성주를 무주라 할 것이며,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무염을 유염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 임금과는 향화로써 맺은 인연이 있고, 도리의 행차(임금의승하를뜻함)가 기일이 있으니, 어찌 나아가 한 번 고별을 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며, 다시 걸어서 임금의 거처에 이르러서 약언과 함계를 베푸니 병이 잠시 나아서 온 나라가 이상하게 여겼다.
이미 장사를 치르고 헌강대왕이 익실에 거처할 때에 울면서 왕손 원영에게 명하여(대사에게) 뜻을 알리어 말했다.
내가 어려서 부상을 당하여 정치를 잘 알지 못하지만,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부처를 받들어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과 오직 그 몸만을 잘 다스리는 것과는 같이 말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대사는 멀리 가지 마십시오. 거하실 곳은 선택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대사가) 대답하기를,
옛 스승으로는 육적이 있고, 오늘날의 보필로는 삼경이있습니다. 늙은 산승이 무엇하는 자인데, 앉아서 계수같은 땔나무와 옥같은 쌀밥〔계옥〕을 좀먹고 있겠습니까. 다만 세 글자로써 남겨 드릴 것이 있으니, '능관인(능히 사람을 잘 골라서 벼슬을 주는 것)' 그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튿날 산장을 이끌고 새처럼 떠나갔는데, 이로부터 역마의 왕래와 문문으로 그림자가 바위 계곡에 이어졌다. 역졸들은 가는 곳이 성주사라는 것을 알면, 곧 모두 뛸 듯이 기버하여 손을 모으고 말고삐를 고쳐잡고는 왕명을받고 가는 길이 조금이라도 지체도리 것을 염려하여 지척의 거리와 같이 달렸다. 이로 말미암아 기상시들은 급한 교시를 받아도 쉽게 거행할 수 있게 되었다.
건부제가 헌강대왕의 즉위를 승인하는 사절을 보내온 해(878)에 국내의 유식자들 중 가히 말할 만한 사람들로 하여금'흥이제해'의계책을 바치게 하는 한편, 별도로 우리 나라의 종이를 사용하여 대사에게 편지를 내리면서 '당나라의 후의'를 입은 것이 원인이 있다고 말하고, 잇달아 나라에 보탬이 될 일을 물어 왔다. 대사는 하상지가 송문제에게 유언〔헌잠〕했던 말을 인용하여 대답했다. 태부왕이 살펴보고 아우인남궁상(남북상 중의 하나인 남상)에게 일러 말했다.
삼외는 삼귀에 견줄 수 있고 오상은 오계와 같다. 능히 왕도를 실천하면 이는 곧 불심에 부합하는 것이니 대사의 말씀이 지극하다. 나와 너는마땅히일념으로 받들어 행해야한다.
중화 원년(881) 건부제가 서쪽으로 피난(황소의 난)갔던 해 가을에, 임금이 측근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라에 큰 보주가 있는데, 평생토록 독 속에 감추어 둔다면 그것이 옳겠는가"라고 하니, (측근인이) 말하기를, "옳지 않습니다. 때때로 한번 나오게 하여 만백성의 눈을 뜨게 하고 서방 이웃들의 마음을 취하도록 쏠리게 함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에게는, '말니'라는상품의 보배가 있는데, 빛을 감추고 숭엄산에 있다. 만약 비밀의 광을 연다면 마땅히 삼천세계를 비추어 환하게 할 것이니 심이승을 비추는 위문후의 구슬 따위야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겠는가. 우리 경문왕께서 간절하게 맞이하여 일찍이 두 번 나타난 바 있다. 옛날에 찬후(숙하)는 한왕(한고조)이 대장을 임명할 때 어린 아이 부르듯 한 것을 희롱했는데, 능히 상산의 네 노인(사곡)을 초청해 오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제 듣건대, 천자가 피란을 갔다 하니, 달려가서 천자의 여러 신하들〔관수〕을 위문하도록 재촉할 작정인데, 피난간 천자를 근왕하는 데에 정성을 더하려면 부처에 귀의하는 것이 먼저 할 일이라.장차 대사를 맞이하여 반드시 여론〔외의〕에부응하려는 것이지,내가 어찌 감히 그 하나(임금의 벼슬)를 빙자하여 그 둘(년치와 덕망)을 업수히여김이랴.
라고 하고, 이에 그 사자를 정중히 하고 그 말씀을 낮추어 대사를 부르시니, 대사가 말하기를,
외로운 구름이 산에서 나오는 것이 어찌 무슨 마음이 있어서리요. 대왕의 풍에 인연이 있는 것이니,'고집함이없는 것'이 곧 상사의 도리이리라.
라고 하고는,드디어 와서 알현하였다. (임금이) 선조의 예와 간이 대해 주었으되, 예를 더한 것으로 명백히 손가락을 꼽을 수 있는 것으로는, 마주 보고 음식을 베푼 것이 첫째요, 손수 향을 전한 것이 둘째요, 삼례를 세 번한 것이 셋째요, 곡미로를 잡고 세세생생으 인연을 맺은 것이 넷째요, 법호를 더하여 '광종'이라고 한 것이 다섯째요, 이튿날 일반 벼슬아치들〔진경〕에게 명하여대사의 숙소〔봉수〕로 쫓아가 기러기처럼 열을 지어 가례토록ㅎ나 것이 여섯"째요, 국중에 육의를 연마하는 자(시가를 지을 수 있는 자)를 명하여송별의 노래를 짓게 하니, 재가제자로서 왕손인 소판 의영이머저 창을 하여 거두어 두루마리를 만들고, 시청이며 한림의 재자인 박X이 인을 지어서 떠날 때 증정한 것이 일곱째요, 거듭 장차에게 명하여 정결한 방을 베풀어 작별을 요구한 것이 여덟째라.
고별에 임하여묘결을 구하니 이에 종자에게 눈짓하여 진요를 들어 말하게 하였는데, 순예 원장 허원 현영과 같은 네 사람의 스님 중에 청정함을 얻은 자가 잇어, 그 지혜를 실 뽑듯이 하고 그 종지를 세밀히 표출하여, 뜻을 기우려 태만함이 없었고 (임금의) 마음에 젖음이 흠뻑하게 하니,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두 손을 모아 절하며,
지난날 선고께서는 증석〔사금지현〕과 같은 위치에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증삼〔피서지자〕의 처지가 되었구나.(증석 증삼 부자가 다같이 공자의 제자가 되었듯이 경문왕과 헌강왕이 다같이 대사의 제자가 되었음을 비유함) 뒤를 이어서 공동의 가르침을 얻었고 가슴에 간직하여 혼돈의 根源을 열었도다. 그런즉, 저 위수 가의 노옹(강태공)은 진실로 명예를 낚은 자이며 사상의 유자(장랑)도 대개 (노옹의) 자취를 밟은 것으로, 비록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나 한갓 세치의 혀〔삼촌설〕를 희롱했을 뿐이니, 어찌 나의 스승의 말과 같이 일편심을 은밀히 전하였겠는가. 받들어 행하여 감히 실대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태부왕은 본래중화의 글을 잘하여 금옥같은 그 음성으로 뭇사람의 시끄럽게 떠드는 것과 관계치 않고 능히 입을 열면 四六騈儷의 語句를 이루어서 평소에 미리 구성해 놓은 것과 같았다.
대사는 다 마치고 물러나와 또한 왕손 소판 금일의 초청에 응하여 몇차례 말을 나누고 곧 감탄하여,
옛날에 임금들 중에는원예(멀고도 장엄한체도)는 있으면서 원신(멀리내다 볼 줄 아는 신지)이 없는 자가 있는데,우리임금은 (둘 다) 갖추었고, 옛날에 신하들 중에는 공재는 있으면서 공망이없는 자가 있는데, 그대는 (둘 다) 온전히 가졌으니, 나라가 잘 되어 나갈 것이오, 마땅히덕을 좋아하고 스스로를 아끼시오.
라고 말했다. (山으로)돌아감에 모든 것을 사절했다. 이에 (임금이) 사자〔유軒〕를 보내어 방생장의 경계를 표시하니 곧 조수가 기뻐하였고, 어필을 들어 성주사의 제액을 쓰니 곧 용사가 살아 있는 듯하였다. 성사가 끝나자 좋은 시절이 어느듯 다하였다.(헌강왕이 승하함) 정강대왕이 왕위에 오르매 양조의 은총에 넘친 대우를 좇아서 그대로 행하였다. 승려와 속인을 거듭 사자로 하여 대사를 맞아드리게 하였으나, (대사는)늙고 병들었다 하여 사양하였다.
태위대왕께서 나라에 선정을 베풀게 되면서 높은 산처럼 (대사의) 덕을 우러러 보아, (임금의) 자리를 이른 지 석달에 말을 달려 안부를 묻게 한 것이 열 차례나 되었다. 얼마되지 않아서(대사가) 요통으로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 즉시 국의에게 명하여 가서 치료하도록 하였다. (국의가 대사에게) 이르러서 아픈 상태를 물으니 대사가 엷게 웃으며, "노병일 뿐이니 치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미음 두끼를 반드시 종소리를 들은 뒤에 내어오라고 하였다. 그 문도는 식력이 떨어질까 염려하여 종채를 맡은 사람에게 몰래 고하여 거짓으로 자주 치게 하였더니, (대사는) 바라지문 쪽으로 눈짓을 하며 미음상을 거두라고 명하였다.
장차 돌아가시려 할 때는 곁에서 시중드는 이에게 명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유훈을 일깨우라고 하며,
이미80〔中壽〕을 넘어 죽음〔大期〕을 피하기 어렵다. 나는 멀리 떠나니 너희들은 잘 있거라. 講하기를 한결같이 하며 지켜서 잃어버리지 말도록 하라. 옛 관리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으니 오늘날의 禪僧은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遺言의 말이 겨우 끝나자 그대로 돌아가셨다.
大師는 性品이 恭遜하고 敬虔하며 말씀이 和氣를 상하게 하지 않았으니 《禮記》에 이른 바, "몸은 謙遜한 듯하며 말은 나직하고 느린 듯하였다"는 것일진저!
學僧들을 반드시 禪師로 대우하였으며 賓客을 接할 때 일찍이 (身分의) 높고 낮음에 따라 恭敬함을 달리 하지 않았다. 까닭에 방에는 慈悲가 가득 넘쳤고 무리들이 기뻐하며 따랐다. 닷새를 주기로 하여 배움을 구하러 온 사람들에게 의심난 것을 묻도록 하였고, 生徒들을 타이를 때에 말하기를,
마음이 비록 몸의 主宰이기는 하지만 몸은 마땅히 마음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 너희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지 道가 어찌 너희에게서 멀리 있겠느냐. 설령 農夫라 하더라도 능히 俗世의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가 달리면 곧 마음도 달릴 것이다. 道師 敎父가 따로 種子가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또 말하기를,
저 사람이 마신 것이 나의 渴症을 해소하지 못하며 저 사람이 먹은 것이 나의 배고픔을 구하지 못하는데 어찌 힘써 자기 스스로 마시고 자기 스스로 먹지 않겠는가. 或者가 敎宗과 禪宗을 일러 같은 것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그 宗旨의 다름을 보지 못하였고, 말이 본래 많지만 내가 아는 바 아니다. 대략 같아도 許與하지 않고 달라도 비난하지 않으며 조용히 앉아서 機心을 삭하는 것, 이것이 一般僧에 가까운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 말은 明白하면서 道理에 맞고 뜻은 奧妙하면서 信實한 까닭에 능히 尋相을 無相을 삼아, 道를 닦는 사람으로 勤勉하게 행하게 하여 갈림길 속에 갈림길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장년에서부터 노년에 이르도록 스스로 낮추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식사는 糧食을 달리하지 않았고 옷은 반드시 均一하게 입었다. 무릇 짓거나 수리할 경우에는 수고로움이 뭇 사람보다 앞섰는데, 매양 말하기를, 祖師(迦葉祖師)께서도 일찍이 진흙을 이기셨거늘 내 어찌 잠시라도 편안히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물을 나르고 땔나무를 지는 일에 이르러서도 혹 몸소 친히 하였다. 또 말하기를, "山이 나를 위하여 더럽혀졌는데 내가 어찌 몸을 편안히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자기를 다스리고 사물에 힘씀이 모두 이와 같았다. 大師는 어려서 儒家의 책을 읽어서 남은 맛이 입술에 젖어 있었으므로 應答할 때에 韻語를 많이 썼다.
門弟子로 가히 이름을 부를 만한 사람이 거의 2千人이요. 외롭게 살며 "道場에 앉아 있다"고 일컫는 사람은 僧亮·普愼·詢乂·心光이다. 여러 佛孫이 많고 그 무리가 繁盛하니, 실로 가히 馬祖가 龍子를 길러서 東海(新羅)가 西河(中國)를 덮었다고 이를 말한다.
論하여 말한다. 《春秋(麟史)》에 말하지 않았던가. "公侯의 子孫은 반드시 그 처음으로 돌아온다"고. 옛날 武烈大王이 乙粲으로 있을 적에 濊貊을 무찌르기 위해 援軍을 얻을 計劃으로 眞德女王의 命令을받들어 昭陵皇帝(唐太宗)를 섬돌 아래서 뵈옵고, 面前에서 正朔을 받들고 服章을 바꾸기를 원한다고 말하니, 天子께서 嘉尙히 여기고 許諾을 하여 宮廷에서 中國式 服章을 내리고 特進의 벼슬을 주었다.
하루는 여러 藩邦의 王子를 招待하여 잔치를 했는데 술자리를 設置해 두고 寶貨를 쌓아 두고서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흡조깋 하게 하니, 이에 武烈王은 술드는 일은 禮로써 亂妄함으 防止하였고 아름다운 비단이 경우는 智慧로써 많이 얻었다. 하직의 말씀을 드리니 文皇이 눈을 돌리어 감탄하며, "國器로다"라고 말하였다.
新羅로 돌아옴에 미쳐, 皇帝가 친히 글을 짓고 쓴 溫陽·晋祠 두 碑 및 친히 저술한 晋書 한 부를 내려 주었다. 그 때 蓬閣에서 이 晋書를 베껴 겨우 두 本을 마쳤는데 皇帝가 하나는 太子〔儲君〕에서 주고 하나는 우리에게 주었다. 다시 華資官(華麗한 자리를 지닌 벼슬아치를 뜻함)에게 명하여 靑門 밖에서 길제사를 올리게 하니, 寵愛의 넉넉함과 禮의 도타움은 설령 智慧에 귀먹고 눈먼 사람일지라도 또한 귀와 눈으 놀라게 하기에 족할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 나라가 한번 변하여 魯나라처럼 되었고, 八世 뒤에 大師가 中國에서 배우고 新羅에서 敎化하여 한번 더 변하여 道에 이르렀으니, "더불어 크기를 비교할 수 없다"는 그 말이 우리를 제쳐 놓고 누구를 일컬을 것인가.
거룩하도다. 先祖께서는 두 敵國을 平定하여 사람들에게 겉 服章을 바꾸게 하였고 大師는 六魔賊을 降服시켜 사람들에게 內面의 德을 닦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千乘의 임금이 兩朝에 걸쳐 절하고 섬겼으며, 사방의 百姓이 萬里 먼 길에 달려와서, 움직이면 반드시 그들을 쉽게 부리었으며, 조용히 있으 때에도 속을 비방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어찌 五百年에 應하여 大千世界에 몸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으며,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 또한 마음에 차지 않으리요. 저 文成侯는 漢高祖의 스승이 되어서 萬戶에 封해지고 列侯의 위에 오른 것을 크게 자랑하여, 韓相의 子孫으로는 最高의 일로 여겼으니, 비루하도다. 가령 그기 仙道를 배움에 있어 끝까지 했더라면 과연 능히 대낮에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겠는가. 中途에 그쳤으니 鶴 등〔背〕위의 한 幻像의 몸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어찌 우리 大師가 처음에 凡俗을 벗어나고 中途에 大衆을 救濟하고 末境에는 자기 몸을 깨끗이 한 것과 같겠는가.
聖德을 아름답게 形容하는 것으로 옛날에는 頌을 崇尙했는데, 頌은 偈의 類이다.
虛寂의 世界를 두드려 銘을 지으니 그 글은 다음과 같다.
可道를 常道로 삼는 것은 풀 위의 이슬을 꿰는 것과 같고, 卽佛로 眞佛을 삼는 것은 물 속의 달을 잡아올리는 것과 같으니, 道의 떳떳함과 佛의 참다움을 얻은 이는 海東의 金上人이다. 그의 본 가지는 聖骨에 뿌리를 두었고 祥瑞로운 연꽃은 報身(實智를 갖추고 태어날 몸)에 이바지 하였네. 五百年에 땅을 골라 태어나고 三十歲에 俗世의 티끌을 떠났다네. 雜花(華嚴)가 鵬路(먼 길, 즉 구도의 길)로 이끌었고 관木(배)으로 鯨津(바다 즉 西海)를 건너갔다..〔其一〕
中原의 햇빛 아래 觀光하면서 큰 뗏목을 모두 능히 버렸다네, 高僧〔先達〕들이 모두 감탄하며, "苦行에는 미칠 사람이 없다"고 말하였네. 佛敎가 陶汰를 당하려하메 東으로 흘러오니 하늘이 내린 福이로다. 마음의 구슬은 麻谷에 통했고 눈 거울은 桃野(우리나라)를 비추었네,〔其二〕
이미 鳳凰이 와서 거동을 함에 뭇 새들이 다투어 따라왔네. 시험삼아 龍의 변화를 보아라. 凡人의 마음으로 어찌 헤아려 알겠는가. 우리 나라에 方便을 보이고 聖住寺에 억지로 住持하였네. 松門(절)에 두루 錫杖을 걸어 놓으매, 바위 길엔 立錐의 여지가 없었네.〔其三〕
나는 三顧를 기다리지 않았고 나는 七步롤 마중하지 않았네. 때가 나갈 만하면 또 나가니 부처님의 咐囑의 因緣을 위한 까닭이라. 두 임금이 下風에서 절하였고 온 나라가 甘露에 젖어들었네. 鶴이 나오니 깊은 골 하늘의 가을이요, 구름이 돌아가니 먼 바다 산이 저물었네.〔其四〕
나와서는 葉龍보다 귀하였고 돌아가서는 冥鴻보다 高尙하였으며, 물을 건너메 巢父를 편협하게 여겼고, 골짜기에 들어가메 郎公을 超越하였네. 한번 島外(中原)에서 돌아와서부터 세 차례 宮中〔壺中〕에서 노닐었네. 여러 迷惑한 이들이 부질없이 시비〔臧否〕를 말하나 窮極에 이르르면 어찌 같고 다름이 있겠는가.〔其五〕
이 道는 淡白하여 맛이 없으나 모름지기 힘써 먹고 마셔야 한다네. 다른 사람의 마신 술이 나를 취히게 하지 못하며, 다름 사람의 먹은 밥이 나를 배부르게 하지 못하네. 大衆을 警戒하여 마음을 억제케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名譽를 겨처럼 대하고 이익은 쭉정이처럼 대하는 것요, 風俗을 勸勉하여 몸을 닦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仁을 갑옷처럼 여기고 義를 투구처럼 여기는 것이라네.〔其六〕
퍼올리고 당김〔汲引〕에 버리고 빠트림이 없었으니 그는 실로 天人師로다. 지난날 世間에 계실 적에는 온 나라가 琉璃世界를 이루었더니 寂滅의 저승으로 돌아간 후부터는 닿는 곳만다 가시풀만 돋게 하도다! 泥洹(涅槃)이 어찌 그리 빠르신고, 今人과 古人이 함께 슬퍼하는 바이라.〔其七〕
돌을 꾸미고(建塔) 다시 돌에 새김에(竪碑), 형체는 감추어졌지만 자취는 드러났네. 鵠塔은 푸른 산에 점찍힌 듯있고, 龜碑는 푸른 벽을 고이었네. 이것이 어찌 본래의 마음이리요, 헛되이 文字를 보는 일에 수고롭지만, 後人에게 지금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은 現在에서 過去를 보는 것과 같은 것이라.〔其八〕
임금의 恩惠는 千年토록 깊고 大師의 敎化는 萬代의 欽慕를 받으리라. 누가 자루 있는 도끼를 잡을 것이며, 누가 줄 없는 거문고에 의지할 것인가. 禪境을 비록 지킬 이 없으나, 客塵을 어찌 侵入케 하리오. 鷄峯에서 기다리는 彌勒의 降生, 장차 다름 아닌 東쪽 鷄林에 있으리라.〔其九〕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는 국보 8호로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