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47권, 5년(1474 갑오 / 명 성화(成化) 10년) 9월 27일(기묘)
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 성봉조(成奉祖)가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하고 예장(禮葬)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성봉조의 자(字)는 효부(孝夫)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인데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성엄(成揜)의 아들이었다. 음보(蔭補)로 순승부 행수(順承府行首)가 되고 여러번 옮겨 한성 소윤(漢城少尹)에 이르고 선덕(宣德) 경술년에 지풍덕군사(知豊德郡事)로 나갔다가, 정통(正統) 무오년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거쳐서 신유년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우부승지에 오르고, 옮겨서 형조·호조·공조의 참의(參議)를 거쳐 경상도·충청도 관찰사를 지내고, 정묘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경상도 도절제사(都節制使)에 올랐고, 기사년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가 경태(景泰) 임신년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고 계유년에 가정 대부(嘉靖大夫) 형조 참판에 올랐다가, 곧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에 임명되었다.
세조가 즉위하매 그 아내가 왕비의 형제였기 때문에 특별히 자헌 대부(資憲大夫)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더하고, 또 공조·형조의 판서로 옮겼고, 천순(天順) 정축년에 정헌 대부(正憲大夫)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을 더하고, 무인년에 이조 판서에 제배되었다가 임오년에 숭정 대부(崇政大夫) 우찬성(右贊成)에 오르고, 성화(成化) 병술년에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올라서, 무자년에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더하였다.
임금이 즉위하자 순성 명량 좌리 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호(號)를 하사하고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을 제배하고 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을 봉하니 성봉조가 사양하기를,
“삼공(三公)은 지위가 백관(百官)의 우두머리로서 나라의 균축(鈞軸)4455) 을 잡는 것인데, 신과 같은 작은 그릇으로 어찌 물망에 부합하겠습니까? 하물며 이제 쇠하고 늙었으므로 치사(致仕)함이 이치에 마땅하니 빌건대 기무(機務)를 해임하여 남은 여생을 보존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으며, 갑오년에 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으로 바꾸어 봉하였고, 이에 이르러 졸하였는데 나이가 74세였다.
시호(諡號)는 양정(襄靖)이니, 일로 인하여 공(功)이 있음이 ‘양(襄)’이고 부드럽고 곧으며 편히 죽음이 ‘정(靖)’이다.
성봉조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후덕하며, 고사(故事)를 잘 알고 숙련하여 가는 데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아들 성율(成慄)은 벼슬이 참의(參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