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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인물

임연,임유무(고려사 열전) 2003-08-06

작성자빈구름|작성시간13.01.28|조회수562 목록 댓글 0

임연  〔임유무(林惟茂)의 기사 첨부〕


  임연의 초명은 임승주(承柱)이며 그의 부친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일시 진주(鎭州)에 거주하면서 고을 아전의 딸을 얻어서 임연을 낳았다. 그래서 결국 진주를 관향으로 삼았는데 임연의 눈은 벌의 눈(蜂目)이요 목청은 승냥이 소리를 내었는데 몸이 민첩하고 힘이 있어서 거꾸로 서서 팔로 짚고 다니기도 하였으며 이엉을 지붕 위로 던져 올리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대장군 송언상(宋彦祥)의 말 부리는 군사로 일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때 마침 몽고병이 쳐들어 왔으므로 고향 사람들과 함께 적을 구축하고 드디어 대정(隊政)이 되었다.
  임효후(林孝侯)란 자가 임연의 처와 간통한 것을 임연이 알고 임효후의 처를 유인해서 간통하였더니 임효후가 해당 기관에 고소하였으므로 그 기관에서 임연을 처벌하고자 했는데 김준이 그 위인을 장하게 여기고 극력 구원해서 죄를 면하게 하였으며 또 추천해서 당장 벼슬을 시켰으므로 김준을 아비로 김충을 숙부로 여겼다.
  임연은 김준과 함께 최의를 죽이고 위사 공신(衛社功臣) 칭호를 받았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추밀원 부사까지 올라갔는데 김준이 국권을 장악하고 상벌을 제 마음대로 하게 되자 원종(元宗)이 그를 꺼리게 되고 임연도 김준과 사이가 나빠져서 김경(金鏡), 최은 등과 함께 그를 죽였다. 그리고 나서는 김경과 최은의 세력이 자기를 점차 압도하는 것을 꺼려서 야별초를 보내서 김경과 최은, 그리고 최은의 아우 최기(崔琪)를 죽여서 저자에 효수했다.
  어사대부 장계렬(張季烈)은 기마와 격구를 잘하고 천성이 담박하여 예절을 아는 사람이어서 왕의 신임을 받아 친하게 내전에 무상 출입하고 있었으며 대장군 기온(奇蘊)은 임금의 서매부로서 기밀을 맡아 보았고 김준의 가재를 적몰할 때 진기한 보물을 김경과 최은에게 뇌물로 주었으므로 임연이 미워하여 그 두 사람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삼별초(三別抄)와 6번 도방(六番都房)을 구정(毬庭)에 집결시켜 놓고 재상들과 의논하여 말하기를
  “내가 왕실을 위해서 권신을 제거했는데도 왕은 김경 등과 함께 나를 죽이려 하니 내가 어찌 손 놓고 앉아서 살륙당하겠는가? 그래서 내가 왕을 죽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섬으로 추방하려는데 어찌 했으면 좋겠는가?”라고 하니 재추 중에서 감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임연은 개별적으로 돌아가면서 물으니 시중 이장용(李藏用)은 손위(遜位)를 주장했고 참지정사 유천우(兪千遇)는 그것을 극력 반대해서 결정을 짓지 못하고 파하였다. 이튿날 밤에 임연은 전 장군 권수균(權守鈞), 대경(大卿) 이서(李敍), 장군 김신우(金信祐),를 잡아 가두고
  “권수균은 미천한 출신으로 외람되게 벼슬을 받았으며 이서는 그 처의 전 남편의 딸을 간음했고 김신우는 아비의 첩을 간통하였다”고 각각 수죄한 다음 모두 다 죽임으로써 뭇사람을 공갈하였다.
  임연은 갑옷을 입고 삼별초와 6번 도방을 영솔하고 안경공(安慶公) 왕창의 집으로 가서 문무백관을 모아 놓고 왕창을 추대하는 만세를 부른 다음 대궐로 들어가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종실들과 백관이 새 임금의 즉위를 축하하는데 난데없는 폭풍우가 일어나서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아갔다. 조하(朝賀)가 끝나자 임연은 문득 대돌 아래로 내려가서 이장용에게 절을 하였는데 아마도 손위(遜位)의 제의가 마음에 기뻤던 것이다.
  그때 임금은 진암궁(辰巖宮)에 있었는데 임연이 좌 부 성선 이창경(李昌慶)을 시켜 내쫓으니 시종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왕은 비를 맞으며 도보로 나갔으므로 이창경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바치고 또 자기 하인 5명을 시켜 왕과 왕비를 시종케 하였다. 별궁으로 옮겨 두었다가 얼마 안 가서 또 김애의 옛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왕실 창고(內帑)에서 진귀한 보물을 도적해 내었다.
  당초에 임연이 왕의 폐립을 음모할 때 사공(司空) 이응렬(李應烈)이 말하기를
  “고려 왕실의 자손이 한두 사람이 아닌데 하필 지금 임금만이겠는가!”라고 했는지라 이 번 일에 이응렬이 제일 기뻐 날뛰었고 그 기쁨이 얼굴에 나타났다. 이응렬은 임연의 아들 임유무의 장인이었다.
  창은 임연을 교정 별감으로 삼았다.
  임연은 김준의 옛집으로 이사했는데 왕창이 6번 도방(都房)을 보내서 임연의 집을 호위하게 했다.
  그때 세자가 연경으로부터 귀국하는 도중에 파사부에 도착하였을 때 정주(靜州) 관노(官奴) 정오부(丁吾孚)가 가만히 압록강을 건너서 사변을 고하고 말하기를
  “임연이 이미 임금을 바꾸고 동궁(東宮)께서 반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입국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야별초 20명을 국경선에 매복해 두고 기다리고 있으니 청컨대 입국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세자는 의심을 품고 주저하고 있으니 대장군 정자여(鄭字與) 등은 말하기를
  “그놈이 감히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근거 없는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나 나유(羅裕)는 말을 달려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이 일은 그럴지도 모르겠으니 사변의 유무를 보고 입국해도 늦지 않은즉 역적의 꼬임수에 속지 말아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으며 무덕 장군(武德將軍) 김부윤(金富允)도 이와 같은 의견을 말하였다. 제교(諸校) 정인경(鄭仁卿)은 인주 수령 정보(鄭保)의 아들인데 은밀히 압록강을 건너 자기 부친에게 가서 상세히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또 그때 정오부도 말하기를
  “고주사(告奏使) 곽여필(郭汝弼)이 지금 영주(靈州)에 있으니 보내는 사람에게 일러서 보게 하시오”라고 하였으므로 세자(世子)는 동행하던 몽고 사신 7명을 보내서 영주에서 곽여필을 잡고 또 의주 방호(義州防護) 통역 정비(鄭庇)를 잡아서 심문하여 그 사실을 알고 나서 통곡하면서 몽고로 되돌아가고자 하니 수행하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다 망설이며 따라가고자 하지 않았으나 정인경이 홀로 극력 권고해서 가게 되었다.
  한편 임연은 제 마음대로 임금을 폐립하고서도 누가 감히 시비하랴! 하는 생각으로 있다가 세자가 몽고로 되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주야로 근심을 했다.
  이때에 장군 유원적(愈元績)이 낭장 정수경(鄭守卿)과 더불어 임연을 죽이고 왕을 복위(復位)시키고자 장군 윤수(尹秀)에게 이야기했더니 윤수는 거짓으로 승낙하는 체하고 즉시 임연에게 밀고하였으므로 임연이 그들을 체포하여 국문한즉 정수경은 불복하였으나 유원적이 복죄하였으므로 드디어 그들을 죽이고 가산을 몰수했다.
  몽고에서 사시을 파견하여 왕을 폐립(廢立)한 데 대하여 추궁하니 임연은 왕이 병으로 손위(遜位)했다고 속였으나 몽고에서 또다시 병부시랑 흑적(黑的)을 파견하여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왕과 창 임연을 호출하여 심문케 하니 임연은 무서워서 자기 집 재추들을 모아 놓고 조서에 회답할 일을 토의하였다. 임연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나라를 바로잡아 놓고 그런 후에 황제한테로 가려 했더니 지금 호출과 추궁이 이다지 급하니 장차 어찌 하면 좋을까?”라고 말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흑적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어 주고 많은 보물을 줬으며 3∼4품 이상의 고관들에게 무기명으로 조서에 답신할 방안을 각기 밀봉해서 제출케 했다. 또 흑적을 제 집으로 초청해서 다시 연회를 베풀었는데 흑적이 왕을 복위하게 하라고 하였으므로 임연은 부득이 재추들의 회의를 열고 왕창을 폐위하고 임금을 복위시켰다.
  동지 추밀(同知樞密) 조오는 평소에 공손해서 여러 사람들의 인심을 얻고 있었는데 임연이 왕을 폐립할 때는 조오가 병으로 참여치 않았는바 그 후 임연이 국권을 잡고 독판을 치게 되자 조정 내외의 인망이 조오에게로 모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장군 김문비(金文庇)가 임연을 죽이고자 조오의 아들인 장군 조윤번과 이미 약속을 정한 후 그를 시켜 조오에게 고하게 하였더니 조오가 응낙하지 않았으므로 김문비는 벌써 일이 성취할 수 없음을 알고 도리어 임연에게 밀고하였으므로 임연은 조오를 흑산도로 귀양 보내고 조윤번과 조오의 사위 비서랑(秘書郞) 장호(張顥) 등 7명을 죽이고 가산을 몰수하였으며 조오의 아들 조윤온(趙允溫)도 귀양 보냈다. 조오의 역량은 임연을 제거할 만했는 데도 조오가 비겁해서 화를 재촉하게 된 것을 사람들이 가석히 여겼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자은사(慈恩寺)에서 재를 올리느라고 깃발을 꽂은 것을 보고 임연의 아들 임유간(林惟幹)에게 고하기를 난이 일어나서 관군이 깃발을 벌써 세웠더라고 하였으므로 임유간은 임연에게로 달려가서 고하여 온 집안이 놀랐다.
  왕이 몽고로 가게 되었을 때 임연은 왕이 폐립에 대한 진상을 누설할까 두려워서 임유간과 그의 심복을 시켜서 호종케 했다. 왕이 몽고 서울에 도착하자 임유간은 강화상(康和尙)을 통해서 폐립 문제를 미봉해서 보고하였으나 황제는 말하기를
  “세자와 이장용이 이미 상세히 진술한 바 있어서 내가 자세히 알고 있다. 네 아비가 제 마음대로 왕을 폐위시켰다는 것이 사실이냐?”라고 하였으므로 임유간은 말하기를
  “그것은 이장용의 소위이니 물어 보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물으니 이장용과 신사전(申思佺) 원부(元傅)가 각기 사실대로 대답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으며 임유간이 다시 말을 하려 하자 황제는 가로막고 말하기를
  “네가 하는 말은 모두 다 거짓말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그의 목을 매서 가두고 중서성에 명령을 내려서 임연에게 공문을 보내 이르기를
  “지금 네 아들이 보고하러 이곳에 왔고 다른 신하들도 또한 보고하러 왔는데 나의 생각에 자상치 못한 바가 있으니 너는 이런 때에 마땅히 속이 입조해서 시비곡직을 밝혀라!”라고 하였다. 임연은 이 명령을 거역하고자 야별초를 각 도(道)로 파송해서 백성들을 섬으로 들어가도록 독려했다. 이럭저럭 임연은 근심과 울분이 북받쳐서 등창(背疽)이 나서 그만 죽었다. 그때 하늘이 10여 일을 두고 흐렸더니 임연이 죽자 맑게 개였다.
  당시 순안후(順安侯) 종(琮)이 감국(監國)하고 있었는데 임유무(林惟茂)가 청하여 참지정사 벼슬을 추증하고 장렬(壯烈)이란 시호를 주었으며 임유무를 교정 별감(校定別監)으로 임명했다.
  임유무는 도방(都房) 6번들을 소집해서 스스로 제 집을 호위하게 하고 임유인에게 서방(書房) 3번을 영솔하여 임유간의 집을 호위하면서 호응케 하였다.
  임유무는 동요(童謠)와 도참(圖讖) 비결 등이 많이 떠도는 것을 꺼리어 명령을 공포하여 이르기를
  “동요나 도참을 운운하는 자를 잡아 낸 자에게는 벼슬과 상금을 주겠다”고 했다.
  임유무가 일관(日官) 오윤부(伍允孚) 등을 불러서 진국(鎭國)의 방책을 문의한즉 오윤부는 말하기를
  “병이 위중한 후에 의약을 구하면 어찌 하는가!”라고 하였다.
  몽고 황제는 두연가(頭輦哥), 조평장(趙平章) 등을 시켜 왕을 호송해서 본국으로 돌려 보내니 왕이 먼저 정자여(鄭子與)를 본국으로 파견하여 국내외 여러 신하들에게 도읍을 옛서울로 옮겨 나오라고 유고하였다.
  이때 임유무는 왕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심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뭇사람이 반대할까 두려워서 치사(致仕)한 재상들과 3품 이상의 현직 대관들, 4품 이하의 관리며 대성(臺省) 관리들에게 매 개인이 밀봉한 서면으로 가부(可否)를 표시케 했더니 모두 다
  “임금의 명령이니 감히 복종치 않겠느냐?”라고 하였으므로 임유무는 분노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각 도에 수로 방호사(水路防護使)와 산성별감(山城別監)을 파견해서 백성을 모아서 입보(入保)케 함으로써 왕명을 거부해 나서고 또 한편으로 김문비(金文庇)를 시켜 야별초를 영솔하고 교동(喬洞)을 수비함으로써 몽고군을 방어케 하였다.
  임유무가 파견한 야별초가 경상도로 가서 주민들을 독촉하여 섬(島)으로 입보케 하니 안찰사 최간(崔澗)이 동경 부유수(東京副留守) 주열(朱悅), 판관 엄수안(嚴守安)과 합의하고 그 야별초들을 금주(金州)에 잡아 가두어 두고 왕이 귀국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왕이 국경으로 들어오니 지름길로 행재(行在)를 찾아갔으며 전라도 안찰사 권탄(權坦) 충청도 안찰사 최유엄도 왕이 전달하는 황제의 지시를 받고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곧 주군(州郡)들에 훈시하였고 서해도 안찰사 변량(邊亮)은 왕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행재(行在)로 달려갔다. 임유무가 그 소식을 듣고 사람을 파견하여 좇아갔으나 따라 잡지 못하였다.
  임유무는 나이가 아직 어렸으므로 아비에게서 정권을 물려받았으나 처리할 줄을 몰라서 매사가 이응렬과 추밀원 부사로 치사한 송군비(宋君斐) 등에 의하여 처결되었다.
  매부(妹夫)인 어사 중승 홍문계(洪文系)와 직문하성 송송례(宋松禮)는 외면으로는 비록 순종하고 있었으나 내심으로는 항상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임유무가 장차 명령을 거역하여 나서려 하자 국내의 인심이 흉흉하여 졌으므로 홍문계가 송송례와 모의하였다. 송송례의 아들 송담(宋琰) 송분은 모두 위사장(衛社長)이었다. 송송례와 홍문계가 삼별초를 소집하여 대의(大義)로써 타이르고 임유무를 체포할 것을 토의하였던바 임유무는 사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정을 소집하여 습격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삼별초들은 그 집 동편 문을 파괴하고 돌입하여서 활을 난사하여 임유무의 무리들을 괴주시키고 임유무와 그의 매부 대장군 최종소(崔種紹)를 사로잡아서 섬(島)으로 귀양 보내려다가 몽고 사신이 사관에 있는지라 다른 사변이 파생할까 우려해서 모두 저자에서 목 베어 죽였다. 이응렬과 송군비 및 족부(族父) 송방우(宋邦又), 이성로(李成老), 외제(外弟) 이황수(李黃綏) 등을 귀양 보냈다. 그리고 이어 서방(書房) 3번과 조성색(造成色)을 해산했더니 온 나라가 기뻐하며 모두들 “이제는 살아났다”라고 하였다.
  이응렬은 머리를 깎고 도망갔으나 추격 체포하여 구정(毬庭)까지 끌고 오니 소년들이 수죄를 하면서 덤벼들어 주먹질하였다. 그리고 임유인은 제 손으로 목을 찔렀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을 몽고 사신이 보고 목을 눌러 죽였다.
  임유무의 모(母) 이씨는 천성이 질투가 많고 험악하였는바 임유무의 왕명의 거역, 인명의 살육 등이 대개 그가 사촉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전패하자 화려하게 차리고 진기한 보물을 가슴에 품고 도망하려는데 문 밖에서 조오의 처자들이 노리고 있다가 붙잡아서 머리를 끌고 뺨을 때렸으며 그 마을의 숙감을 품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의 의복을 찢고 벗겼다. 그러니까 구경군이 둘러싸서 숨을 곳도 찾지 못하고 미나리밭으로 들어가는 것을 어린아이들이 몰려 와서 기왓장을 던졌다. 그 후 그의 아들 임유간(林惟幹), 임유거(林惟拒), 임유제(林惟提)들과 함께 체포되어 몽고로 압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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