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장사건, 등제 서열 사건
이동(李同)은 869년(경문왕 9)에 왕자인 사은겸진봉사(謝恩兼進奉使) 소판(蘇判) 김윤(金胤)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국학(國學)에 입학하여, 875년 당나라 예부시랑 최항(崔沆) 아래에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이 때 함께 응시한 발해의 유학생 오소도(烏昭度)가 수석합격을 하고 이동이 차석을 차지함으로써 신라와 발해의 빈공과 쟁장사건(賓貢科爭長事件)의 발단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신라는 906년에 실시된 빈공과에서 최언위(崔彦僞)가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烏光贊)을 누르고 수석으로 합격할 때까지 30여년간 커다란 수치감과 굴욕감을 인내해야 하였다.
쟁장(爭長) 사건은 897년에도 벌어졌다. 당에 간 발해의 사신이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을 것을 요청하였다가 거절당한 것이다.
발해 왕족 대봉예(大封裔)는 최치원(崔致遠)이 쓴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는 왕자(王子)라고 되어 있으나, 누구의 아들인지 확실하지 않다. 대봉예는 897년 하정사(賀正使)로 당나라에 들어갔다. 그는 발해가 신라보다 국력이 세고 외교적 위치가 높은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당나라에서 조헌(朝獻) 할 때 발해 사신의 자리 순서는 신라 사신 보다 아래를 두고 있었다. 이에 대봉예는 서장을 올려 발해가 신라 위에 거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 당하고 말았다.
906년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烏光贊) 역시 당나라로 가서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그때 신라의 최언위(崔彦撝)도 함께 시험을 보아 합격하였는데, 이번에는 오광찬의 석차가 최언위의 아래였다.
마침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오소도는 이 사실을 알고 당나라 조정에 오광찬의 석차가 최언위보다 위로 가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당나라 조정에서는 학식과 재주가 오소도보다 최언위가 뛰어남을 들어 거부하였다.
이러한 사건은 그뒤 양국의 관계를 더욱 경쟁적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