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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사료

강화 천도

작성자빈구름|작성시간11.08.19|조회수220 목록 댓글 0

(고종 19년) 6월 신유일에 최우가 그의 집에 재추대신들을 모아 천도할 일을 의논하였다. 그때 평화가 오래 계속되어 서울의 호수가 10만에 이르고 단청칠한 좋은 집들이 즐비하였으며 정이 들어 사람들이 옮기기를 싫어하였다. 그러나 최우를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마디도 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유승단만이 홀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이치이다. 예의로 섬기고 믿음으로 사귀면 저들 역시 무슨 명분으로 늘 우리를 괴롭히겠는가? 성곽을 버리고 종사를 돌보지 않으며 섬에 죽치고 엎드려 구차스럽게 세월만 보내면서, 변방의 백성 중에서 장정들은 칼날에 다 맞아 죽게 하고 노약자들은 끌려가 종이나 되게 하는 것은 국가를 위하는 좋은 계책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밤에 별초지유인 김세충이 문을 박차고 들어가 최우에게 따지길, "서울인 개경은 태조 때부터 대대로 지켜와서 무려 2백여 년이 되었다. 성은 견고하고 군사와 양식은 풍족하다. 진실로 마땅히 힘을 합하여 지키면 사직을 지킬 수 있는데 이 곳을 버리고 가면 장차 도읍할 땅이 어디입니까?" 최우가 성을 지킬 계책을 물어보니 그가 능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어사대부주5)인 대집성이 최우에게 "김세충이 아녀자의 말을 믿어 큰 의논을 막으려 하였으니 그의 목을 베어 나라 안팎에 보이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응양군주6) 상호군주7)인 김현보도 대집성의 말에 찬성하였다. 드디어 김세충을 끌어내어 목을 베었다.

이 날 최우가 왕에게 속히 강화도로 행차할 것을 청하니 왕이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하였다. 최우가 녹봉을 옮기는 차 1백여 냥을 빼앗아 가재도구를 강화로 옮기므로 서울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담당관리에게 명령을 내려 날짜를 정해서 서울의 5부 백성을 보내게 하고, 성안에 방을 붙이기를 "머뭇거리고 제 때에 출발할 날짜를 지키지 못하는 자는 군법으로 처리하라." 하였다. 또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백성을 성이나 산성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7월 을유일에 왕이 개경을 출발하여 승천부주8)에 머무르고 병술일에 강화도의 객관에 들어갔다. 이 때 장마비가 열흘이나 계속되어 진흑길이 발목까지 빠져 사람과 말이 쓰러져 죽었다. 고관이나 양가의 부녀자들 중에도 맨발로 업고 이고 하는 자들이 있었다. 과부나 홀아비, 고아나 혼자 사는 사람으로 갈 곳을 잃고 통곡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고려사절요』권16, 고종 19년 6월,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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