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는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대표적인 역사학자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 였다. 1880년 12월 8일, 가난한 농촌선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신채호는 어려운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9살때 통감을 모두 읽었고 12살 때는 사서삼경을 모두 외워 동네에서 신동이라는 애기를 들었다. 신채호가 조선의 현실과 역사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계기는 1898년 가을 19살 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서울에 올라오면서 였다. 당시 서울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우리 민족의 모습이 펼쳐지는 투쟁의 현장이었다. 신채호는 이 때 독립협회 주최로 열린 만민공동회에 참여, 투옥되면서 외세의 힘 앞에 갈팡질팡하는 나라의 현실을 직접 목격하였다. 신채호는 이에 1906년부터 대한매일신보 논설기자로 활동하면서 신문논설을 통해 일본의 침략과 친일파들의 매국행위를 꾸짖고 우리민족이 힘을 모은다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907년에는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에 참가하여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1910년 4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海潮신문, 靑丘신문 등의 지면을 통해 해외동포들에게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5년에는 북경에서 申圭植과 신한청년회를 조직하여 해외 조선청년들을 단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朴殷植.文一平 등과 함께 博達학원을 세워 청년들의 교육에 힘썼다. 3.1운동 뒤인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는 전원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新大韓의 주필로 있으면서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주저하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타협적인 태도를 비판하였다.특히 1923년 1월에는 무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의열단의 이념과 독립운동 방법을 서술한 [조선혁명선언]에서 신채호는 일제가 조선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임을 선언함과 함께 강도 일제를 혁명으로 무찌르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임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일제를 몰아내고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려면 혁명의 길 밖에 없으며, 그 혁명은 '민중직접혁명'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여기서 신채호는 민중직접혁명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자치운동, 독립방법에서의 외교우선주의, 실력양성론, 식민지하의 타협적 문하운동을 철저히 비판하였다. 신채호의 이러한 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과 함께 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가로서의 활동이다. 사실 신채호는 우리나라 역사학을 근대 학문으로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신채호는 역사가로서 {조선사}.{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독사신론} 등 많은 저작을 남겼다. 신채호는 자신의 독립운동은 우리나라 역사를 연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신채호가 1910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하던 어려운 시기에도 고구려 역사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 였다. 1914년 고구려 유적지 답사는 신채호의 역사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신채호는 고구려의 유적을 한번 보는 것이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만번 보는 것보다 났다고 말하였다.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고 돌아온 신채호는 {조선사}, {조선상고사}를 쓰기 시작하였다. 신채호는 이 때까지 역사나 역사속의 영웅을 통해 국민을 계몽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점에서 신채호는 이 때까지 계몽주의적인 역사관을 지니고 있었다. 신채호는 모든 국민을 영웅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하지만 현실의 국민은 어리석기 때문에 국민은 지식인의 계몽을 받아서 영웅적인 또는 지성과 덕성을 갖춘 서구적인 국민으로 개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신채호의 이러한 생각은 1919년 북경에서 3.1운동 소식을 들으면서 바뀌게 되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말만으로 독립운동을 하자하면서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민중들은 스스로 일어나 일제와 피를 흘리며 싸웠던 것이다. 신채호는 이제 민중의 힘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역사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나아가 신채호가 {조선사} 총론에서 제시한 역사이론과 방법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상고사}의 원래 이름은 {조선사}이다. 그러나 처음에 우리나라, 곧 조선의 역사 전체를 다루려던 신채호의 {조선사} 집필 계획이 상고사 부분에서 끝나게 되었으므로 {조선상고사}로 불려지고 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자신의 고대사 인식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신채호는 무엇보다 한반도 특히 신라 중심의 역사인식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다. 신채호는 김부식을 비롯하여 신라 중심의 역사인식을 갖고 있던 과거의 역사가들을 사대주의 역사가로 비판하였다. 아울러 우리역사를 왜곡시킨 일제 식민사가들도 맹렬히 규탄하였다. 신채호는 이러한 입장에서 한국고대사의 영역을 신라, 한반도에 국한시켰던 기존의 역사인식을 광활한 만주대륙, 고구려로 확대시켰다. 신채호는 따라서 '정통론'의 입장에서 檀君-箕子-衛滿조선.馬韓-신라로 연결되는 고대사 인식 체계를 거부하고, 단군-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인식체계를 내놓았다. 우리나라 고대사를 이렇게 이해하는 역사인식이 {조선상고사}의 뚜렷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조선상고사}에는 신채호의 역사이론과 연구방법론이 잘 나타나 있다. 먼저 신채호는 역사를 '我와 非我의 투쟁'으로 정의하고 있다. 신채호는 이러한 인식을 우리민족의 역사서술에서 구체화한다면, 식민지였던 조선이 아의 입장에 있게 되고 제국주의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가 비아의 입장에 놓이게 된다. 역사를 이러한 입장에서 바라볼때, 당시 아의 입장인 우리민족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비아인 일제와 투쟁하여 독립을 이뤄내는 일이 된다. 신채호는 나아가 역사발전의 동력을 사물의 모순관계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신채호는 서로 대립하고 모순되는 아와 비아의 투쟁을 통하여 인류역사가 발전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신채호의 이러한 인식은 물론 서양의 변증법을 반영하고 있지만, 당시의 역사인식을 넓히는데 공헌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신채호는 아울러 역사연구의 객관성을 중시하였다. 신채호에게 역사연구란 아와 비아의 투쟁, 모순관계의 투쟁을 통하여 사회가 발전하고 진보하는 과정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이었다. 그는 역사가 역사가의 뜻에 따라 고쳐지거나 덧붙여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는 역사연구에서 실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신채호의 역사인식은 일제시기 우리의 역사연구가 근대학문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역사에서 우리민족과 민중의 끊임없는 투쟁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런 점에서 신채호를 한국근대역사학을 확립한 '위대한' 역사학자라 불러도 크게 손색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