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42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5월 16일(경진)
전 회령 절제사 이시애가 반역을 모의하고 수령들을 살해하다
함길도(咸吉道) 길주(吉州) 사람인 전 회령 절제사(會寧節制使) 이시애(李施愛)가 그 아우 이시합(李施合)과 더불어 반역[不軌]을 모의하고, 먼저 절도사(節度使) 강효문(康孝文)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마침 강효문이 진영(鎭營)을 순찰하여 본주(本州)에 이르니, 이시애가 반적(反賊)이라 성언(聲言)하고, 밤중에 몰래 강효문이 사통하는 기생 산비(山非)로 하여금 내응(內應)하게 하여, 강효문이 깊이 잠이 든 것을 엿보아 문을 열게 하고, 정병(正兵) 최자지(崔自池)로 하여금 돌입하여 찔러 죽이게 하였는데, 강효문이 몸을 빠져 뛰쳐나오므로 곧 추격하여 때려 죽이고, 그 머리를 뜰의 나무에 매달았더니, 얼마 아니 되어 그 나무가 말라 죽었다.
그리고 적이 또 평사(評事) 권징(權徵)과 목사(牧使) 설정신(薛丁新)·판관(判官) 박순달(朴順達)·부령 부사(富寧府使) 김익수(金益壽), 군관(軍官) 성이건(成以乾)·강석효(康碩孝)·이제(李堤)·최식(崔湜)·김수동(金壽同)·한희(韓熙)·김계남(金繼南)·강흥손(康興孫) 등을 모두 죽이고, 지인(知印) 이극지(李克枝)를 보내어 치계(馳啓)하기를,
“올량합(兀良哈) 등이 여러 번 적선(賊船)이 후라토도(厚羅土島)에 정박하였다고 고하였는데도 강효문이 묻지 아니하고, 적이 경원(慶源)과 종성(鍾城)의 공사(公私) 여사(廬舍)를 불살랐는데도 강효문은 경원 절제사(慶源節制使) 이종현(李宗顯)의 가노(家奴)를 시켜 이를 아뢰지 않았습니다.
충청도 연산(連山)에 사는 전 현감(縣監) 원맹손(元孟孫)의 가노(家奴) 고읍동(古邑同)이 수영(水營) 진무(鎭撫) 하수장(河水長) 등 40인과 함께 배에다 미곡(米穀)과 말안장[馬鞍]·쟁고(錚鼓) 등의 물건을 많이 싣고 길주(吉州)에 와서 정박하였다가 잡히어 이르기를, ‘올적합(兀狄哈)에게 군사를 청하여 이 도(道)의 인물(人物)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하였는데도, 강효문은 목사(牧使)와 판관(判官)과 함께 고읍동만 잡아다가 문초하여, 혹은 달래고 혹은 위협해서 육로(陸路)로 경유하여 온 자처럼 하였습니다.
또 지금 한창 농사철인데도 제진(諸鎭)의 정병(精兵)을 많이 거느리고 길주(吉州)에 이르렀으며, 정병을 뽑아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때를 당하여 협력하면 경중(京中)의 대신(大臣)과 내응(內應)하여 대사(大事)를 이룰 수 있다’ 하고, 설정신(薛丁新)·박순달(朴順達)·김익수(金益壽)와 사하북 만호(舍下北萬戶) 김정안(金正安) 등을 시켜 각각 진병(鎭兵)을 거느리고 서울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군관(軍官) 현득리(玄得利)의 공초(供招)에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세 차례나 상경(上京)한 것은, 절도사 강효문이 후라토도(厚羅土島)의 적과 도내(道內)의 군사(軍士)들을 거느리고 상경하고자 하여, 한명회(韓明澮)와 신숙주(申叔舟)·김국광(金國光)·노사신(盧思愼)·한계희(韓繼禧) 등에게 통서(通書)하여 약속을 정하려고 함이었는데, 글을 이들에게 다 주어서 모두 응낙(應諾)하여, 이내 돌아와서 강효문과 우후(虞候) 정육을(鄭六乙)에게 밀보(密報)하였다.’ 하였습니다.
또 공사(供辭)하여 이르기를, ‘강효문이 이달 초 7일에 정육을을 5진(鎭)에 보내어 제장(諸將)에게 군사를 더 뽑아 오도록 약속하고, 강효문은 바로 부절도사(副節度使) 황기곤(黃起崐)과 상응(相應)하여 경성부(鏡城府)를 출발해서 이달 초10일에 길주(吉州)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신이 군중(軍中)에서 회의(會議)하여 이미 강효문 등을 잡아 죽이고, 사직(司直) 이시합(李施合)으로 하여금 길주(吉州) 군사 20인을 거느리고 그의 무리 정육을과 경성(鏡城) 이북의 여러 진장(鎭將)을 포살(捕殺)하게 하고, 현득리(玄得利)와 고읍동(古邑同) 등을 가두어서 놓고, 친문(親問)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보고, 곧 이극지(李克枝)를 불러서 이시애의 반역한 상황을 묻고,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과 좌찬성(左贊成) 조석문(曹錫文)·도승지(都承旨) 윤필상(尹弼商)을 불러 다시 국문하게 하니, 이극지가 이시애를 몰래 돕고도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으므로, 의금부(義禁府)의 옥에 가두었다.
개성군(開城君) 최유(崔濡)가 이시애한테서 부쳐온 글을 아뢰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이제 정계(呈啓)한 서초(書草)와 대조하시면 아실 것이기에, 이에 속히 상달합니다.”
하였다.
이 시애는 최유의 표제(表弟 외사촌 동생)인 까닭에, 전후(前後)의 치계(馳啓)를 반드시 최유에게 통하여 주달하였다.
임금이 구치관 등과 이들을 정토(征討)할 계책을 밀의(密議)하고, 밤중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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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43권, 13년(1467 정해 / 명 성화(成化) 3년) 8월 12일(을사) 2번째기사
도총사 이준 등이 체포한 이시애·이시합을 문초한 후에 처형하다
(줄임)
이시애(李施愛)는 검교 문하부사(檢校門下府事) 이원경(李原景)의 손자였고, 【이원경은 본명(本名)이 올로첩목아(兀魯帖木兒)였는데, 원(元)나라 동녕부(東寧府) 동지(同知)였다. 태조(太祖)가 동녕부를 치게 되자, 이원경(李原景)이 항복하고 맞이하였으므로, 드디어 더불어 함께 와서 그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판영흥대도호부사(判永興大都護府事) 이인화(李仁和)의 아들이었다.
대대로 길주(吉州)에 거주하고, 그 족친(族親)이 여러 고을에 반거(盤據)하여 한 도(道)의 토호(土豪)였는데, 양민(良民)을 많이 모으고, 토전(土田)을 많이 점거(占據)하여 축적한 재산(財産)이 거만(鉅萬)이었다.
국가에서 호패(號牌)의 법을 행하자, 이시애가 그 정비하는 것을 싫어하여 드디어 역모(逆謀)를 일으키고, 그 족친 등으로 하여금 여러 고을의 군민(軍民)을 속여 유혹하고 말하기를,
“국가에서 남방(南方)의 병선(兵船)을 보내어 해로(海路)를 경유하고, 육군(陸軍)은 설한령(雪寒嶺)·철령(鐵嶺)을 경유하여 일시에 함께 들어와서 본도(本道)의 군민(軍民)을 다 죽일 것이다.”
하고, 또 고읍동(古邑同)을 유혹하여 병선(兵船)이 후라토도(厚羅土島)에 정박한 것을 고(告)하여 이를 증거로 삼았다.
마침 강효문(康孝文)이 순찰하여 길주(吉州)에 이르러 고읍동(古邑同)을 안문(按問)하자, 일이 심히 급하였으므로, 이시애가 즉시 강효문이 모반(謀反)한다고 증거하여 그를 죽이고, 여러 고을의 유향소(留鄕所)에 치서(馳書)하여, 관리(官吏)로서 성루에서 온 자를 다 죽이라고 하였다.
이때에 여러 고을에서 호응하여 앞을 다투어 죽이었다. 행상(行商)·승도(僧徒) 같은 이도 본도(本道) 사람이 아니면 또한 모두 죽이니, 정평(定平) 이북에서 모면한 자가 없었다.
거산(居山)의 싸움에서 패한 후부터 이시애가 길주(吉州)로 도망하여, 이성(利城)·길주(吉州)의 창고 곡식을 불태우고, 자기 집의 곡식을 인리(隣里)에게 흩어 주고, 자기 의복(衣服)과 안마(鞍馬)를 이명효(李明孝)에게 부쳐서 경성(鏡城)으로 보내었다.
그 죽인 절도사(節度使)·수령(守令) 등의 의복(衣服)·안마(鞍馬)를 조효창(趙孝昌)과 그 사위 박효손(朴孝孫) 등에게 부쳐서, 가서 야인(野人)을 유인(誘引)하여 응원(應援)하도록 청하고, 용성(龍城)에 이르러 다시 5진(五鎭)의 군사와 합(合)하여 관군(官軍)에게 크게 항거하고자 하여, 이시애가 패잔병(敗殘兵)을 거두어 경성(鏡城) 건가퇴(件加退)에 이르렀다가, 이운로(李雲露) 등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시애의 난
1467년(세조 13) 함경도의 호족(豪族) 이시애(李施愛)가 일으킨 반란.
세조는 즉위하면서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해 북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경관(京官)으로 대체하였으며, 수령들에게 지방유지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의 감독을 강화하게 하여 출신인 수령들과 유향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회령부사(會寧府使)를 지내다가 상(喪)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한 이시애는 유향소의 불만·불평과 백성의 지역감정에 편승해서 아우 시합(施合), 매부 이명효(李明孝)와 반역을 음모하고 1467년(세조 13) 5월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함길도의 절도사(節度使)가 진장(鎭將)들과 함께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고 선동하여 절도사 강효문(康孝文), 길주목사(吉州牧使) 설징신(薛澄新) 등을 죽이고 '방금 남도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로 쳐올라와서 함길도 군민(軍民)을 다 죽이려 한다'고 선동하자 흥분한 함길도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유향소를 중심으로 일어나 타도 출신 수령들을 살해하는 등 함길도는 대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또한 그는 중앙에서도 '병마절도사 강효문 등이 서울의 한명회(韓明澮)·신숙주(申叔舟) 등과 결탁하여 함길도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서 모반하려 하여 민심이 흉흉하니 함길도 사람을 고을의 수령으로 삼기 바란다'는 등 모략전술을 폈다.
세조는 이에 속아 신숙주 등을 투옥하였다가 곧 구성군(龜城君) 준(浚)을 병마도총사(兵馬都摠使)로 삼아 토벌군을 출동시켰다.
이시애는 여진족까지 끌어들여 대항하였으나 허종(許琮)·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 등이 이끄는 3만 군대는 홍원(洪原)·북청(北靑)을 돌파하고 이원(利原)의 만령(蔓嶺)에서 반란군 주력부대를 분쇄하였다.
이시애는 길주를 거쳐 경성(鏡城)으로 퇴각하여 여진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이 당시 사옹별좌(司饔別坐)의 벼슬에 있던 이시애의 처조카 허유례(許惟禮)는 자기 부친이 억지로 이시애의 일파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시애의 부하인 이주(李珠)·황생(黃生) 등을 설득하여 이들과 함께 이시애 형제를 묶어 토벌군에게 인계하였다.
8월 이시애 등이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목이 잘림으로써 3개월에 걸쳐 함경도를 휩쓴 이시애의 난은 평정되었다.
이 난으로 길주는 길성현(吉城縣)으로 강등되고 함길도는 남·북 2도로 분리되었으며, 유향소도 폐지되었다.
구성군 준과 조석문(曺錫文)·어유소·허종·허유례 등 41명은 조선의 제6차 공신인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으로 녹훈되었다.
[출처] 이시애의 난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