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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인물

최춘명(고려사 열전) 2003-08-05

작성자빈구름|작성시간13.01.27|조회수288 목록 댓글 0

최춘명  최춘명은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후손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절조가 있었다. 고종 15년에 자주 부사(慈州副使)로 재직할 때에 몽고병이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므로 최춘명이 관속과 인민들을 인솔하고 성(城)을 고수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몽고 원수 살례탑이 이 일에 대하여 조정에 힐책하였으므로 내시 낭중(郎中) 송국첨(宋國瞻)을 보내 몽고군에게 항복하라고 권유하였으나 최춘명은 성문을 닫고 상대하지도 않으므로 송국첨이 욕설을 퍼붓고 돌아갔다. 그 후 3군의 장령들이 살례탑에게 항복하게 되자 살례탑이 회안공(淮安公) 왕정에게 말하기를 “자주가 항복하지 않으니 사람을 보내 항복하게 하라!”고 요구하였다. 왕정이 후군 진주(陣主) 대집성(大集成)을 파견하여 몽고 관리와 함께 성(城) 아래에 가서 말하기를 “조정에서 와 삼군이 이미 항복하였으니 속히 나와 항복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최춘명은 성루(城樓)에 앉아서 사람을 시켜 대답하기를 “조정의 명령이 내리지 않았는데 무엇을 믿고 항복하란 말인가?”라고 하였다. 대집성이 말하기를 “회안공이 와서 항복을 청했으므로 3군이 또한 항복하였으니 이것으로도 믿지 못하겠는가?”라고 하니 최춘명이 말하기를 “성중 사람은 회안공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고 그 일행을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몽고 관리가 대집성을 책하면서 성안으로 들어가라 하니 최춘명이 군사들을 시켜 활을 쏘므로 모두 달아났다. 이렇게 하기를 세네 번 반복하였으나 끝내 항복하지 않으므로 대집성이 깊이 앙심을 품고 돌아왔으며 살례탑도 그를 꼭 죽이게 하려 하였다. 왕이 재상과 고관들에게 문의한즉 모두 경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대집성이 최이의 집으로 찾아가서 최이에게 말하기를 “최춘명이 명령을 거역하고 항복하지 않으므로 몽고가 노하고 갔으니 장차 적지 않은 화변이 있을 것이니 그를 죽여서 몽고에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왕과 재상들이 모두 주저하고 결정하지 못하니 당신이 독단으로 죽이라”고 하니 최이가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재상들도 모두 부득이 죽이는 것을 동의하였는데 그중 유승단(兪升旦)만은 그를 죽여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듣던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최이가 내시 이백전(李白全)을 서경(西京)으로 파견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게 하였다. 그런데 최춘명은 낯빛이나 말이 조금도 변하지 않으니 몽고 관원이 “이 사람은 누군가?”고 물었다. 이백  전이 “자주 원이다”라고 대답하니 몽고 관원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비록 우리에게는 적이나 당신들에게는 충신이다. 우리가 그를 죽이지 아니 하는데 당신들이 이미 우리와 강화를 약속한 오늘에 성(城)을 끝까지 고수한 충신을 죽이는 것이 옳은가?”라고 하면서 죽이지 말 것을 굳이 청하였다. 후일 공로를 평정할 때에 최춘명을 제일 위로 결정하고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로 등용하였다. 그는 37년(1250)년에 죽었다.  아들은 최점(崔恬)인데 위위경(衛尉卿) 벼슬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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