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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인물

김돈중(고려사 열전) 2003-08-04

작성자빈구름|작성시간13.01.27|조회수223 목록 댓글 0

김돈중은 인종 때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지공거(知貢擧) 한유충(韓惟忠) 등이 처음에 김돈중을 제2위로 평정하였더니 왕이 그의 아버지[김부식]를 위로하여 주고자 장원으로 급제시켰다.

내시직에 있을 때 궁중에서 나희(儺戱)하는 날 밤에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불태우는 희롱을 하였더니 정중부가 이 일로 인하여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의종 때에 여러 번 벼슬이 올라 시어사로 되었다. 왕이 내시 정함을 합문지후(閤門祗侯)로 임명하니 김돈중이 그의 임명장에 서명을 거부한 탓으로 호부 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강직되었다가 다시 시랑(侍郞)으로 전직되었다.

전자에 이부시랑 한정(吏部侍郞韓靖)은 이원응(李元膺)과 사이가 나쁜 까닭에 파직당하였었는데 당시 왕이 따로 인제원(仁濟院)에다 절을 창건한 후 왕의 복을 축원하는 곳으로 정하였다. 그러자 때마침 이원응이 죽고 한정은 복직되었는바 그가 임금을 위해서 열성으로 기도를 올리었으며 한편 김돈중도 아우 김돈시와 더불어 김부식이 창건한 관란사(觀瀾寺)를 중수하고 역시 왕을 위하여 복을 빌었으므로 소문이 났다.

왕이 김돈중, 김돈시, 한정에게 말하기를  “들은즉 그대들이 나를 위하여 복을 축원한다 하니 대단히 고마운 일이다. 내가 한번 가서 보겠노라.”  고 하였다.

 김돈중 등이 절의 북쪽에 초목도 없는 붉은 산에다가 근처 주민들을 동원시켜 소나무, 잣나무, 삼나무, 전나무며 기이한 화초를 이식하고 또 단(壇)을 축조하여 왕이 휴식할 집을 신축하였는데 단청으로 장식하였으며 섬돌은 모두 기괴한 돌로 만들었다. 어느 날 왕이 절에 나갔는데 김돈중 등이 절 서쪽 축대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바 장막과 그릇들이 극히 화려하고 사치스러웠으며 음식도 극히 진기한 것으로 차렸다. 왕이 재상들과 측근자들을 데리고 가서 유쾌한 놀이를 하였으며 김돈중, 김돈시에게 은을 세 덩이(錠)씩 주고 한정에게는 두 덩이를 주었으며 각각 비단 10필, 단사(丹絲) 70근씩 주었다.

의종 21년에 김돈중이 좌승선(左丞宣)으로 임명되었는데 관등(觀燈)하는 날 밤에 왕이 봉은사(奉恩寺)로 갔다가 밤중이 관풍루까지 돌아왔을 때 김돈중이 탔던 말이 평소부터 조련되지 못하였고 더욱이 징(鉦)과 북(鼓)을 치는 소리에 놀라서 날뛰다가 그만 어떤 기병과 충돌하였다. 그 바람에 기병의 전통에서 화살이 뛰어나가서 왕이 타고 가던 연(輦)옆에 떨어졌다. 김돈중이 미처 사유를 자백하기 전에 왕이 깜짝 놀라며 이것은 필경 누구가 암살하려고 쏜 살이라고 억측하고 의장병이 들었던 산선으로 연(輦)을 감싸게 하고 말을 급히 달려서 환궁한 후 궁성 내에 경비를 엄격히 했으며 해당 부서에 명령하여 시내 각처에 방을 붙이고 현상으로 범인을 잡으라 하였더니 체포된 자가 대단히 많았다.

왕은 대녕후 왕경(大寧侯王暻)의 집 하인, 나언(羅彦) 등의 소행이라고 의심하고 가혹한 가문을 가하여 억지로 자백시키고 드디어 그를 죽였다. 또 호위병들이 태만하였다는 이유로 견룡(牽龍), 순검(巡檢), 지유(指諭) 등 14명을 귀양 보냈다.

당시 왕이 자주 연복정(延福亭)에 놀려 나갔는데 하루는 한뇌(韓賴), 이복기(李復基), 허홍재(許洪材) 등과 함께 그곳에서 하루를 술놀이 하고 다시 염현사(念賢寺)로 자리를 옮기고자 타고 갈 연(輦)을 준비시켰다가 또다시 배(舟)에 올라 술자리를 차리고 모두 술이 취하도록 마시며 밤이 늦도록 돌아갈 줄 모르고 놀았으므로 호위 병졸들이 한뇌, 이복기를 깊이 원망하게 되었다. 이때 김돈중이 왕의 앞에 나가서 아뢰기를  “아침부터 밤중까지 호위 군졸들은 모두 굶고 또 피로하였는데 상감께서는 무엇이 그다지 즐거우십니까? 또 캄캄한 어둔 밤에 무엇을 관람하실 것이 있어서 여기에 오래 두류하시렵니까?”  라고 하였더니 왕은 불쾌하였으나 배에서 나오게 되었으며 때는 이미 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보현원(普賢院)에서 사변이 생겼을 때 김돈중도 수행하였는데 도중에서 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취한 척하고 말에서 떨어져 감악산(紺嶽山)으로 도피하였는데 정중부가 숙감을 품고 그를 기어코 붙잡으라고 다그쳤다. 이때 김돈중은 가만히 심부름꾼을 서울에 들여 보내 자기 집의 안부를 탐문하라고 시켰더니 그 자가 상금에 탐이 나서 밀고하였으므로 김돈중이 잡혀서 사천(沙川) 가에서 살해당하였는데 죽을 무렵에 그는 탄식하기를  “나는 한뇌나 이복기의 당파는 아니니 사실 아무 죄도 없다. 다만 화살 사건으로 인해서 무죄한 사람들이 해를 입게 되었으니 오늘 이런 변을 당하는 것도 의당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아들은 김군수(君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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