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 9권, 8년(1842 임인 / 청 도광(道光) 22년) 6월 10일(정해)
영중추부사 홍석주의 졸기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홍석주(洪奭周)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대신(大臣)이 황야에 은둔한 지 무릇 몇 해가 되었는가? 하물며 선조(先祖)의 늙은 대신이 차례로 사망한 나머지에 서단(逝單)537) 이 또 이르렀으니, 놀랍고 애통함을 어찌 억제하겠는가?
죽은 영부사 홍석주의 상(喪)·장(葬)·제례(祭禮) 등의 절차는 선례를 안찰하여 거행하고, 녹봉(祿俸)은 3년을 한정하여 수송하게 하라.”
하였다.
홍석주는 어릴 때부터 문학(文學)을 전공하여 기주관(記注官)으로 정조(正祖)을 입시(入侍)하였었는데, 연중(筵中)에서 하교(下敎)하는 것이 무릇 수만여언(數萬餘言)에 이르러도 받들어 듣는대로 척척 붓을 들어 기록하였고 물러갈 쯤에 미처 한 글자도 고치지 않으니, 정조(正祖)께서 심히 가상하게 여기었다.
남에게 희귀한 책이 있다고 들으면, 반드시 빌려다가 읽고서야 말았으며, 문장을 지으매 평이(平夷)하고 담박하여 언제나 다시 뛰어나고 빼어나며 이상하고 특출하게 한 데는 없었으나, 일생 동안 힘쓴 일은 경적(經籍)으로 성명(性命)을 삼은 자이니, 거의 근세에 드물게 있었던 것이다.
정승이 됨에 미쳐서는 굳세게 대체(大體)를 지키는데 온 힘을 기울였고, 경제(經濟)의 사공(事功)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퇴연(退然)히 그 자리에 자처(自處)하지 않았으니, 대개 그 재주와 기력(氣力)을 스스로 심히 살펴서 알았기 때문에 그러하였다.
본관 풍산(豊山). 자 성백(成伯). 호 연천(淵泉). 시호 문간(文簡).
1795년(정조 19)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직장(直長)을 거쳐 주서(注書)로 검열을 겸하고, 1802년(순조 2)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듬해 응교(應敎)로 사은사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교리 ·도승지 ·부제학을 역임, 1815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1830년 병조판서에 승진, 다음해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1834년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순조가 서거하자 실록총재관(實錄摠裁官)으로 《순조실록(純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836년(헌종 2) 남응중(南膺中)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대사헌 김로(金路)의 탄핵을 받아 삭출(削黜)되었다가 1839년 대왕대비 김씨(金氏:순원왕후)의 특지(特旨)로 복직,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에 이르렀다.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한 10대 문장가로 꼽혔으며, 문집에 《연천집(淵泉集)》 외에 《학해(學海)》 《영가삼이집(永嘉三怡集)》 《동사세가(東史世家)》 《학강산필(鶴岡散筆)》, 편서(編書)에 《속사략익전(續史略翼箋)》 《상예회수(象藝薈粹)》 《풍산세고(豊山世稿)》 《대기지의(戴記志疑)》가 있다.
[출처] 홍석주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