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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인물

전 판서 황신의 졸기

작성자빈구름|작성시간13.02.03|조회수33 목록 댓글 0

광해 113, 9(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 314(기묘)

 

전 판서 황신(黃愼)이 유배지인 옹진(甕津)의 적소(謫所)에서 졸하였다.

황신의 자는 사숙(思叔)이고 호는 추포(秋浦)이며, 굳세고 모가 나서 다른 사람을 잘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어려서 성혼(成渾)에게 사사하였으며, 무자년의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다.

임진년 난리 때 궁료(宮僚)로서 오랫동안 분조(分朝)에 있었는데, 바로 잡아주고 도와준 바가 많았다.

유격(遊擊) 심유경(沈惟敬 명의 사신으로 왔다.)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2년 동안을 적진에 있었다. 중국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어 왜추(倭酋)를 책봉(冊封)하면서 화친을 맺고자 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신사(信使)와 함께 가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황신을 사신으로 뽑았다.

당시에 왜적이 우리나라의 변경에 주둔해 있어서 정황이 날마다 변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들 하였다. 그런데도 황신은 의연한 태도로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바다를 건너가다가 바람을 만나 뱃사람들이 모두 엎드려 있었는데, 황신이 글을 지어 맹세하기를, “늑대와 범이 우글거리는 속에서 2년 동안이나 절개를 지키고 있었는데, 교룡(蛟龍)의 소굴 위에서 또 8월에 사신 가는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이에 몸바치기를 달갑게 여기어, 머리를 조아려 스스로 맹세하였습니다. 저 황신은 나라가 판탕된 때를 만나 나랏일에 몸바쳐 분주하느라 아무리 험하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모두 겪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언행이 오랑캐 땅에서 행세할 정도로 독실하기야 하겠습니까. 변하지 않는 단심(丹心)이 있는 것을 힘입어 하늘에 물어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으니, 4천 리 사신길의 노고를 어찌 감히 추호라도 꺼리겠습니까. 30년 동안 쌓은 공부를 바로 오늘에 시험해 볼 때입니다. 참으로 힘쓰지 않아서는 안될 임금의 일인데다가 또한 신하로서의 당연한 직분이기에 바로 바람에 돛을 달고 멀리 일본 땅으로 갑니다. 참으로 사직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이롭게만 할 수 있다면 죽음 또한 사양하지 않겠지만,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고 신의 지조를 잃게 된다면 산다고 한들 또한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령께서는 이 정성을 굽어 살피소서. 행여 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하늘이 알아주시려니와, 만약 한 생각이 혹시라도 게을러진다면 신()은 나를 죽이소서.” 하였다.

일본에 도착하여서는 적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능욕하고 핍박하였으므로 일행이 겁을 내어 어찌할 줄을 몰랐으나, 황신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자 말하는 자들이 소무(蘇武 한나라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10여년 억류당하면서도 지조를 지켰다.)에 비하였다.

일본에서 돌아와서는 전라 감사에 제수되었다. 왜구가 물러감에 미쳐서는 상소를 올려서 주사(舟師)로 그들의 뒤를 쳐서 나라의 수치를 씻기를 청하고, 이어서 자신이 선봉장이 되기를 청하였다. 그 일이 비록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이 바른 의논을 하였다고 하였다.

당초에 기축년의 옥사(선조 때인 1589년에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의 인물들이 모반의 혐의로 박해를 받은 사건)가 일어났을 때 처사(處士) 최영경(崔永慶)이 원통하게 죽었는데, 신축년에 이르러서 남쪽 지방 사람인 문경호(文景虎)가 상소하여 성혼(成渾)을 추론(追論)하면서 착한 선비를 죄에 얽어 죽여 사림(士林)을 위험한 지경에 빠뜨리려 했다.’고 하였다.

이 때 황신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그것이 무함임을 극력 말하였다가 드디어 죄를 얻어 쫓겨났다.

그뒤 8년 뒤에 다시 호조 판서로 서용되었다. 그 당시에 조사(詔使)가 자주 나와 경비가 날로 불어났는데, 황신은 6년 동안 자리에 있으면서 치재(治財)를 잘하였고, 또 균전사(均田使)를 내보내어 토지구획을 잘하는 등 시행한 일이 많았다.

계축년에 박응서(朴應犀)의 옥사가 일어나 정협(鄭浹)이 간흉의 사주를 받아 당시의 명류(名流)들을 무고하였는데, 황신 역시 붙잡혀서 옹진현에 유배되었다.

당초에 정사호(鄭賜湖)가 이조 참판이 되어 이이첨을 간장(諫長)에 주의하고자 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물었는데, 황신이 고집을 부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정사호가 누설하자 이이첨이 크게 원망하여 드디어 이 화를 받게 된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58세였다. 자식은 없다.

황신은 고금의 자사(子史)에 통달하여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가 없었다. 글을 지음에 있어서는 변려문(叴儷文)에 뛰어났다. 일찍이 세자 책봉(冊封)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지으면서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임무를 맡기려고 지성스레 명하였다. 일은 반드시 기다림이 있은 후에 그리 되는 것이니 우선은 천천히 하라고 할 뿐이다.’ 하였는데, 세상에서 절묘한 글이라고 칭한다. 뒤에 문민공(文敏公)에 증시(贈覬)되었다.

 

 

 

 

기축옥사: 기축사화(己丑士禍)라고도 한다. 기축년(己丑年)1589(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告變)에서 시작해 그 뒤 1591년까지 그와 연루된 수많은 동인(東人)의 인물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대립과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계축 옥사: 1613(광해군 5)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大北派)가 일으킨 옥사(獄事)이다. 선조의 적자(嫡子)이며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구실로 소북파(小北派)의 우두머리이며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는 등 소북파를 몰아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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