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특별취재]
일본 근대화 역사 속‘허구와 진실’
-조선인 강제징용의 현장, ‘군함도’
|
“사랑도 부서져 내리고 삶도 무너져버린 서글프도록 짧았던 날,
불타는 나가사키엔 검은 비가 내린다.”
한수산 작가의 일본어판 소설 『군함도』 첫 문장이다. 이 섬을 배경으로 쓴 일본어판 『군함도』를 노무현 전 대통령 방일 직후인 2003년 세상에 내놓았다. 소설의 전반부가 하시마 탄광 탈출과정을 그리고 있고, 후반부는 원폭 투하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큐소설이다.
군함을 닮은 섬 - 군함도(하시마)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다
현재 한수산의 장편소설 『까마귀』가 영화로 제작 중이다. 작가의 자문을 얻어 류승완 감독이 군함도를 배경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마치고 촬영에 들어갔다. 일제강점기 군함도에 강제 징용된 후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한 400여 명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서, 황정민, 소지섭, 송중기 등 꿈의 캐스팅으로 벌써부터 화제를 모으고 있다. 2016년 5월에 크랭크인 해 2017년 개봉예정이다. 영화가 개봉되는 날, 한류의 거센 바람을 타고 일본 근대화 역사 속 ‘허구와 진실’이 세상에 속속들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 정비작업이 한창이다
군함도는 나가사키 반도에서 서쪽으로 4.5㎞, 미쓰비시 석탄광업(주)의 주력탄광이었던 다카시마에서 남서쪽으로 2.5㎞, 나가사키항에서 남서쪽으로 19㎞ 떨어진 섬이다. ‘하시마’라고 불리는 이곳은 남북으로 480m, 동서로 160m, 둘레 1,200m, 면적 63,000㎡의 작은 해저탄광섬으로 울타리가 섬 전체를 둘러싸고 고층의 철근아파트가 늘어선 외관이 군함 ‘도사’와 닮아있는 모습에서 ‘군함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군함도로 가는 크루즈에서 바라본 나가사키대교
나가사키현은 “일본의 근대화는 나가사키에서 시작됐다”고 자부한다.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23개 중 8개를 갖고 있다. 하시마 탄광 외에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시설이 5곳이고, 다카시마 탄광과 글로버 저택도 포함됐다. 나가사키 조선소는 최초의 함선 수리 공장으로 출발했고, 1887년 미쓰비시가 인수한 뒤 일본을 대표하는 조선소로 많은 군함과 민간선박을 만들었다. 당시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던 ‘무사시’를 제조한 곳도 이곳 조선소였고, 군함이나 함정이 사용한 어뢰를 제작한 곳도 미쓰비시 병기제작소였다. 나가사키 조선소 역시 조선인 강제징용자 수천 명이 일했고, 그중 상당수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 |||
|
|
||
군함도행 크루즈를 타고 나가사키 대교를 지나자 섬들이 보인다. 이오지마(伊王島), 다카시마(高島)가 차례로 나타났다 사라진 뒤에 눈에 익은 섬이 시야에 들어온다. 폐선처럼 떠있는 군함도를 보는 일이 그리 편치 않다. 섬에 다가갈수록 군함도를 찾은 한국인들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부두에 도착해 안내하는 길을 따라 걸으니 작은 광장이 나타난다. 폐광 후, 반 정도의 건물만 남은 그곳에는 견학통로가 지정돼 있고 구역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입간판이 버티고 서있다. 아파트와 초중학교, 격리병동 등의 뼈대가 흉물스럽고, 저탄 벨트 컨베이어나 광산시설인 갱구도 붕괴된 채 잔해더미로 널브러져 있다. 섬의 제일 높은 곳 ‘하시마 신사’도 먼발치에서만 볼 수 있게끔 견학통로는 국한되어 있다.
평화공원 내 순교자기념탑 앞
안내원의 유창한 해설이 이어졌다. “200년 전 이곳 해저에 석탄이 있는 것이 알려졌고, 1890년 본격적인 채굴이 시작됐다. 원래 남북 320m, 동서 120m 모래톱이었는데 여섯 차례에 걸친 매립으로 남북 480m, 동서 160m 섬으로 탈바꿈했다. 당시 이곳에는 사람이 살고, 소리가 나고, 생기가 있어 일본의 미래라 불리던 마을이었다.”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에 대한 설명은 들을 수 없고 자국에 대한 미화만 쉼 없이 늘어놓는다.
크루즈를 타고 섬을 돌아보며 선상에서 클로즈업해 찍은 섬의 북쪽 모습
하시마는 지하 1km까지 파내려간 해저 탄광이다. 일본 광부들에게는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를 제공받은 근대식 삶의 터전이었지만 조선인들에게는 처절한 감옥이었다. 이곳까지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은 소모품이었고 노예였다. 10m 높이의 제방이 담장처럼 둘러싸인 하시마 탄광의 최전성기인 1941년에는 41만 톤의 석탄을 캐냈고, 1960년에는 총 거주자가 5,300명으로 도쿄의 9배나 되는,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섬이었다.
하시마 탄광은 중요 산업시설로 부상했다. 1916년 일본 최초의 고층 아파트가 세워졌고 병원, 영화관, 학교 등이 들어섰다. 하지만 에너지원이 석유로 전환됨에 따라 쇠퇴의 길로 들어섰고 1974년 폐쇄됐다.
군함도로 출발하기 전 - 나가사키항
지난해 7월, 일본은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하시마는 일본인에게는 자랑스러운 산업혁명유산이지만, 한국과 중국 등 인근 국가들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을 말해주는 장소다. 1937년 중일전쟁 후 조선인 징용이 시작됐고, 미쓰비시 조선소를 비롯해 수많은 군수산업 기지에서 노역을 착취당한 징용자 수는 8천 명에 달한다. 군함도에는 800여 명이 해저 탄광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고 죽은 조선인은 수백 명에 이른다. 그래서 한국은 하시마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반대했다.
|
|
||
| |||
|
무인도로 방치돼 퇴락했던 하시마는 세계유산 등재 후 방문객이 급증하자 정비복원 사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안내문에는 한국인 징용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가 없다. 많은 관광객들 중 유독 한국인 방문객들에 대해 견제가 심했다. 허물어진 건물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는 일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이처럼 관광객에게는 일부만 개방하고 있으며 조선인이 살았던 북쪽은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4박 5일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카멜리아호 선상에서 한 컷
군함도를 돌아본 심정은 한마디로 비통했다. 일본인 해설사의 해설에서 벗어나 일정 내내 동행한 일본인 기무라 선생으로부터 ‘허구와 진실’을 다시 들었다. 선생은 70년간 분단되어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일본에 있다며 “하시마는 문화유산이 아니라 징용의 섬으로 남아야 한다”며 사과했다. 우리는 구천을 떠돌고 있을 희생자들의 넋을 긴 묵념으로 위로하며 섬을 빠져나왔다. 천 가지 사연을 품고서도 단호하게 침묵하는 군함도. 폐광 속 까마귀들의 고단한 날갯짓 같은 섬이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글 사진 노옥분 시인, 수필가
서해국립공원에서 내려다본 사세보항
** <봉생문화> 제62(여름)호에 실린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