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문보 백문보의 자는 화보인데 직산현 사람이다. 충숙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춘추 검열(春秋檢閱)로 임명되었고 누차 조동되어 우상시(右常侍)로 임명되었다. 공민왕 초년에 전리 판사로 조동되었다. 그는 임금에게 글을 올려 십과(十科)를 설치하여 선비들을 뽑을 것을 청하였다. 그는 밀직제학으로 임명되었다. 전쟁후에 사국(史局)에 보관된 역사 원고와 실록이 겨우 몇 상자 밖에 안 남았다. 왕은 청주에 있으면서 공봉(供奉) 곽추를 파견하여 이것을 해인사에 옮겨다 두려고 하였다. 백문보는 그 당시 서울에 남아 있었던바 김희조와 의논하기를 “지금 난리가 겨우 평정되었는데 갑자기 국사(國史)를 옮겨 사람들의 시청(視聽)을 놀래게 할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곽추를 남겨 두어 다음 명령이 오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다. 그 후에 임금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대대로 동방 지역을 지키고 있어 문물 예악이 고대의 유풍이 있습니다. 뜻밖에 난리가 누차 일어 나서 홍적이 서울을 함락시켜 전하께서 남쪽으로 갔었습니다. 이것을 말하게 되면 마음이 아픕니다. 지금 난리를 겪은 후이라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로 곤란하니 마땅히 너그럽게 은혜를 베풀어 남은 백성들이 혜택을 받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자연의 운수는 순환하며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700년을 한 개의 소원(小元)이라 하고 3600년을 쌓아 한 개의 대주원(大周元)으로 되는바 이것이 황, 왕, 제, 패(皇王帝覇)의 치란 성쇠의 주기(週期)입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부터 지금까지 이미 3600년이 되니 이것은 한 개의 주원이 되는 시기입니다. 때문에 마땅히 요, 순 육경(堯舜六經)의 길을 따라야 하며 공리, 화복(功利禍福)설을 실행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한다면 하늘의 도움을 얻어 음양이 때를 맞추어 순조롭고 국운이 연장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예종 때에 청연(淸燕) 보문각(寶文閣)을 둔 옛일을 생각하시고 천인 도덕(天人道德)의 설을 강구하여 성학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또한 방방곡곡 마을들이 모두 다 바르게 되면 국가가 태평하여질 것입니다. 중국의 당나라에서는 향(鄕)에 대중정(大中正)을 두었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건국 초기에는 사심(事審)을 두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대소 주군에 다시 사심을 회복하여 비법 행위를 감찰케 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라 때에 비로소 불교를 숭상하게 되어 백성들은 중이 되는 것을 좋아 하여 향역(鄕驛)의 아전들이 모두 다 부역을 도피하였으며 대부분 아들 하나만 있으면 모두 다 머리를 깎았습니다. 앞으로는 관청에서 도첩(度牒-승려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증명서)을 받아야만 중이 되게 하며 장정이 3명 이하의 집에 대해서는 도첩을 발급할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앞서 왕이 서울에 돌아 와 임시로 종묘 신주(廟主)를 미타사에 두고 환안 도감을 설치하였는데 백문보와 평양백 김경직이 이 일을 맡아 보았다. 이 일을 한 달이 넘도록 지연시키니 왕이 성을 내면서 독촉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참고할 만한 전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사관(史官) 남영신을 해인사 사고에 보내서 삼례도 두우 통전(三禮圖杜祐通典)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그 책이 도착한 후 백문보는 통전에 모방하고 또한 침원(寢園)의 늙은 급사 박충의 말을 참작하여 의제(儀制)를 작성하였다. 박충은 글을 몰라서 그 말이 흔히 억측에서 나왔다. 신우가 대군(大君)으로 되며 공부를 하게 되니 왕은 백문보 및 전녹생 정추(白文寶, 田祿生, 鄭樞) 등을 스승으로 삼았다. 백문보는 그 후에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고 직상군으로 봉하였다. 23년에 죽었는데 충간이란 시호를 주었다. 그의 성격은 염결 정직하고 이단을 믿지 않고 글을 잘 지었다. 아들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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