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처음 이름은 경(璟)이요 청주(淸州) 사람인데 성질이 불교의 교리를 아주 좋아하였다.
고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들을 거쳐 감찰 어사로 승진되었고 지방관으로 나아가 금주(김해)의 수령으로 되었다. 이보다 앞서 금주에는 전부(田賦-토지에서 거두는 세)가 항상 규정된 수량에 도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수령들이 파직당하는 자가 많았는데 한강이 처음 부임하자 폐지하였던 둔전(屯田)을 정리하여 곡물 2천 석을 얻어 내었기 때문에 아전들은 나쁜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고 백성들은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정치한 성적이 으뜸이라 하여 소환되어 예부낭중으로 되었다.
그 후 공부 시랑, 간의대부, 국자대사성, 한림학사의 관직들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때에 지밀직사사로 되었고 판삼사사로 전임되었다.
당시 양부의 대신들이 나라일을 토의하는데 서로 미루기만 하고 누구 하나 주관하여 보려는 자가 없다 하여 비로소 재추소 사존(宰樞所司存)이란 관직을 설치하고 한강을 그 직위에다 임명하였다.
그 후 그는 찬성사로서 치사하였으며 다시 중찬으로 승직시켜 치사하게 하였다.
왕이 한강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왕위에 있은 지도 이미 오래되어 금년에는 환갑 나이가 되었으니 더욱더 근신하고 소심하게 일을 보아야 하겠다. 그대는 실행해야 할 만한 일들을 일일이 말해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한강이 “종묘(宗廟)를 보수하고 악기들을 갖추어 1년 4시절마다 진행하는 제사를 엄격히 절차대로 할 것과 여러 관사(官司)들에서 시장의 물품들을 눅은 값으로 강제 매상하는 것을 금지할 것과 유기된 해골과 시체들을 매장해 줄 것과 생물들을 놓아주고 도살하는 것을 금지시킬 것과 사냥 놀음을 그만두고 맛있는 음식들을 절약해서 쓸 것과 겨울철 아주 추울 때나 여름철 아주 더울 때에는 죽물을 끓여 굶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구제해 줄 것” 등을 요청하였다.
또 그가 말하기를 “선대의 왕들은 지겸(地鉗-지세가 해로운 곳)을 살펴보고 탑묘(塔廟)를 세웠는데 후세 사람들은 제뜻대로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세우는 일이 많아서 심지어는 불상들을 풀숲 속에 노출된 채로 내버려두게 하고 있으니 해당 판사에 명령하여 옛사찰들을 보수하게 해야 합니다. 또 예로부터 임금들이 모두 불교의 법리를 믿어서 나라의 복지를 증진케 하였는데 전하께서는 법화경(法華經)을 가장 숭상합니다. 만일 일상적으로 수량품(壽量品-외우면 무한한 장수를 한다는 법화경의 일부)을 송경한다면 더욱더 수명을 오래 연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가 죽으니 문혜(文惠)라는 시호를 주었다.
아들은 한사기(韓謝奇), 한보(韓潽)이다.
한사기는 관직이 간의대부에까지 이르렀고 그의 아들은 한영(韓永)과 한악(韓渥)이다.
처음에 한사기가 독로화로 되어 가족들을 데리고 원나라에 들어가 있었는데 한영은 황제의 측근에서 자라나고 인종(仁宗) 황제를 섬겨서 관직이 하남부(河南府) 총관에까지 이르렀다. 한영이 높은 지위에 올랐기 때문에 한사기에게는 한림 직학사 고양현후(高陽縣候)의 관작을 증여하였고 한강(康)에게는 첨태상예의원사(僉太常禮儀院事) 고양현백(縣伯)의 관작을 증여하였다.
한악(渥)은 충선왕 때에 우대언으로 임명되었으며 충숙왕이 즉위하자 선부 전서(典書) 지밀직사사의 관직을 그에게 주었다. 원나라에서 조서를 내리어 왕에게 입조(入朝)하라 하였을 때 한악이 왕을 따라갔었다. 당시 심(瀋)왕 왕고(王暠)가 왕위를 노리어 백, 천 가지 일들을 꾸며서 왕을 참소하였다. 한악이 기묘한 계책을 써서 왕을 화단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하였으므로 그는 1등 공신으로 되었고 왕이 그에게 철권(鐵券)을 주고 그의 초상화를 벽상(壁上)에 그리게 하였으며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으로 봉하고 선력 좌리(宣力佐理)의 공신호를 주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찬성사로 되었고 충혜왕 초년에 중찬으로 승진하였다. 그가 죽으니 사숙(思肅)이라는 시호를 주었으며 그 후 충혜왕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케 하였다.
그는 성품이 근면하고 신중하였고 능력과 도량이 있었으며 매양 무슨 일을 할 때면 세 번 생각해 보고서야 실제 행동에 옮겼으며 몽고어와 중국어를 상당히 잘 알았다.
그의 아들은 한대순(韓大淳), 한공의(韓公義), 한중례(韓仲禮), 한방신(韓方信)이다.
한대순은 관직이 지도첨의사사에 이르렀다가 충정왕 말년에 기장(機張)〔헌〕감무로 강직되었다. 한공의는 청성군(淸城君)으로 책봉되었고 평간(平簡)이란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