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
신돈은 영산(靈山) 사람이요, 그의 모친은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 여종이다.
신돈은 어려서 중이 되었다. 이름은 신변조(遍照)요, 자는 요공(耀空)이다. 신돈은 그 어미가 천하여서 중들 사이에서도 한축에 들지 못하고 항상 산방(山房)에 거처하고 있었다.
공민왕이 하루는 웬 사람이 칼로 자기를 찌르는 것을 어떤 중 하나가 곁에 있다가 구원해 주어서 화를 면한 꿈을 꾸었다. 이튿날 태후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김원명(金元命)이 신돈을 데리고 왕에게 현신했는데 그 모습이 꿈에 본 중과 흡사해서 왕은 크게 이상히 생각하고 데리고 이야기해 본즉 대단히 총명하고 지혜스러웠다. 매사를 명백하게 논증했고 제 말로 도통(道通)했다고 하면서 고담준론으로 궤변을 토하여 왕의 마음에 꼭 들었다.
공민왕은 본래 불교를 신앙한 데다가 또 꿈도 약시한지라 이때부터 누차 비밀리에 내전으로 불러들여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신돈은 문맹이었으나 항상 서울 안으로 돌아다니며 불교를 권하면서 과부들을 허황한 말로 꼬아 넘겨 간음하였다. 그리고 왕을 만나 본 후는 몸차림을 되도록 초라하게 꾸미어 아무리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라도 항상 해진 납의(衲衣) 한 벌로 지냈으므로 왕은 더욱 존중히 여겨서 신돈에게 주는 의복이나 음식은 반드시 정결히 만들게 하고 심지어 버선까지도 반드시 머리 위까지 받들어 올려 존경을 표시하곤 했다. 이승경(李承慶)이 이 광경을 보고 말하기를
“나라를 어지럽힐 놈은 이 중놈일 것이다”라고 했으며 정세운(鄭世雲)도 요승(妖僧)으로 인정하고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왕이 비밀리에 피신시켰다.
이승경과 정세운이 죽은 다음에 신돈은 머리를 기르고 유랑 걸식하는 두타(頭陀)가 되어 다시 왕을 찾아 보았다. 이때부터 신돈은 궁중에 들어와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왕이 청한거사(淸閑居士)란 호를 지어 주고 사부(師傅)라고 불렀으며 국정에 대하여 자문했는데 왕은 그의 말이면 듣지 않은 바가 없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게 아부하였다. 사대부의 처들도 신승(神僧)으로 알고 복을 구하려고 그의 설교를 들으려 오면 신돈은 서슴지 않고 간통하였다.
14년에 신돈은 밀직 김란(金蘭)의 집에 기숙하고 있었는데 김란은 매사에 세심하고 출세할 욕심이 강하였으며 남을 칭찬하거나 헐뜯기를 좋아하였다. 그가 신돈에게 처녀 두 명을 주었으므로 최영은 김란을 책망하였다. 그러자 신돈은 최영을 참소하여 계림윤으로 강직시켰다. 또 찬성사 이인복(李仁復), 밀직 조희고(趙希古), 홍사범(洪師範), 최맹손(崔孟孫) 등을 파면하고 자기과 친근한 김란, 김보(金普), 이춘부(李春富), 임군보(任君輔), 박희(朴曦)를 그 후임으로 끌어들였다. 또 찬성사 이구수(李龜壽), 평리 양백익(梁伯益), 판 밀직 박춘(朴椿), 예성군(芮城君), 석문성(石文成), 환자인 부원군 이녕(李寧), 김수만(金壽萬) 등을 참소하여 귀양 보냈다. 그리고 신돈은 그의 도당 상호군 이득림(李得霖), 순군 경력(巡軍經歷) 오계남(吳季南) 등을 보내 최영과 이구수 등이 김수만과 결탁하여 군신을 이간했으며, 어질고 선량한 인재를 배척하였고, 왕에게는 크게 불충하였고, 허무한 것을 날조하여 옥사(獄事)를 조작하였다고 그들을 국문하였다. 최영 등은 모두 다 허위 복죄하고 속히 처결해 줄 것만 희망했다. 그래서 드디어 최영 등의 3품 이상의 작위를 삭탈하고 김수만은 제명하여 서민으로 만들었으며 그들의 전민(田民)을 몰수했다.
또 양천군(陽川君) 허유(許猷), 전공 판서(典工判書) 변광수(邊光秀), 판사 홍인계(洪仁桂), 허유의 아들 전리 판서 허서(許瑞), 첨의평리 김귀(金貴), 상호군 양제(梁濟), 대호군 이인수(李仁壽), 호군 홍승로(洪承老) 등을 귀양 보냈다. 이렇듯 자기를 비방하는 사람이면 반드시 중상하여 제거해 버리니 그 세력이 황황히 타오르는 불길 같아서 대신 이하가 모두 무서워하였다.
신돈은 그 후 이구수, 김귀, 박춘 등의 머리를 깎아 버리게 하고 절(山寺)에 가두어 두었다가 백현(白絢)과 이원구(李元具)를 보내서 곤장 치게 하였으며 다시 왕안덕(王安德), 배인길(裴仁吉)을 파견하여 그들을 바다에 던져 죽였다.
신돈은 전선(銓選)을 하면서 자칭 현명하고 쓸모 있는 인재를 등용한다고 하였으나 제목(除目)이 발표되고 보니 등용된 자는 모두 평소에 그의 마음에 든 사람들이었다.
왕은 신돈을 진평후(眞平侯)로 봉한 후부터 더욱 그를 존중히 여겨 곧 수정 이순 논도 섭리 보세 공신 벽상삼한 이중대광 영도첨의사사사 판중방 감찰사사 취성 부원군 제조 승록사사 겸 판 서운관사(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壁上三韓二重大匡領都僉議使司事判重房監察司事鷲城府院君提調僧錄司事兼判書雲觀事)의 공신 칭호와 관직을 주었으며 이때 돈(旽)으로 개명하였다. 돌이켜보건대 공민왕이 오랫동안 왕위에 있는 사이에 일찍이 많은 재상들에 대하여 만족을 느끼지 못하였다. 세신 대족(世臣大族)은 친당(親黨)의 뿌리가 얽혀 서로 엄폐하고 있으며 초야 신진(草野新進)은 자기의 행동을 가식하여 명망을 얻어서 귀하게 되면 자기 가문이 한미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대족(大族)과 혼사하여 초기의 오점을 모두 버리었으며 유생(儒生)들은 과단성이 적고 기백이 없으며 게다가 문생(門生)이다, 좌주(座主)다, 동년(同年)이다 하면서 서로 당파가 되어 사정에 끌리니 이상 세 부류는 모두 쓸 수 없다고 공민왕은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을 초월하여 독립 독행할 사람을 얻어서 크게 등용함으로써 과거의 폐단을 혁신하여 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신돈을 보게 되자 그가 득도(得道)하여서 욕심이 없으며 미천하여서 친척도 없으니 대사로 위임하면 반드시 정실에 구애됨이 없이 일을 마음먹은 뜻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하고 드디어 일 개 무명 승려인 그를 탁발하여 국정을 위임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왕이 신돈에게 속세에 내려앉아 구세(救世)하라고 청하니 신돈은 짐짓 거절함으로써 왕의 결심을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왕이 굳이 청하니 그제야 신돈이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왕과 대신들이 참소와 이간을 잘 듣는다는 데, 그러지 말아야 세상에 복리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친필로 서약서를 써서 이르기를
“스승은 나를 구원하고 나는 스승을 구원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말을 듣고 의혹을 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과 하느님이 증명하실 것이다”라고 하니 그제야 왕과 함께 나라 정사를 의논하였다.
정권을 잡은 지 30일 내외에 왕에게 참소하여 대신들을 중상하고 드디어 영 도첨의 이공수(李公遂), 시중 경천흥(慶千興), 판삼사사 이수산(李壽山), 찬성사(贊成事) 송경(宋卿), 밀직 한공의(韓公義), 정당(政堂) 원송수(元松壽), 동지밀직 왕중귀(王重貴) 등을 파면 축출했으며 총재와 대간(臺諫)들이 모두 그의 말에 의하여 결정되었고 영 도첨의는 오랜 기간 그 자리를 비워 두었다가 이때 자기가 그 벼슬을 겸하였다.
이렇게 하여 놓고 비로소 궁중에서 나와서 기현(奇顯)의 집에 기숙했는데 백관들은 그 집으로 가서 일을 의논하였다.
신돈은 진사(辰巳)년에 성인(聖人)이 나온다는 예언을 인용하여 성인이란 아마도 나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닌가! 라고 공공연하게 말하였다.
신돈은 김원명으로 응양군 상호군을 겸하고 8위(衛) 42도부병(都府兵)을 장악하게 했다. 김원명과 김란은 모두 신돈으로 하여 크게 등용되었다.
그전에 기현의 후처가 과부로 있을 때 중(僧) 신돈이 간통했다. 그 후 기현에게 시집 가서도 신돈이 귀히 되어서 기현의 집에 주인 잡고 있으면서 또 간음했으며 기현의 처에게 주부(主婦) 노릇을 시켰다.
신돈은 날이 갈수록 탐욕스럽고 음탕하여져서 뇌물을 문이 미어지게 받아들였으며 집에 있을 때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마음대로 성색(聲色)을 향락하다가도 왕의 앞에서는 청담(淸談)을 하고 음식도 채소, 과실, 차만 들었다. 하루는 밀직제학 이달충(李達衷)이 여러 사람들이 모인 좌석에서 신돈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의 말이 당신이 술과 색이 과도하다고 하오”라고 하였더니 신돈이 불쾌히 여기고 그를 파면시켰다.
15년 4월 8일에 신돈의 집에서 대연등회(大燃燈會) 행사를 했더니 서울 사람들이 모두 본을 따라 가난한 집들은 구걸을 하여서라도 등을 켰다.
간관 정추(鄭樞)와 이존오(李存吾)가 상소하여 신돈의 죄악에 대하여 격렬하게 논했으므로 모두 강직당하였다. 상소문의 전문은 이존오 전기에 기재되어 있다.
이때부터 신돈의 흉악 무도함이 우심해졌으며 재상과 대간들이 모두 다 신돈에게 아부하여서 충직한 말로 건의하는 길이 아주 막히고 말았다.
왕이 후계자가 없었으므로 왕비를 구하려고 덕풍군(德豊君) 왕의(王義), 산기(散騎) 안극인(安克仁), 정랑(正郞), 정우(正寓), 판관 정양생(鄭良生)의 딸들을 내정에 데려다가 왕이 친히 간선하였는데 이때 신돈은 왕과 호상(胡床)에 나란히 앉아서 보았다.
신돈은 이미 계획적으로 원훈, 구신들을 남김 없이 추방하여 버렸으나 첨의평리 목인길(睦仁吉)은 비록 왕이 즉위하기 전부터 시종하는 구신(舊臣)이지만 무인이라 글을 몰랐으므로 개의치 않았다. 그러다가 점차 자기의 흉악한 행위와 사기한 짓이 더욱 폭로되자 목인길이 왕에게 고할까 염려되어 어떤 일을 구실로 참소했는데 임군보(任君輔)가 왕에게 간하기를
“목인길은 오랜 사람인즉 사소한 과실이 있다 해서 내보내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더니 신돈이 그것을 함원하였으며 또 정추가 내쫓길 때에도 임군보가 적극 구조해 주었으므로 더욱 미워해서 드디어 왕에게 참소하여 임군보와 목인길을 한날에 추방했다.
신돈은 황상(黃裳) 이수산(李壽山), 한방신(韓方信), 안우상(安遇祥), 이금강(李金剛), 지용수(池龍壽), 양백연(楊伯淵), 김달상(金達祥), 이운목(李云牧), 장필례(張必禮), 이선(李善) 등으로 금위 제조관(禁衛提調官)을 삼았다.
이렇게 되니 모든 부문의 권력이 신돈에게 집중되었다.
신돈이 재추(宰樞)들과 함께 광주 천왕사(廣州天王寺)의 사리(舍利)를 왕륜사로 맞아 왔을 때 왕이 백관을 영솔하고 구경갔는데 백관들은 의관을 정제하고 뜰에 서 있었으나 신돈은 반비의(半臂衣)를 입고 손에는 부채를 들고 왕과 자리를 나란히 놓고 앉아 있다가 소매에서 연화문(緣化文)을 꺼내서 들고 선 채로 왕에게 주면서 서명하라고 하니 왕은 이것을 받아 들고 더욱 공손하게 서명하였다. 며칠 후에 신돈이 승도(僧徒)를 데리고 사리를 돌려 보내는데 찬성 이인임은 도보로 신돈을 따라서 천수사까지 가서 배송하였다.
그 후 양부에서 정릉(正陵)에 제사하는데 신돈은 배례치 않고 공주의 신좌(神座)와 마주 앉아서 식사를 올렸으며(侑食) 또 왕이 각처의 왕릉에 배알할 때 백관들은 모두 다 왕을 따라 배례하였는데 신돈은 홀로 뻣뻣이 서서 배례치 않았다.
왕이 어느 날 가설루(假設樓)에 나앉아서 격구(擊球)와 잡희(雜戱)를 구경하였는데 도당(都堂)의 장막은 가설루(樓)의 동편에 있었다. 신돈이 말을 타고 도당의 장막 앞에 도착하니 여러 재상들이 모두 기립하였다. 신돈은 말 탄 채 담화하면서 왕이 있는 누 아래에 와서야 하마(下馬)하여 왕과 함께 누상에 앉았으며 시중 유탁(柳濯)이 식찬상을 드리니 신돈은 앉아서 상을 받았다. 그리고 신돈의 의복과 장식도 왕과 꼭 같았으므로 보는 사람이 구별할 수 없었다.
또 왕이 고라리(高羅里)로 격구를 보러 갔을 때 신돈이 왕이 있는 장막 앞에서 말을 타니 시중 이하가 기립하였으나 신돈은 그들의 앞을 말을 탄 채로 태연자약하게 지나갔다.
또 시중 윤환(尹桓)과 함께 임금을 모시고 연회를 하였는데 윤환이 술을 권하니 신돈은 마시다 남은 술을 윤환에게 주었으며 윤환은 그것을 마시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왕이 하루는 보행(步行)으로 신돈의 집에 갔는데 신돈은 임금과 나란히 걸터앉아 마치 동료와 같이 허물이 없었고 도무지 임금과 신하와의 예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신돈이 매양 출입한 때면 말 탄 추종이 백여 명씩 따라다녔고 그 위의가 임금의 승여(乘輿)와 비슷하였다.
신돈은 왕에게 전민 변정 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할 것을 청원하고 스스로 판사(判事)가 되어 각처에 유고문(諭告文)을 붙여 이르기를
“근래에 기강(紀綱)이 몽땅 파괴되어 탐오가 떳떳한 관습이 되어 종묘, 학교, 창고, 사사(寺社),녹전군(祿轉軍) 등의 공수전(公須田)과 국내 사람들의 세업(世業) 전민(田民)은 거의 다 호부하고 세력이 있는 집들이 강탈 점령하였다. 그들은 반환할 데 대한 판결을 받고도 초지를 의연히 가지고 있거나 양민을 예속된 노예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각 주, 현(州縣)의 역리(驛吏), 관노(官奴), 백성들로서 자기 역(役)을 도피한 자를 모조리 은닉하여 크게 농장(農莊)을 차림으로써 백성에게는 해독을 끼치고 나라를 궁핍하게 만들고 있는바 이것이 하늘에 감응하여 부단히 수재, 한재 역질이 계속되고 있다.
이제 도감을 설치하고 그 시정 사업을 담당케 하였으니 서울에서는 15일 이내로, 지방에서는 40일 이내로 자기 잘못을 알고 스스로 시정하는 자는 과거를 묻지 않는다. 그러나 기한이 경과한 후에 일이 발각된 자는 처벌할 것이며 무고한 자는 그 벌을 도로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영이 발포되니 세도 있는 많은 집들이 강점했던 전민(全民)을 그 주인에게 반환하였으므로 일국이 모두 기뻐했다.
신돈은 하루 건너 도감으로 갔으며 이인임, 이춘부를 위시한 사람들이 신소를 받고 판결을 내렸다.
신돈은 외면으로 공도대의(公道大義)를 표방하면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려고 천민 노예로서 양민이라고 호소하는 자는 모두 다 양민으로 만들어 주었으므로 노예로서 주인을 배반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성인(聖人)이 나왔다”라고들 하였다.
신돈은 소송하는 여자들 중에서 얼굴이 아름다운 자는 겉으로 동정하는 척하면서 제 집으로 유인해다가 간음하고 그 송사는 반드시 이기게 하였으므로 부녀들의 청탁이 많아졌고 선비(士人)들은 모두 이를 갈았다.
판사 장해(張海)의 집 종으로서 낭장 벼슬을 한 자가 있었는데 길에서 장해를 만나자 읍(揖)만 하고 말에서 내리지 않았으므로 장해가 노하여 채찍으로 때렸더니 그 종이 신돈에게 호소하였기에 신돈은 장해와 그의 딸을 순군에 가두었다. 그가 군소(群小)들의 인심을 사서 간특한 기도를 성취시키려는 품이 이러하였다.
백관들이 어느 날 신돈의 집에 회합하여 거마(車馬)가 거리를 메웠는데 궁문 앞은 쓸쓸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겼던바 이날 큰 지진이 일어났다.
이때 공경(公卿)과 구신(舊臣)들이 모두 다 추방당해서 신돈이 꺼리는 사람은 오직 태후뿐이었으므로 백방으로 참소하여 이간질했다.
왕위를 이을 자식이 없음을 근심하여 그것이 왕의 언사와 안색에 나타나고 때로는 눈물까지 흘렸다. 이때 신돈이 왕에게 그럴 듯이 말하기를
“문수회(文殊會)를 하면 군신이 화합되고 부처님들이 환희해서 반드시 원자(元子)가 탄생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왕이 신돈의 말대로 궁중에서 7일간이나 문수회를 차리고 마음이 흐뭇하여 아들 얻을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문수회 하루 전날에 정결한 집을 따로 세워서 갈대로 지붕을 이어 도량(道場)을 만들고 소라를 불고 북을 치니 마치 군진(軍陣)에서 고각(鼓角)을 울리는 것처럼 그 소리가 성중을 진동해서 서울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처음에는 궁중에 변이나 생긴 것으로 알고 놀랐다가 장시간 지나서야 안정되었다. 문수회를 끝마치고 신돈이 궁중에서 나오는데 중을 비롯한 각색 잡인들이 궁문이 메워지게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후에도 여러 군(君)들, 재상들, 각 부서들에서 차례 차례로 매일 재(齋)를 올리게 했으므로 그 비용이 한정 없었다.
왕이 신돈의 원찰(願刹)인 낙산사(洛山寺)로 갔을 때 좌우 시종들이 앞을 다투어 “금년은 농사가 대풍작입니다”라고 하니 왕은 부처 앞에 꿇어앉아서
“박덕한 내가 15년간 국왕으로 있는 사이에 홍수와 가물의 재화가 있었는데 금년의 대풍작은 실로 첨의(僉議)가 음양(陰陽)을 잘 섭리(燮理)한 덕이다”라고 하였다. 왕은 신돈을 존경해서 항상 ‘첨의’라고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왕이 태후를 위하여 축수하는 연회 자리에 익비(益妃), 정비(定妃)가 있었는데도 신돈도 참여했다.
하루는 유탁이 임금을 위해서 연회를 배설했는데 두 비(妃)가 동편에 앉고 신돈은 서편에 앉았다. 이때 신돈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두분 왕비가 연소해서 어리광이 심하겠군요?”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지는 않다”라고 하였으며 신돈은 또 희롱하여 말하기를
“성체(聖體)가 피로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니 왕은
“피로할 수도 있지!”라고 하였다.
밀직 허강(許綱)의 처 김씨(金氏)는 상락군(上洛君) 김영후(金永煦)의 손녀인데 허강이 죽으니 신돈이 문벌을 탐내어 그 과부에게 장가 들고자 했다. 김씨가 이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평생에 남의 여자라고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어찌 차마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정히 나를 욕보이려고 한다면 나는 자결하고 말겠다”라고 하고 드디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신돈이 이 말을 듣고 단념하였다.
16년에 원나라에서 신돈에게 영록대부 집현전 대학사(榮祿大夫集賢殿大學士) 벼슬을 주고 옷과 술을 보내 왔다. 신돈은 물품을 곁에 받아 놓고 말하기를
“이런 물건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나? 단지 그 사람들이 보내 준 것이니 내다 버릴 수도 없다”라고 하였다.
왕은 신돈의 말에 현혹해서 아들을 얻어 보려고 재차 문수회를 연복사(演福寺) 불전(佛殿)에서 크게 배설하였다. 이때 채단과 비단으로 수미산(須彌山)을 만들고 산 주위에 큰 촛불을 켰으며 또 불전(佛殿) 주위에도 촛불을 켰는데 그 초의 크기가 기둥만 하고 높이는 길이 넘었으며 촉대(燭台)는 사자나, 코끼리 형태로 되어 있었고 밤이 대낮처럼 밝았다. 그리고 온갖 진수 성찬을 다섯 줄로 차려 놓았으며 비단으로 만든 꽃들과 오색 봉황은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폐백으로 채단 열여섯 묶음을 썼다. 또 금과 은으로 가산(假山)을 만들어 뜰에다 진열했고 깃발이며 우보, 차개(車蓋-수레와 양산)는 햇빛에 5색으로 더욱 반짝였다. 선발한 중 3백 명이 수미산을 안고 들면서 불공하였는데 염불소리가 하늘을 진동했으며 자진하여 나와서 불공에 참가한 자는 무려 8천 명에 달했다.
왕과 신돈은 수미산 동편에 자리잡고 양부 대관을 데리고 앉아서 부처에게 예배했다. 이때 신돈이 왕에게 말하기를
“선남선녀(善男善女)가 상감을 따라 문수보살과의 좋은 인연을 맺고자 발원하고 있으니 청컨대 여러 부녀들에게 불전으로 올라와서 불법을 듣도록 허가하여 주십시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대부의 부녀들이 몰려 올라갔으며 심지어 신돈을 위하여 화장까지 하는 과부가 있었다. 신돈이 떡과 실과를 부녀자들 앞에 뿌려 주니 모두들 기뻐하며 말하기를
“첨의(僉議)가 바로 문수보살의 후신이다”라고 하면서 그들은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고 어떤 여자는 땅에 버리기도 하였다. 한 번에 사용하는 비용이 누거만에 달하였다.
왕이 홀적(忽赤) 충용위(忠勇衛) 2백50 명을 시켜 주야로 신돈을 호위해 주었다.
연복사 중 달자(達孜)가 일찍이 도참을 들고 신돈에게 말하기를
“이 절에 삼지(三池)와 구정(九井)이 있는데 삼지가 맑아서 부소산(扶蘇山)이 못가운데 비치면 임금과 신하가 마음이 정대해서 태평 세상을 이룩한다. 그리고 구정은 구룡(九龍)이 있는 곳인데 허물어지고 메워진 지 오래니 파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으므로 문수회를 배설할 때 신돈이 이운목(李云牧)에게 명령해서 부병(府兵)을 동원하여 삼지 구정을 개굴하였다.
이 회의를 7일간 계속했는데 3일간은 폭풍이 일었으며 3일간은 된서리가 내렸다. 특히 회의 첫날에는 종일 폭풍이 불고 토우가 하늘에 자욱하였으며 임금이 앉을 어상(御床)이 사람에 부딪쳐서 파손되었다.
왕이 또 연복사에서 친히 문수회를 배설했을 때 무슨 연기 같은 것이 불전에서 3일간이나 나왔는데 신돈이 왕에게 고하기를
“부처가 서광(瑞光)을 냅니다”라고 말했다.
신돈은 도선의 비기에 기록된 송도의 운기가 쇠진된다는 설을 가지고 왕에게 천도(국도 이전)를 권했으므로 왕은 신돈을 시켜 평양으로 가서 지맥을 보게 했는데 이춘부, 김달상, 환자 예의 판서 윤충좌(尹忠佐) 등이 수행했으며 전교령(典校令) 임박(林樸), 내서 사인(內書舍人) 김린(金麟), 지제교(知製敎) 김희(金禧) 등도 칼을 차고 수행했다. 그 중에 김린은 감찰 대부 김한귀(金漢貴)의 아들이고 김희는 김한귀의 조카인바 김한귀가 일찍이 신돈의 척속이라고 거짓말로 속였으므로 데리고 다니었다.
신돈은 평양에서 돌아온 지 나흘이 되어도 조정에 들어와서 임금을 배알하지 않았다. 왕은 신돈을 못본 지도 여러 날이 되어 마음이 몹시 섭섭하였으므로 사람을 보내서 만나 보자고 청했더니 신돈이 말하기를
“내가 오늘은 피곤하니 내일 들어가겠다”라고 하였다.
왕이 성균관을 건축할 것을 명령하니 신돈과 유탁, 이색이 숭문관에 모여서 성균관의 옛터를 돌아보았는데 이때 신돈은 관을 벗고 고두하면서 선성(先聖)에 맹세하여 말하기를
“정성을 다하면 다시 건축하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조금 옛규모만 못하게 하면 일이 쉽게 될 것이다”라고 하니 신돈이 말하기를
“공자는 천하 만세의 스승인데 어찌 사소한 비용을 절약하느라고 전대의 규모보다 좁힐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중선현(禪顯), 천희(千禧)는 모두 신돈과 친근한 자이다. 천희는 제 말로 중국 강절(江浙) 지방으로 가서 달마법(達磨法)을 전습해 왔다고 했는데 왕이 그를 불복장(佛腹藏)으로 친히 예방하고 이어 국사(國師)로 봉했다. 또 선현은 강안전(康安殿)으로 불러들여 왕사(王師)로 봉했는데 왕은 아홉 번 절하고 선현은 서서 절을 받았다. 그리고 백관들은 조복을 입고 반열에 섰는데 신돈만은 군복을 입고 홀로 전상(殿上)에 서서 왕이 한 번 절할 때마다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면서 내시들에게 속삭여 말하기를
“참 우리 상감의 예모는 천하에 드무시거든”라고 하였다. 신돈이 음흉스럽게 왕에게 아첨하여 총애를 얻는 수단이 이러했다. 이때에 사관(史官) 윤소종이 곁에 있었는데 신돈이 돌아다보고 말하기를
“함부로 국사를 쓰지 말라! 내가 가져다 보겠다”라고 하였다.
당초에 선현이 왕사로 되기 전인데 윤소종의 일가되는 중 부목(夫目)이 윤소종에게 말하기를
“신돈은 탐욕 포악하여 개돼지만도 못하니 반드시 나라를 망칠 것이며 게다가 선현이 붙었으니 나는 차마 볼 수 없다”라고 하고 드디어 산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원나라 사신 걸철지(乞徹至)가 묻기를
“소문에 의하면 너희 나라에는 ‘임시 왕(權王)’이 있다 하는데 어디 있는가!”라고 하였는데 당시 중국에서 신돈을 ‘임시왕’으로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신돈이 기현의 집에 기숙하면서 봉선사(奉先寺) 솔밭 길로 왕궁에 출입했는데 그 솔밭 언덕 서남에 약간의 평지가 있었다.
하루는 신돈이 왕에게 말하기를
“그곳에 작은 집을 하나 지으면 늙은 이놈이 다니기에 편리하겠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왕이 허락했다. 신돈은 그의 도당에게 분공 주어 역사를 독려하여 며칠 안 되어서 준공했는데 그 규모가 굉장했고 그윽한 맛이 있었다.
또 북원(北園)에 별실을 짓고 문을 중중첩첩하게 만들어 그윽하고도 정결하게 꾸리고 깨끗한 책상을 앞에 두고 분향을 하면서 홀로 거처했는데 그 고담한 운치는 무욕 도승 이 보였다. 그리고 그 방에는 오직 기현의 처와 두 명의 여종만 출입하게 했으며 무릇 신소하거나 벼슬을 구하는 자들은 반드시 처나 첩을 보내서 기현의 처에게 먼저 뇌물을 주어야 했다. 그러면 기현의 처는 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별실이 심히 협착해서 겉옷은 벗어 두고 또 시종을 떼어 놓고 들어가야 한다”라고 하므로 그 부녀들은 옷을 간단히 고쳐 입고 뇌물을 가지고 홀로 들어가서 진정을 했고 신돈은 단 둘이서 상대했으므로 추잡한 소문이 사방에 전파되었다. 그런데 판사 박보안(朴普安), 삼재(三宰) 강석(姜碩)이 일찍이 무슨 일로 그의 처를 신돈에게 면담하러 보냈는데 신돈이 정조를 빼앗으려 하니 모두 소리치고 완강히 거절하였다.
기현과 그의 처는 신돈을 섬기면서 조석으로 그 곁을 떠나지 않아 마치 늙은 노비와 같았다.
지 도첨의 오인택(吳仁澤)이 경천흥, 목인길, 김원명, 삼사우사 안우경(安遇慶), 전 밀직부사 조희고(趙希古), 판개성(判開城) 이희필(李熙泌), 평리 한휘(韓暉), 응양 상호군 조린(趙璘), 상호군 윤승순(尹承順) 등과 비밀리에 의논하여 말하기를
“신돈은 간악하고 교활하며 음흉해서 남을 참소하고 중상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훈척과 구신을 배척하여 내쫓고 무고한 사람을 살육하여 그 도당이 나날이 왕성해 간다. 도선의 비기에 중도 아니요, 속인도 아닌 자가 정치를 문란하게 만들고 나라를 망치리라는 말이 있는바 그것이 필시 이 사람일 것이다. 장차 국가에 큰 우환이 될 것이니 임금께 아뢰고 하루 속히 제거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때 판 소부시사(判小府寺事) 강원보(姜元甫)는 판서 신귀(辛貴)와 친했는데 마침 신귀가 강원보에게 그릇을 빌려 달라고 사람을 보냈으므로 강원보가 말하기를
“무엇에 쓰려는가?”라고 하니 신귀가 말하기를
“신돈에게 음식을 보내는데 쓴다”라고 하였으므로 강원보가 말하기를
“선물이 무슨 필요가 있나! 내가 누구 누구와 결탁해서 신돈을 없애려 한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돌아가서 신귀에게 고하니 신귀는 즉시로 신돈에게로 가서 고발했다. 신돈은 그날 밤에 도당들에게 무기를 갖추어 호위하게 한 다음 왕을 보고 사변을 고하여 말하기를
“신돈은 산수간(山水間)의 한 중으로 상감께서 강요하여 이렇게 되었는데 나는 감히 왕명을 어길 수 없어서 간악한 자를 제거하여 현명하고 충량한 인재를 등용하여 삼한(三韓) 백성들이 조금 편안히 살 수 있게 되면 입은 옷에 바리때를 들고 다시 산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라 사람들이 신돈을 죽이고자 하니 원컨대 상감께서는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놀라며 곡절을 물으니 신돈이 신귀가 한 말을 가지고 상세히 대답하였으므로 즉시 오인택 등을 순군에 가두어 두고 또 신귀와 강원보를 잡아 국문해 본 후 오인택, 조희고, 경천흥, 김원명, 안우경, 목인길, 오인택의 아들 오영좌들을 곤장 치고 남녘 변방으로 귀양 보냈다가 관노(官奴)로 편입하고 그 가산을 몰수했으며 또 한휘, 이희필, 조린, 윤승순, 강원보, 대호군 유인자(柳仁梓), 한덕경(韓德卿) 등을 귀양 보냈으며 또 낭장 전영귀(田永貴)와 박세원(朴世元), 경천흥 등은 무죄하다고 뒷공론한 죄로 귀양 보냈다.
이런 옥사(獄事)가 진행되고 있을 때 신돈이 서경 보통 법석(法席)에 참석하러 갔는데 3품 이하가 모두 무기를 가지고 그를 호위하였다.
신돈은 자기의 편당 이원구(李元具)를 경상 강릉도 찰방사로, 김정(金鼎)을 양광 전라도 찰방사로, 고한우(高漢雨)를 서해, 평양, 교주도 찰방사로 삼았다. 이원구는 평소에 신돈과 서로 친근한 처지였는데 신돈이 뜻을 이룬 후에 찾아왔다가 즉시 가겠다 하였으므로 신돈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현량한 사람을 구하는데 군은 왜 가려는가?”라고 하고 갑자기 대호군 벼슬을 주고 이번에 찰방사로 삼았는데 그는 신돈의 원수를 모두 대신 갚아 주었다. 그 후 이원구는 여러 관직을 거처 판 태복사(判太僕事)로 승진하였다. 또 감찰 대부 손용은 날마다 신돈의 집으로 찾아가서 무슨 일이나 일일이 품의했으며 신돈이 마루 위에 앉아 있으면 손용은 출입할 때마다 마루 아래에서 부복(俯伏)했다.
현풍(玄風) 사람 곽의(郭儀)는 매양 시속 명절 때에는 술과 찬을 장만해 가지고 영산(靈山)으로 가서 신돈의 아비 묘에 제사를 지내 주고서 그 묘지기를 시켜 신돈에게 전하게 하였더니 신돈은 평소에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니 놀랍고 기뻐서 그를 불러다가 곧 정언(正言)벼슬을 주었다.
17년에 일본이 중 범탕 등을 파견하여 예방하여 왔다. 범탕 등이 행성으로 갔을 때 여러 재상들은 모두 일어섰는데 신돈은 홀로 남향하고 앉아서 접빈의 예가 없었다. 이에 범탕 등이 노하여 힐책하니 신돈은 대단히 분해하면서 구타하려고 했다. 사관에서의 대접도 심히 박해서 식사 공급까지 부족할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이인임이 사적으로 식사를 공급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심히 부끄러워했으나 신돈은 종내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뉘우치지도 않았다.
신돈은 연등절(燃燈節)에 화산(火山)을 만들어 놓고 왕을 초청하였으므로 왕이 그 집으로 갔다. 신돈은 이운목, 기현, 지신사 염흥방(廉興邦), 응양군 상호군 이득림(李得霖) 등과 함께 문무관원 수백 명을 인솔하여 좌우 대열을 편성해 가지고 그것을 감독했는데 등 수(燈數)가 백 만(百萬)도 될 듯이 많았고 그 모양이 지극히 교묘하고 기이했으며 또 여러 가지 구경놀이를 성대하게 차렸다. 왕은 포목 1백 필을 주었다.
이득림은 본래 대위(隊尉)였는데 어떤 연줄로 신돈에게 아부하여 갑자기 높은 벼슬을 했으나 재물에 욕심이 많아서 불법 행위를 마음대로 했다. 일찍이 전라도 안렴사로 있을 때 악행을 많이 하여 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며 또 광주(廣州)에서 공납하는 명주를 도적질했으나 왕은 대관 (臺官)에게 추궁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빨리 임지로 가라고 독촉하였다. 그 후 반주(班主)로 있으면서는 내시 별감(內侍別監)을 결박해 놓고 구타했으므로 헌부(憲府)에서 또 탄핵하였으나 왕은 또 죄를 묻지 않았다. 그 후 신돈은 영전(影殿)의 재목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이득림을 죽였다.
신돈이 왕의 총행을 받기 사작하였을 때 이제현(李齊賢)이 왕에게 말하기를
“신돈의 골상(骨相)이 옛날의 흉인(凶人)과 유사하니 가까이하지 마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신돈은 이 말을 듣고 이제현에 대하여 깊은 앙심을 품었으나 이제현이 너무 늙었으므로 죽이지도 못하여 임금에게 말하기를
“유학자(儒學者)들은 좌주(座主)니 문생(門生)이니 하면서 서로 청탁을 하는데 실례를 들면 이제현 같은 자는 그의 문생의 문하(門下)에서 또 문생이 생겨서 드디어 전국에 흩어져 도적질하고 있습니다. 과거(科擧)의 폐해가 이렇게 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예문관에서 과거를 거행할 것을 청했으나 왕은 평소에 관아 각 부서들이 혹은 필요 이상으로 많지나 않은가 의심하고 있었고 게다가 또 신돈의 의견도 무시하기 어려워서 과거 실시를 허가하지 않았다. 그 후 전교시(典校寺)에서 소지(疏志)나 축문(祝文) 한 장 제대로 쓰는 사람이 단 한 명뿐이란 말을 듣고서야 왕은 구제(九齊)로 가서 이담(李詹) 등 7명의 과거 합격자를 뽑았다.
신돈은 유숙(柳淑)을 증오하여 왕에게 참소해서 죽였으며 또 김문현(金文鉉)의 참언을 곧이듣고 김문현의 아비 김달상과 그의 형 김군정(金君鼎)을 죽였는바 그 전말은 유숙의 전기와 김문현의 전기에 각각 기술되어 있다.
전 밀직부사 김정(金精)이 김흥조(金興祖), 조사공(趙思恭), 유사의(兪思義), 김제안(金齊顔), 김구보(金龜寶), 이원림(李元林), 윤희종(尹希宗) 등과 함께 신돈을 죽일 음모를 하였는데 조사공이 자기 친우 전 흥주 목사(興州牧使) 정휘(鄭暉)에게 그 비밀을 누설했다. 정휘는 제학(提學) 한천과 같이 이춘부에게로 가서 고발했고 이춘부는 궁중으로 들어가서 왕에게 고하였다. 왕은 그들을 순군옥에 가두고 국문한 후 죄의 경중에 따라서 곤장 치고 귀양 보냈는데 신돈은 자기 사람을 쫓아 보내서 중로에서 모두 다 목 매어 죽였으며 또 조린과 김원명은 유사의와 편지 왕래가 있은 까닭에 모두 곤장을 쳐서 죽였다.
무릇 신돈에게 죽은 사람의 처자들은 감히 신소도 못했으며 조정의 백관들도 아무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신돈은 또 귀양 보낸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자 왕에게 말하고 손연(孫演)을 경상, 전라도로 보냈는데 그의 도당인 홍영통(洪永通)이 신돈에게 말하기를
“사람을 많이 죽여서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사람이 죄를 입고 복을 받는 것은 평시 소행에 따른다고 불교는 가르치고 있는데 그 말이 두렵지도 않는가! 그러나 한번 더 고쳐 생각해 보라”라고 하였으므로 신돈이 깨닫고 왕에게 다시 고하여 손연을 도로 불러 왔다.
18년, 공주의 기일날 새벽에 연복사에서 불공을 하였다. 남녀 중(僧)이 수천 명이었는데 포목 8백 필을 주었다. 그때 수원(水原) 지방에 기근이 들어서 유랑하는 난민들이 불공이 있다는 것을 알고 모여들었으므로 신돈이 나머지 베를 유랑민에게 나누어 주어서 자기의 명예욕을 만족시켰던 것이다.
신돈은 자기가 5도 도 사심관(五道都事審官)이 되고 싶어서 삼사(三司)를 시켜 그 관제의 회복을 주청케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의 선친 충숙왕이 심한 한재를 당했을 때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고한 다음 각도 도 사심관을 혁파했더니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한다. 내가 어찌 선왕(先王)의 뜻을 망각하겠는가!”라고 하고 그 상소문을 불에 태웠다. 그 후에도 신돈은 각 도, 주, 현 사심관을 설치할 데 대한 청원 목록을 가지고 왕에게 진언(進言) 한즉 왕이 말하기를
“5도 도 사심관인 첨의가 스스로 할 일이지”라고 농담을 하고 계속해서
“무슨 도적이니 해도 제일 큰 도적이 각 고을의 사심관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이 문제는 드디어 중지되었다.
신돈이 비밀리에 이춘부를 시켜 충주로 국도를 옮길 것을 청했더니 왕이 대노하였다. 이때에 신돈은 핑계하기를 송도의 위치가 바다 가까이 있으므로 바다로 침입하는 적을 염려한 까닭이라고 하였으므로 왕의 노염이 풀어졌다.
이것이 계기로 되어 왕이 앞으로 삼소(三蘇-평양, 송도, 한양을 말함)를 순회하고 체류하겠으니 주민을 동원하여 도로를 닦아 놓고 또 평양과 충주에 모두 이궁(離宮)과 공주의 혼전(魂殿)을 신축하라는 영(令)을 내렸는바 공급할 물자를 준비하느라고 백성이 큰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신돈을 두려워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판 사천감(判司天監) 진영서(陳永緖) 등이 상서하여 근자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보이고 또 금년 농사가 흉작인즉 정(靜)이 길하고 동(動)이 흉하다는 의견을 말했더니 왕은
“어째서 이제야 말하는가”라고 하고는 그 이튿날 왕은 좌우 시종들에게 말하기를
“국사는 대신이 몰라서는 아니 된다”고 하면서 신돈과 의논한 후에 그 여행을 중지하였다.
신돈이 팔관회(八關會)에서 왕을 대리하여 여러 신하들의 축하를 의봉루(儀鳳樓)에서 받았다.
왕의 천성은 의심이 많고 잔인해서 비록 심복(心腹) 대신이라도 그의 권세가 성해지면 꺼리어 죽였다. 그래서 신돈은 자기가 날개를 너무 과히 펼쳤다는 것을 알고 왕이 자기를 꺼릴가 두려워하여 반역을 밀모하였다. 그런데 중 석온(釋溫)은 처음에 신돈에게 아부하여 신축년의 전공으로 보리군(輔理君)이 되었다가 그 후 죄를 짓고 도망가서 머리를 기르고 고인기(高仁器)라고 변성명하고 와서 판 소부감사(判小府監事) 벼슬을 했는바 신돈의 반역 음모를 누설했으므로 신돈은 자신이 임금 앞에서 변명한 후 다시 고인기의 머리를 깎아 금강산으로 추방하였는데 실상은 그를 비호해 주었다.
19년에 명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 와서 공민왕에게 국왕(國王) 작위를 주고 신돈에게도 채단 금백과 친서를 보내 주었는데 그 글에는 상국(相國) 신돈이라고 씌어 있었다.
왕은 간관의 건의에 의하여 6부(部)와 대간(臺諫), 정조(政曹) 관원들이 매월 5일 간격으로 여섯 번 출근하여 정사를 보고(六衙日) 하라고 명령했는데 신돈은 왕에게 말하기를
“만약 여섯 번이나 정사를 청취하게 되면 재판관들이 5일 내에 송사를 처결할 수 없으므로 청컨대 초 2일과 16일 양일에 일을 보십시오”라고 해서 왕이 그것을 청종하였다.
20년에 신돈이 시종하는 사람들이 천판(穿坂)에서 신돈을 위하여 음식을 차렸는데 왕이 양청(凉廳)에 나서서 바라보니 시중 이하 작위 받은 자는 모두 참석하여 약 2백여 명이나 되었고 서울 안 사람들이 모여 와서 구경하면서 그것을 ‘첨의의 전송 잔치’라고들 했다.
권적(權適)이 또 큰 잔치를 차리고 신돈을 먹이는데 화산대(火山臺)를 가설하였으므로 신돈이 불안해서 양청을 옮겨 놓고 왕을 청해서 보게 했다.
신돈은 당초에 중으로서 왕에게 신임을 얻은 후 이미 김란의 딸을 받아들였고 또 첩을 무수히 두었으며 경대부(卿大夫)의 처들 중에서 얼굴이 고운 자는 반드시 은밀히 불러다가 사통하였다. 또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들이 모두 무슨 은덕이나 받을까 하여, 또 위세가 무서워서 노비와 보물들을 바쳤다. 그래도 왕은 신돈이 녹을 아니 받고,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전원(田園)을 장만치 않는다고 하여 중히 여겼다.
신돈은 상벌의 권한을 제 손에 잡고 은혜와 원수를 가려서 꼭 보복하였으며 세가대족(世家大族)들을 거의 살육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호랑이처럼 여겼다. 심지어는 벼슬하는 자들로 하여금 밤이면 그 집에서 수직을 서게 하고 신돈이 인물을 평정하고 벼슬을 제수하다 보니 외출하면 시중(侍中) 이하가 앞뒤로 옹위하였으므로 길이 막혀서 저자에서는 전방을 열어 놓지 못했다. 그리고 기현과 최사원(崔思遠)은 그의 심복이 되고 이춘부와 김란은 그의 날개가 되어 그 도당이 조정 안에 가득 찼으므로 임금이 또한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신돈을 영상(領相)이라 부르고 감히 관직명을 부르지 못했다.
왕이 헌릉(憲陵)과 경릉(景陵)에 배알했을 때 신돈은 그 도당을 나누어 파견하여 길가에 매복시키고 왕을 살해하라고 엄명하였는데 왕이 무사히 환궁하니 신돈은 그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어째서 약속대로 아니 되었는가?”라고 하니 그 무리들이 말하기를
“상감의 의위(儀衛)가 너무나 엄해서 범접할 생각도 못했다”라고 하였으므로 신돈이 노하여 욕지거리하기를
“너희 같은 겁쟁이 놈들은 무용지물이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밤낮으로 모여서 밀모하고 다시 기일을 정하여 거사하기로 하였다.
당시 벼슬을 구하는 자들은 모두 신돈에게 아부했는데 선부의랑(選部議郞) 이인(李靭)도 역시 신돈의 문객으로 되어 있었는바 음모를 상세히 알고 은밀히 기록했다가 일이 임박하게 되자 성명을 감추고 ‘한림거사(寒林居士)’라는 이름으로 글을 지어 밤에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 들어 던지고 즉시 변복하고 도망쳤다.
김속명은 그 글을 왕에게 바치니 왕은 순위부에 영을 내려서 신돈의 도당 기현, 최사원, 고인기, 전소윤(前少尹), 정구한(鄭龜漢), 장군 진윤검(陳允儉), 기현의 아들 전 정랑(前正郞) 기중수(奇仲脩), 한을송(韓乙松) 등을 잡아 가두고 국문했는데 왕이 처음엔 이인이 허위 날조한 것으로 의심하고 믿지 않았으나 급기야 그 일당을 심문해 본즉 모두 복죄하였으므로 기현, 최사원, 정구한, 진윤검, 기중수, 고인기, 한을송 등을 죽이고 이문목, 신귀(辛貴), 신수(辛修)를 귀양보냈다.
이튿날 신돈은 소아의 생신이여서 광명사(廣明寺)에서 중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왕은 승선 권중화(權仲和)를 시켜서 향(香)을 피워 주고 망룡의를 주었으며 신돈이 정릉(正陵)에 배알하러 가니 왕은 이인임, 경흥방 및 두리속고적(頭裏速古赤)에게 신돈을 따라가라고 명령하였다.
이틀 후에 신돈을 수원(水原)으로 귀양 보내고 이성림(李成林), 왕안덕(王安德)을 시켜 압송했다.
이부(理部) 헌사(憲司)가 기현 등의 삼족(三族)을 면할 것을 건의하니 왕이 말하기를
“문하성이나 중방(重房)에서는 어째 아무런 의견이 없느냐!”라고 하였으므로 도 평의사가 아뢰기를
“신돈은 근본이 용렬한 중놈인데 과도한 은총을 받으면서 권모술수로 국권을 농락하고 은밀히 편당을 만들어 함께 반역을 음모했으나 다행히도 하늘의 도움을 받아 그 일당을 숙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돈은 역적의 괴수로 서울 밖으로 축출당하였을 뿐 아직까지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니 응당 극형에 처할 것이며 그의 남긴 자식과 이부 동복 동생들, 그리고 그 도당 기현, 최사원 등의 자식들도 죽여야 하며 그 잔당들도 역시 모조리 추궁해서 치죄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문하성에서는
“‘대역(大逆)’의 죄는 천하 만세에서 용납치 못할 죄인데 신돈은 본래 일개 한미한 중으로 외람히 상감의 지우(知遇)를 받아 직위가 신하로서는 최고에 이르렀고 백관의 임면을 마음대로 하고 재상들도 종같이 부렸으며 흉도를 규합하여 분에 없는 자리를 엿보다가 다행히 조종의 영림과 전하의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흉모가 발각되었는데 관대한 은전으로 유방(流放)하는 처벌에 그치니 전 국민들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또 신돈의 도당은 기현, 최사원 등 7명뿐이 아니니 삼가 바라건대 대의에 입각하여 신돈을 극형에 처하여 가산을 몰수하고 그 일당도 모두 죽여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여 주십시오”라고 상소했고 헌부(憲府)에서도 역시 신돈을 극형에 처하고 그의 친당(親黨)들을 귀양 보내고 가산 몰수 및 저택(집을 헐어 버리고 못을 만드는 것)형을 적용할 것을 청했다. 그래서 왕이 말하기를
“법은 천하 만민의 공법(公法)이므로 내가 어찌 사정으로 공법을 꺾겠느냐! 마땅히 상주(上奏)한 바에 의하여 처단하라!”라고 하고 찰방사 임박(林樸)과 체복사 김규를 수원으로 파견해서 신돈을 사형하고 곧 신돈이 쫓아낸 경천흥 최영, 이희필, 윤승순 등을 소환했다.
당초에 왕이 신돈, 이춘부 등과 함께 맹세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임복에게 그 맹세문을 주어 그것을 신돈에게 보이고 다음과 같이 치죄하라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부녀들을 가까이하는 것은 그들을 매개(媒介)로 하여 양기(養氣)하는 것이지 감히 사통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더니 이제 듣건대 자식까지 두었다니 이런 일이 맹세문에 있느냐! 성중에 훌륭한 집을 일곱 채나 지었다니 이것도 맹세문에 있느냐! 이런 일이 한두 가지만이 아니다. 수죄한 후에 이 글은 불에 태워 버리라”라고 하였다.
임복이 수원으로 가서 사람을 시켜 소환하러 온다고 속였더니 신돈이 기뻐서 말하기를
“오늘 나를 소환하는 것은 아마 아기(阿只)가 나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기(阿只)란 방언인데 어린아이를 말한다. 신돈의 비첩(婢妾) 반약(般若)의 소생 모니노(牟尼奴)를 왕이 자기 아들로 삼아서 이것이 후에 신우(禑)로 되였는데 아기란 바로 모니노를 가리킨 것이다.
수원 부사 박동생(朴東生)이 신돈의 앞에서 울며 그들 사이의 정의를 늘어놓으니 이성림이 꾸짖어 내보냈다.
신돈이 사형을 당할 때 두 손을 마주 잡고 임박에게 애걸하기를
“원컨대 당신은 아기를 보시고 나를 살려 주시오”라고 하였다. 이어 목 베어 죽이고 사지를 각떠서 각 도로 조리돌림을 하였으며 서울 동문에 효수했다.
전자에 임박이 상장군 이미충(李美沖)과 함께 왕에게 배알했을 때 왕이 이미충에게 말하기를
“너도 아기에 대한 일을 알지”라고 하니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임박이 이상히 여기고 물러 나와서 이미충에게 물으니 이미충이 말하기를
“어느 때 상감께서 금돈을 만들어 나에게 주면서 신돈의 집에 가서 아기에게 주라 하기에 가져다 주었더니 아기가 대단히 기뻐했다. 그때 신돈이 나에게 말하기를‘상감께서 우리 집에 자주 오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므로 내가 이 말을 왕에게 자세히 보고 하니 상감께서 그렇게 말씀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신돈이 처단당하자 임박이 사관(史官) 민유의(閔由誼)와 이지(李至)에게 말하기를
“이번에 신돈을 처단한 것은 국가의 큰 경사다. 그런데 또 큰 경사가 있으니 그대들은 알아 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