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137권, 11년(1619 기미 / 명 만력(萬曆) 47년) 2월 20일(갑술)
윤효전(尹孝全)이 죽었다.
효전은 겉으로는 유자(儒者)같이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음모와 술수가 있는 자였다.
임해(臨海)의 옥사에 유희분(柳希奮)이 시키는 대로만 하여 제일 먼저 상소하더니 마침내 원훈(元勳)의 반열에 들었다. 이로부터 자신의 뜻을 굽히고 남의 뜻만을 따름으로써 다시는 사대부로 자처하지 않았다.
일찍이 호남의 고을 원이 되었을 때에 도사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시사(試事)를 관장했는데, 시제(試題)가 시휘(時諱)를 범하여 함께 잡혀 들어가게 되었다.
효전이 모든 잘못을 시양에게 돌리고 자기만 빠져나갔으므로 시양은 어떻게 될지 모를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가 간신히 유배만 되었다.
효전은 대성(臺省)을 두루 거쳤고, 【또 이첨에게 붙었다가는 다시 배반하였는데,】 그의 마음가짐과 처신이 대개 이와 같았다.
* 서경덕의 학문을 이어받았고 또 광해군 때의 북인 정권에 참여하였므로,
광해군일기를 쓴 서인들이 더욱 부정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보이네요.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효선(孝先), 자는 영초(詠初), 호는 기천(沂川). 관(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虎)이고, 아버지는 희손(喜孫)이고, 어머니는 이수(李琇)의 딸이다.
휴(鑴)의 아버지이다.
1605년(선조 38) 현감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왕자사부를 거쳐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그 뒤 1613년(광해군 5) 익사공신(翼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대사헌이 되었을 때는 임해군(臨海君) 옥사를 모사한 이이첨(李爾瞻)ㆍ정인홍(鄭仁弘)의 꾐에 빠져 곤혹을 치렀다.
그 뒤 지의금부사에 이르고 1617년 경주부윤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호남의 군수로 재임시 군도사(郡都事)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시험을 관장하던 중 시제가 휘호에 저촉되어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