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규의 처음 이름은 홍문계(文系)라고 하였는데 남양(南陽)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 홍진(縉)은 동지 추밀 원사를 지낸 사람이었다.
홍규는 성질이 사소한 일에 개의(介意)하지 않고 담박(淡泊)하여 욕심이 적었으며 자유롭게 행동하여 구속을 받지 않았다. 원종 때에 어서 중승으로 임명되었다.
임연이 죽고 그 아들 임유무가 아버지를 계승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홍규는 임유무가 자부(姉夫-자형)였기 때문에 임유무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홍규와 송송례(宋松禮)에게 의논하였다. 홍규와 송송례가 겉으로는 그를 따르는 것처럼 하였으나 속으로는 항상 분개하고 있었다.
왕이 원나라로부터 돌아오자 임유무가 왕의 명령을 거역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서울과 지방의 민심이 흉흉하였다. 왕이 이분성(李汾成)을 홍규에게 보내 가만히 타이르기를 “그대는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고위, 고관에 오른 집안에서 생장한 사람이니 의리와 형세를 생각하여서라도 국가에 이익을 가져다 주어 조상들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니 홍규가 재배하고 이분성에게 말하기를 “내일 나를 부문(府門-승천부의 문) 바깥에서 기다려 주시오!”라고 하였다. 그는 즉시 송송례와 더불어 계책을 세워 삼벌초를 모아 대의(大義)를 해설하여 임유무를 사로잡아 거리에서 베어 죽인 후 그 길로 행궁(行宮-왕의 임시 처소)에 가서 왕을 만나고 세자를 따라 원나라로 갔다. 원나라 황제는 그에게 비단 도포(袍)와 안장 얹은 말을 주면서 그의 공로를 표창하였으며 우리 나라에 1품 관직을 주라고 하였다. 이에 그를 좌부승선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나라일이 날이 갈수록 시원찮게 되어 가고 또 동료들이 권세 있는 자들에게 아부하여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하여 벼슬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과 한 패로 되어 있음을 부끄럽게 여겨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를 추밀원 부사로 임명하였으나 또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이때 그의 나이 아직도 40미만이었다.
충렬왕이 공주와 더불어 양가(良家)의 처녀를 선발하여 원나라 황제에게 바치려고 하였을 때 홍규의 딸도 그 선발에 걸리었으므로 권세가 있고 지위가 높은 자들에게 뇌물을 주었으나 빠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홍규가 한사기(韓謝奇)에게 말하기를 “나는 딸의 머리칼을 잘라 버리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하였더니 한사기가 말하기를 “글쎄 당신에게까지 화가 미치지나 않을까?”라고 하였으나 홍규가 그 말은 듣지 않고 딸의 머리칼을 잘라 버렸다.
공주가 이 소식을 듣더니 크게 성을 내어 홍규를 잡아 가두고 혹독한 고문을 하였으며 그 집 재산을 몰수하였다. 또 그 딸을 잡아 가두고 물어 보니 딸이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잘랐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사실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주가 그를 땅바닥에 자빠뜨리게 하고 쇠로 만든 매로 난타하게 하니 그의 피부가 온전한 데가 없어졌으나 그래도 종내 굴복하지 않았다.
재상이 공주에게 홍규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니 소소한 죄로 인하여 무거운 형벌을 가할 수는 없다고 말하였으며 또 중찬 김방경이 역시 병석에서 부축을 받으면서 나와 용서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공주가 듣지 아니 하고 해도에 귀양 보내고 말았다. 얼마 안 되어 홍자번이 힘써서 요청하였기 때문에 그의 재산은 돌려 주게 되었으나 공주의 성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서 그의 딸을 원나라 사신 아고대(阿古大)에게 주었다.
그 다음해에 가서야 소환되었고 첨의 시랑 찬성사 판전리 사사로 관직을 높여 주어 치사하게 하였는바 왕이 그에게 교서를 내리기를 “역적인 신하 임연이 권력을 잡고 왕실을 좌지우지하려다가 곧 하늘의 처벌을 받아 죽었고 그 아들 임유무가 아비의 권세를 계승하여 반란을 꾸미었다. 내가 원나라로부터 부왕(父王-원종)을 모시고 원나라 군대와 함께 압록강에 도착하여 먼저 모든 관료들에게 명령하여 옛서울에 나와 마중하라고 하였더니 임유무가 지기 일당을 규합하고 군대를 양성하여 원나라 군대를 항거하여 나서려고 하였다. 이때 그대는 충의를 발휘하여 사생을 헤아리지 않고 송송례, 김지저와 함께 반역자들을 쉽게 없애 버리어 국가가 다시 안정하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영원토록 잊지 못할 공로를 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부왕께서는 그대를 왕명을 출납하는 관직에 임명하고 또 왕을 보좌하는 요직에 두기도 하였으나 그대는 모두 다 굳이 사양하고 시골에 은퇴하여 20여 년을 살아 왔다.
내가 그대의 옛공적을 회상하고 소관 관리에게 명령하여 벽상에 그대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며 철권(鐵券-철편에다 공로를 새긴 문건)을 주는 동시에 전민(田民)을 나누어 주게 한다.
그러나 공로는 큰데 포상은 적어서 마음에 항상 부족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그대에게 판사(判事)의 직위를 주었으나 그대는 늙어서 일하지 못하겠다고 더욱 간절하게 사양하였으므로 임시로 퇴관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녹위(祿位)를 피하여 받지 않으려 하니 내가 억지로라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공신들에게 상을 준 옛규례를 따라서 비록 큰 과오를 범하였다 하더라도 모두 다 용서하여 주며 그대의 자손들에게 이르기까지 이러한 혜택을 적용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중찬 치사(中贊致仕)로 올려 주었으며 얼마 후에는 판삼사사 수사도(守司徒) 영경영 궁사(領景靈宮事)로 임명하였다.
충선왕 초년에 익성군(益城君)으로 책봉하였고 또 첨의 정승 익성군 지 익성부사(知益城府事)로 올려 주었다. 충숙왕 3년에 추성 진력 정안(推誠陳力定安) 공신의 호와 남양 부원군, 상의 첨의도감사를 주고 그가 죽어서 광정(匡定)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그의 아들은 홍융(洪戎)이요 딸 하나는 명덕 태후(明德太后-공민왕의 어머니)이다.
홍융은 충숙왕 때에 삼사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후실은 만호 황원길(黃元吉)의 딸인데 용모가 아름다웠으므로 홍융이 항상 그를 규방 속깊이 감추어 두고 친척이 와도 서로 만나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홍융이 충혜왕에게는 외숙으로 된다.
홍융이 죽은 뒤에 내료 최화상(崔和尙)이 황씨가 아름답다고 칭찬을 하므로 충혜왕이 밤에 그 집으로 가서 가만히 정을 통하였고 금, 은으로 만든 그릇, 무늬 있는 비단, 모시 베, 쌀, 콩을 주었으며 황씨 역시 왕을 맞아다가 그 집에서 연회를 차리었다. 왕이 열약(熱藥)을 먹었는데 왕과 관계한 부인들에게는 임질이 많았다. 황씨 역시 임질을 얻었으므로 왕이 의술을 아는 중 복산(福山)에게 명령하여 그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홍융이 처음에 밀직 나유(羅裕)의 딸과 결혼하여 홍주(澍), 홍언박(彦博), 홍언유(彦猷)의 세 아들을 낳았으며 황씨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는 홍언수(彦脩)이고 하나는 그 이름이 역사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홍주는 관작이 첨의 상의(僉議商議) 삼사우사(右使) 남양군에 이르렀으며 충혜왕 후 3년에 죽었는데 날마다 술에 취하여 지내고 경제 상 이익이나 명예를 얻으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홍언박은 따로 열전이 있다.
홍언유는 중대광(重大匡) 남양군으로 되었으며 홍언수는 참지문하부사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