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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gallery

프랑스 국립 베르사이유 특별전 (3)

작성자은보|작성시간19.12.08|조회수389 목록 댓글 0



The Exhibition of Chateau de
Versailles
From Louis XIV To Marie Antoinette



Louis XVI, King of France and Navarre (1754-1793), wearing his grand royal costume in 1779, 1789
by 앙투안 프랑수아 칼레(Antoine-Francois Callet:French Painter, 1741-1823)
    3. 루이 16세의 집권,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Louis XVI et Marie-Antoinette, le crepuscule) 18세기 중엽 이후, 화려한 장식을 절제하고 단순함을 추구하는 고전주의 양식이 다시 부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신고전주의이다. 베르사이유의 별궁인《프티 트리아농》은 이런 절제된 우아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 고 할 수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즐겨 찾았던 이곳의 가구 및 소품들을 통하여 베르사이유 궁이 상징하는 우 아함이나 화려함에 세련된 아름다움이 더해졌음을 알 수 있다. 루이 16세(Louis XVI:1754~1793)는 루이 15세의 손자로, 1754년 8월 23일 베르사이유 궁에서 왕세자 루이와 마리 조제프 드 삭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1765년에, 어머니는 1767년에 세상을 떠났고, 두 형들마저 어린 나이에 사망했기 때문에 루이 16세는 열한 살의 나이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이 어린 왕세자는 1770년 5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1세 와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대공여 마리 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1755~1793) 와 결혼했다. 이 둘의 결합은 오랫동안 서로를 적대시해 왔던 두 나라 간에 새로운 정치적 연합 관계가 성립되 었음을 공표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겨우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던 아름다운 마리 앙투아네트는 상냥하고 소 탈한 성격으로 곧 프랑스 궁정과 국민들을 사로잡았으나, 프랑스 궁정의 엄격한 예법들에 쉽게 익숙해지지 못 했고 비엔나의 간소하고 자유로웠던 궁정 생활을 그리워했다. 그녀는 궁정의 엄숙한 행사들에 거부감을 내비쳤 고, 그대신 사냥과 무용, 무도회, 그리고 연극에 빠져 들었다. 1774년 5월 10일에 루이 15세가 서거하자, 루이 16세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그는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였다. 궁정 사람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자신의 작은 방에서만 편안함을 느꼈던 이 내성적인 국왕에게 궁정 생활의 모든 것은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는 사냥을 무척 좋아했고 손재주가 뛰어나 정밀한 기계를 직접 만들기도 했으며, 독서량이 상당한 편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인 루이 15세의 지시에 따라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전 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그의 즉위를 열광적으로 환영하며 새로운 변화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 었다. 그러나 1774년부터 1776년까지 재정 총감으로 재직했던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가 제안한 개혁안들은 이 미 루이 15세 시절에 시작된 경제 위기와 그로부터 비롯된 재정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프랑스는 루이 15세가 이끌었던 7년 전쟁(1756~1763)의 패배를 맛본 뒤로 한동안 반전주의의 기류에 휩싸이기 도 했지만, 1778년부터 1783년까지 미국의 독립 전쟁에 참가함으로써 다시금 군사 국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냈 으며, 루이 16세는 1778년에 벤자민 프랭클린을 대표로 한《아메리카 주 연합》과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프랑스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Louis XVI, King of France, Receiving the Homage of the Knights 대관식 이후 성령 기사단의 작위를 받는 루이 16세 by 가브리엘 프랑수아 두아양(Gabriel-Francois Doyen:French Academic Painter, 1726-1806)
    화려한 궁정 생활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항상 노력했던 루이 16세는 베르사이유 궁에서 대규모 예식과 종교적인 축제들을 주기적으로 열었다. 또한 궁정에서는 예의 범절이 매우 중시되었는데, 특히 왕실 일가의 기침이나 취침 시에 치러지는 의식이라든지 또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경우에는 더욱 격식을 차렸다. 젊은 궁정 인사들은 베르사이유 궁의 예의범절이 고리타분하다 못해 우스꽝스러울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공식적인 행사에 불참하는 경우가 많았고, 궁정의 구 귀족들에게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루이 16세 역시 점차 이러한 일탈에 젖어 들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예식들을 간략히 줄이기까지 했다. 이에 따라 많은 귀족들이 베르사이유를 멀리하며 파리에서 주로 생활하게 되었고, 왕실을 중심으로 치러지던 의식들이 드물어지면서 궁에 대한 신하와 백성들의 관심도 줄어들게 되었다. 이렇듯 왕실에서 치러지는 의식 의 수가 점차 줄어들자, 왕실 사람들 스스로도 베르사이유 궁에 머무는 시간이 적어졌으며, 특히 마리 앙투아 네트는 루이 16세가 1774년에 그녀에게 선물한 프티 트리아농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베르사이유 궁에서 말을 달려 몇 분 거리에 있는 이 별궁은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부인과 뒤바리 부 인을 위해 지어진 성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곳에서 측근들과 어울리며 베르사이유 궁의 엄격한 예법에 서 벗어난 자연스런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녀는 프티 트리아농에 영화식의 정원을 꾸미고 실제 농장과 가 짜 오두막들로 이루어진 인공 촌락인《왕비의 마을》을 만들어 마치 목동이라도 된 것처럼 생활했다. 또한 작은 극장을 새로 지어 소수의 관객을 초대해 무대 위에서 직접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측근들에게만 호의를 베풀고 있는 동안, 그로부터 소외된 대부분의 궁정 인사들은 그녀의 생활 방식을 헐뜯기 시작했고, 그녀와 측근들은 온갖 비판과 험담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의 사치스러운 소비는 '낭비 부인'이라는 별명을 안겨줬고, 프랑스 태생이 아니라서 프랑스에 대한 애국심이 부족하다고 비판을 받아,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사악한 왕비'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즉 1780년대에는 프랑스의 정치, 경제적인 위기가 심화됨과 동시에 왕실에 대한 비판과 비방이 난무하게 되었 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이른바 <왕비의 목걸이 사건>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기 사건의 주모자는 라모트 부인으로, 그녀는 스트라스부르의 대주교이자 궁정 사제장인 로앙 추기경에게 접근해 왕비를 대신하여 파리의 보석 세공이었던 보메르와 바상주가 만든 엄청난 고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구입하도록 설득했고, 이에 로앙 추기경은 왕비의 환심을 얻으리라 기대하며 목걸이를 구입했다. 그러나 1785년에 추기경이 라모트 부인에게 목걸이를 넘겨주자, 그녀는 목걸이에 있던 다이아몬드들을 팔아버 렸다.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왕비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던 상황에서 벌어진 이 사건으로 인해 왕실의 위신과 신뢰도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Marie Antoinette and Her Children, Marie Therese, Louis Charles(on her lap), and Louis Joseph, 1787 by 엘리자베스 루이 비제 르 브룅(Elisabeth Louise Vigee Le Brun:1755-1842)
    1788년에는 국고가 바닥을 드러내어 파산 직전에 이르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명목의 세금 제도를 도입할 수박에 없었다. 과세 제도의 변경은 프랑스의 세 개 신분 계층인 귀족, 사제 및 제3신분(평민)의 대표로 구성된 삼부회의 승인을 반드시 거쳐야 했기 때문에, 루이 16세는 1789년 5월에 베르사이유에서 삼부회를 소집 하기로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들은 드디어 발언할 기회를 갖게 됐다는 생각으로 희망에 부풀게 되었다. 그 후 몇 주 동안 삼부회에서는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마침내 1789년 6월 17일, 제3신분 대표들과 사제 신분 대표의 일부가 나서서 국민의회 수립을 선언했다. 체제 개혁을 위한 제안을 절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 던 왕과 귀족 대표들에 대항하여 시민 계층이 직접 입법권을 손에 쥐었던 것이다. 바로 그 무렵,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사이에서 1781년에 태어난 맏아들인 왕세자 루이 조제프 자비에 프 랑수아가 세상을 떠나면서 국왕 부처는 정치적인 혼란과 동시에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왕세자의 자리는 1785년에 태어난 그의 동새 루이 샤를이 물려받았다. 그로부터 불과 몇 주 사이에 혁명의 불길 이 더욱 거세어졌다. 삼부회의 대표들은 7월 9일에 제헌의회를 선포했고, 7월 14일에는 절대주의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됨으로써 혁명의 서막을 알렸다. 그때부터 다수의 왕실 인사들과 공작 및 대영주 등의 귀 족들은 베르사이유를 버리고 외국으로 도피했지만, 프랑스에 남아 있던 국왕 부처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 게 되었다. 1789년 10월 6일, 몇 주 전부터 굶주림에 고통 받고 있었던 파리 군중들이 베르사이유 궁으로 몰려 들어가 국왕 일가에게 빵을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결국 그들을 궁 밖으로 끌어냈다. 국왕 일가는 1722년 이래로 사용되지 않고 있던 파리 중심부의 튈르리 궁으로 황급히 피신했고, 그 뒤로 다시는 베르사이유 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당시 새로운 권력의 중심이 되어 있던 의회도 파리로 이전되었다. 혁명의 혼란으로 인해 위협을 늒리고 있던 다른 수많은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국왕 일가 또한 1791년 6월 21일에 국외로 도주를 시도했으나 도중에 발각되어 파리로 압송되었고, 이로 인해 배신자의 낙인이 찍히 루이 16세는 국왕으로서의 권위와 신뢰를 모두 잃어버렸다. 그는 국민의회가 제정한 헌법을 1791년 9월 4일에 수락하였고, 이로 인해 프랑스는 입헌군주제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이 체제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는데, 1792년 8월 10일의 폭동과 시위 군중의 튈르리 궁전 점령 사건을 계기로 1792년 9월 22일에 프랑스 공화정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1792년 8월 13일,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마담 루아얄과 왕세자, 그리고 왕의 누이인 엘리자베스 공주는 탕플 탑에 투옥되었다. 간략한 재판 절차를 거친 뒤 국민공회 의원들의 과반수 찬성으로 루이 16세의 사형이 결정되었고, 1793년 1월 21일에 그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어 그 유해는 공동 묘혈에 버려졌다. 루이 16세의 죽음 이후에 왕당파들은 어린 왕세자를 왕위를 이어받은 루이 17세라 여겼지만, 정작 왕세자는 1795년 6월 9일 감옥 안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그때는 이미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시누이 엘리자베스 공주 또한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고 난 뒤였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녀인 마담 루아얄만이 1795년 오스 트리아에서 억류하고 있던 프랑스인 포로들과 교환되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져 혁명에서 살아 남았다. 그녀는 프랑스에 왕정이 복고되었던 1814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평생 왕정을 지지하며 살다가 1851년에 숨을 거 두었다.
Portrait of Marie-Antoinette, 1770~1774 오스트리아의 대공녀, 마리 앙투아네트 드 로렌 합스부르크 by 왕실 회화 아틀리에의 장 밥티스트 샤르팡티에(Jean-Baptiste Charpentier, 1728-1806)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 대공녀는 베르사이유 궁에서 1770년 5월 16일, 루 이 15세의 손자이며 훗날 루이 16세가 되는 왕세자 루이와 결혼했다. 당시 열네 살에 불과했던 마리 앙투아네 트의 아름다움은 베르사이유 사람들을 금세 매혹시켰고, 수많은 사람들이 루이 15세에게 새로운 왕세자비의 초 상화를 요청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루이 15세는 왕실 회화 아틀리에에 소속된 모사가들에게 마리 앙 투아네트를 그린 초상화 여러 점을 제작하라고 명했다. 왕실 회화 아틀리에는 왕실 일가의 모습을 널리 알리기 위해 초상 작품들을 제작하는 기관이었으며, 왕실에서는 특정 인물의 공적을 치하하거나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할 때 이 아틀리에에서 제작한 초상 작품들을 수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아틀리에의 화가들은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바탕으로 공식 초상화들을 제작했고, 왕세자비 마리 앙투아네트 를 그린 이 타원형 초상화 역시 아마도 왕실 회화 아틀리에 소속의 한 화가가 만든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제작한 화가는 기존의 초상화 작품을 똑같이 복제한 것이 아니라, 1769년에 조제프 뒤크뢰가 비엔나에서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와 1770년에 오스트리아의 화가 요셉 크란틴거가 그린 마리 앙투아 네트의 초상화를 통합하여 새로운 방식의 독창적인 초상화를 창조해냈다. 이 초상화를 통하여, 젊은 마리 앙투 아네트의 우아한 자태와 그녀의 밝게 빛나는 하얀 피부를 찬양해 마지 않았던 당시 사람들의 증언을 그대로 느 낄 수 있다.
Marie-Antoinette in a Court Dress(궁정 대례복을 입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1775 by 장 바티스트 앙드레 고티에 다고티(Jean-Baptiste Andre Gaudier d'Agoty:1740-1786)
    1770년에 프랑스로 와서 왕세자 루이와 결혼한 오스트리아의 대공녀 마리 앙투아네트는 1774년에 루이 15세가 서거한 후 남편이 루이 16세에 즉위하면서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느덧 숙녀갸 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던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에게 자신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 두 점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그리하여 마리 앙투아네트는 1775년에 장 바티스트 고티에 다고티에게 자신의 초상화 한 점을 그려달라고 주문하게 되었다. 이 주문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한 고티에 다고티는 하프를 연주하는 왕 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과슈화로 담아내기도 했다. 실제로 왕비는 고티에 다고티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그릴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해 주곤 했다. 1775년 7월에 완 성된 이 작품은 궁정의 인물들과 왕실 일가가 감상할 수 있도록 베르사이유 궁의《거울의 방》에 전시되었는데, 그것은 가장 가치 있고 중요한 작품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었다. 고티에 다고티는, 중앙의 군주를 중심으 로 그 주변에 왕권을 나타내는 다양한 상징물들을 그려 넣고 배경은 연극 무대와 같은 공간으로 표현했던 이야 생트 리고의 방식을 참고하여 굉장히 호화롭고 화려한 초상화를 만들었다. 작품 속의 왕비는 당당함과 위엄이 느껴지는 드레스와 백합꽃 장식에 담비 털을 덧대어 만든, 왕의 대관식을 연상시키는 망토를 입고 있는데, 이렇듯 화려한 의상으로 인해 공식 초상화의 성격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왕관은 테이블 위에 놓인 쿠션 위에 올려져 있다. 그림의 전경에 놓인 하프와 악보는 그녀의 음악적 재능을 연 상시키는 상징물이다. 배경에 표현되어 있는 미네르바 조각상은 손을 들어 루이 16세의 옆모습을 담은 원형 장 식물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는 왕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관계를 상징하는 표현이며, 지구본 위에 손을 올려 놓은 동작은 그녀의 권력을 강조한 것이다. 고티에 다고티는 이 작품을 통하여 프랑스 궁정의 권력과 부유함을 나타 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초상화는 고티에 다고티의 형제인 한 판화 작가에 의해 판화로 다시 태어났고, 덕분에 이 작품 속에 나타난 왕비의 모습을 널리 보급할 수 있었다. 이처럼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이 작 품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보좌 시녀였던 캉팡 부인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고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모두 격노했다."는 기록을 남겼고, 작품 속의 얼굴이 실제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다지 닮지 않은 데다 표정이 무미건조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난은 다른 인기 작가들이 이처럼 중요한 작품의 의뢰를 받았던 고티에 다고티를 시기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간의 비난에 마음이 쓰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작품을 비엔나에 있는 어머니에게 보내지 않고 슈타 렘베르크 왕자에게 선물했다. 이후 몇 년 동안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공식 초상화로 불릴 만한 작품이 없었 으나, 몇 년 후 궁정화가인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룅에 의하여 왕비의 모습을 담은 적절한 공식 초상화가 제작 되었다.
Louis XVI(1754-93) King of France in Coronation Robes(대관식 복장을 입은 루이 16세), 1777년 이후 by 조제프 시프레드 뒤플레시스(Joseph-Siffred Duplessis:French Painter, 1725~1802)
    1774년에 루이 16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궁전 관리부에서는 조제프 시프레드 뒤플레시스에게 새로운 군주의 공식 초상화를 주문했다. 대량으로 제작된 이 초상화는 베르사이유 궁 바깥에 있는 각 지방 의회와 정부 부처, 대사관 등에 보급되었고, 궁정의 인물들이나 다른 나라의 군주들에게 선물로 전달되기도 했다. 뒤플레시스는 대관식 복장을 갖춘 루이 16세의 초상화를 1776년에 제작하여 1777년에 살롱에 출품한 적이 있지 만, 그 작품은 소실되고 말았다. 베르사이유 궁에서 소장하고 있는 루이 16세의 공식 초상화는 소실된 그 작품 의 복제화로, 원본이 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만들어진 작품이다. 뒤플레시스는 이 초상화의 복제화를 마흔 여섯 점 이상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대부분은 그가 얼굴 부분만 직접 그리고 나머지는 문하생들이 완성했다. 이 작품은 왕에게 신성함을 부여하는 의식이 대관식을 위해 의상을 차려 입은 스물두 살의 루이 16 세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백합꽃 무늬로 장식되어 있는 망토를 입고, 왼손에는 왕권의 상징물 중 하나인 왕홀을 쥐고 잇다. 왕관은 등받이가 없는 낮은 의자에 놓여 있다. 뒤플레시스는 처음이 초상화를 그릴 때 루이 미셀 반 루가 1763년에 그린 루이 15세의 초상화를 기본으로 왕의 얼굴만 바꿔 그렸으나, 그 작품에 만족하지 못했고 1777년 살롱에 출품했던 작품을 토대로 초상화를 다시 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여전히 루 이 미셀 반 루의 영향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뒤플레시스가 창조한 독창적인 이미지 역시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대관식 복장을 한 역대 군주들의 모습을 담은 공식 초상화들의 계보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왕세자 루이 조제프 자비에 프랑수아(Louis Joseph Xavier Francois) 탄생에 대한 우의화, 1783 by 프랑수아 기욤 메나조(Francois Guillaume Menageot:French Painter, 1744-1816)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혼 11년 만에 얻은 첫 왕자의 탄생은 모든 이들이 고대하던 경사였고, 예술가들 은 그의 탄생을 크게 축하하며 이를 소재로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1781년 10월 22일, 왕세자 루이 조제프 자 비에 프랑수아가 태어났고, 3개월 후에 파리 시에서는 왕실의 영속을 지켜 줄 이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대 한 축하연을 열었다. 1월 21일에는 시의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시청 앞에서 불꽃놀이가 벌어졌고 왕실 연회가 그 뒤를 이었으며, 그로부터 이틀 뒤에는 가면 무도회가 열렸다. 뿐만 아니라 파리 시의 간부들은 1782년에 프 랑수아 기욤 메나조에게 왕세자의 탄생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회화 작품을 주문했다. 이 작품은 그림을 주문한 시청 간부들의 모습을 왕세자의 모습과 함께 담아 찬미하고 있는데, 이는 파리 시청 간부들이 왕실을 지지하고 잇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시청에는 시청 간부들을 궁전의 각종 대소사들과 연관지어 그린 단체 초상화가 수없이 많이 장식되어 있었다. 작품 의뢰를 받은 메나조는 우선 데생을 하고 밑그림을 그려 의뢰를 한 시청 간부들에게 보여준 후에 가로 4미터, 세로 2미터 이상이 되는 기념 비적인 캔버스 작품을 완성했는데, 이 완성 작품은 1783년, 루브르의 회화 전시인 살롱에 출품되었다. 이후 파리 시청의 한 넓은 방을 장식하게 되었으나, 혁명 동안에 파괴되고 말았다. 베르사이유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메나조가 1782년에 주문을 받아 만든 대형 회화 작품을 바탕으로 직접 제작한 축소판인 것으로 추정 되는데, 이 작품을 통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원본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짐작해 볼 수가 있다. 백합꽃 무늬로 장식된 푸른 벨벳 망토를 입은 여성의 모습을 통해 우의적으로 표현된 '프랑스'는 왕세자를 시청의 관리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아기를 받들고 잇는 것는 '건강'인데, 이 여성이 건강의 우의적인 표현이라는 것은 그녀의 발치 에 잇는 카두세우스를 통해 알 수 있다. 메르쿠리우스의 지팡이인 카두세우스는 의술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뒤편에는 양날 검을 들고 있는 '정의'와 올리브 나무 가지로 된 관을 쓰고 있는 '평화', 그리고 과 일로 가득 찬 뿔을 손에 들고 있는 '풍요'가 표현되어 있다. 그 뒤쪽에서는 날개가 달린 '승리'가 피라미드 형 태로 된 기념물 위에 왕자의 탄생을 기록하고 있는데, 기념물의 아래쪽에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 상이 담긴 두 개의 원형 장식물이 보인다. 우측에는 이 작품을 주문한 시청의 관리들이 이 광경을 바라보며 서 있고, 그 아래쪽에는 기뻐서 환호를 하고 있는 파리 시민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La reine Marie-Antinete en robe a paniers, 1785년 이후 '로브 아 파니에'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by 엘리자베스 루이 비제 르 브룅(Elisabeth Louise Vigee Le Brun:1755-1842)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에게 보내기 위하여 장 바티스트 앙드레 고티에 다코티에게 주 문해서 제작한 초상화가 왕비의 실물과 닮지 않은 실패작이라는 비난을 듣게 되자, 그녀는 비엔나의 오스트리아 궁정에 있는 어머니를 위하여 또 다른 새로운 초상화를 준비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대형 초상화 제작 작업은 1778년에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 브룅에게 맡겨졌다. 사실 비제 르 브룅은 1776년부터 1277년 사이에 다른 화가들이 그린 왕비의 초상화를 보고 네 점의 모작만을 그려 보았을 뿐, 눈앞에서 왕비를 모델로 하여 초상 화를 제작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런 그녀를 위하여 마리 앙투아네트는 드물게 직접 포즈를 취해 주었다. 이렇게 제작된 초상화 속에서 왕비는 건축물을 배경으로 하여 파니에를 넣은 흰색 공단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 으로 그려졌으며, 왕관은 곁에 있는 쿠션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작품은 왕비의 공식 초상화로 내세우기에 충분히 위엄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으며, 비제 르 브룅은 이 이후로 왕비의 공식 초상화가로 임명되기에 이 르렀다. 실제로 그 초상화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비로소 1779년 2월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 제에게 이 작품을 보낼 수 있었다. 또한 많은 호평을 받았던 그 작품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에게 보내지기 전까 지 당시의 궁정화가들에게 마치 '교본처럼 참고해야 했던 수작으로 여겨졌으며, 실제로 많은 화가들에 의해 모사 되기도 했다. 당시 왕실 일가의 초상화들을 여러 점 복제하여 널리 보급하는 일을 맡았던 왕실 회화 아틀리에의 모사가들은 복제화를 만들 때 이미 제작된 여러 점의 그림으로부터 각각 서로 다른 요소를 취해 접목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면 초상화의 안물이 새로이 포즈를 취하지 않아도 색다른 느낌을 주 는 또 다른 초상화를 만들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가들은 비제 르 브룅이 그린 두 점의 초상화를 바탕 으로하여 지금 이 작품을 창조해 냈는데, 현재 오스트리아에 있는 1778년의 대형 공식 초상화에서는 왕비의 자세 와 복장 등 전체적인 구성을 취했고, 얼굴과 머리 모양은 1785년 당시 콘스탄티노플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슈아죌 구피에 백작을 위해 제작했던 반신 초상화에서 본떠 온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창작 과정을 통해 탄생한 이 초상 화 속의 왕비는 1778년의 초상화와 달리 왼쪽 옆 얼굴이 아닌 오른쪽 옆 얼굴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비제 르 브룅이 1778년에 그린 초상화를 바탕으로 하기는 했어도 7년 뒤인 1785년에 새롭게 제작 한 초상화이므로, 화가들은 얼굴과 머리 모양을 7년 전 모습 그대로 따라 그리지 않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1785년 의 모습에 맞추어 새롭게 표현했다. 왕비의 얼굴은 무척 섬세한 터치로 표현되어 있는 반면, 그 외의 부분을 처리 한 솜씨가 얼굴의 터치와는 차이점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작품은 당시 왕실 회화 아틀리에의 관례대로 여러 명 의 화가가 참여하여 공동으로 제작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La prise de la Bastille(바스티유 감옥의 함락), 1789~1791년경 작자 미상
    이미 몇 년 전부터 프랑스를 위협하던 재정 위기는 1789년에 이르러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해졌다. 이에 루이 16세는 세금을 추가적으로 징수하기 위해, 평민 대표 의원이 포함된 의회인 삼부회를 5월에 소집했다. 하지만 이렇게 소집된 삼부회의 논의에서 특권 계층과 평민 계층 사이에 심각한 의견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고, 분노한 민중들은 봉기를 일으켜 빠르게 권력을 잡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스티유 감옥이 점령 당한 것은 민중들의 분노가 최고조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자 프랑스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다. 결국 3년 뒤인 1792년에 왕정은 폐지되었으며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300년 된 요새로 파리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바스티유 감옥은 왕의 전제적인 권력을 상징하는 건물이었고, 수많은 전설과 소문이 난무하는 공간이었다. 실제로 1785년까지는 죄가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라도 재판 없이 이곳에 투옥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통치를 시작하면서 이 감옥은 점차 사용되지 않게 되었으며, 이에 그는 1789년에 이 감옥을 철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다. 1789년 7월 14일 이른 아침, 무기를 탈취하는 데 성공했으나, 필요한 화약 을 손에 넣지 못해 무기가 무용지물이 된 지경에 처하게 된 군중들은 며칠 전 파리 군사령관이 다량의 화약을 바스티유 감옥으로 이송했다는 소식을 확인하고, 이를 빼앗기 위하여 감옥으로 돌진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한 감옥의 총책임자인 베르나르 르네 드 로네는 군중들에게 발포를 명했으며, 이 과정에 서 백여 명이 사망하게 되었다. 성난 군중들이 감옥의 문 앞으로 대포를 배치하자 겁에 질린 드 로네는 결국 도개교를 내려 감옥의 문을 열어 주었고, 군중들은 안으로 몰려 들어가 감옥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기록에 따르면, 점령 당시 감옥 안에는 미친 사람 두 명을 포함하여 총 일곱 명의 죄수가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 다. 작품 속에서 총책임자 드 로네가 체포되는 모습은 감옥의 도개교 문이 보이는 화면 우측에 그려져 있다. 그는 체포 후 재판을 위하여 시청으로이송되는 과정에서 강하게 저항했으며,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그를 학살한 후 머리를 말뚝에 꽂아 들고 파리 시내를 누비기까지 했다. 그 다음날, 혁명 정부는 바스티유 감옥의 철거를 결 정했으며, 결국 감옥은 1789년 말에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바스티유 감옥 함락 사건은 프랑스 혁명의 아이콘이 되었으며, 전제 정치의 타파와 민중의 승리를 상징하는 이 사건을 찬양하는 대중적인 판화 작품과 노래들이 수없이 많이 생겨났다.
탕플 탑에 유폐된 루이 16세(Louis XVI au Temple), 1795년경 by 앙리 피에르 당루(Henri-Pierre Danloux:French Painter, 1753-1809)
    1792년 8얼의 사건(프랑스 왕권정지 사건:1792년 8월 10일, 루이 16세를 비롯한 왕실 일가가 혁명을 피하여 망명 을 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후 탕플 탑에 유폐된 사건)으로 왕권이 정지되고 왕실이 몰락하면서 혁명군들에게 붙잡힌 루이 16세는 가족과 함께 파리의 오래된 요새인 탕플 탑에 유폐되었다가, 1792년 12월에 재판을 받고 1793년 1월에 사형을 당했다.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으리라는 것을 예감한 그는 1792년 12월 25일 성탄절 날 유언을 작성했다. 12월 11일에 시작된 재판 이래로 가족들을 전혀 만나지 못했던 그는 함께 탕플 탑에 갇혀 있던 아들, 왕세자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아들아! 만약 네가 불행히도 왕이 되어야 하는 운명에 놓인다면,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온 몸을 다 바쳐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저들이 말하는 그 어떤 죄도 저지른 적이 없다." 루이 16세의 유언장을 작성햇던 사람들과 함께 이 유언의 내용은 당시 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왕당파 인사들 사이에 널리 펴저 나갔다. 그리고 앙리 피에르 당루는 이러한 왕의 유언장 을 왕당파적 시각에서 선전하기 위하여 이 작품을 그렸다.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를 피해 1792년에 런던으로 망 명했던 당루는 왕이 1793년 1월 21일에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왕실 일가의 불행을 다룬 연 작을 제작하기로 결심하고, 이미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루이 16세가 유언장을 작성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초상 화를 그렸다. 이 작품 속의 왕은 보잘것 없는 탁자 앞에 있는데, 오른손을 가슴에 얹은 채 슬픈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을 통해, 당시 그가 쓴 유언의 내용이 얼마나 진솔했는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경건했 는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왕에게 쏟아지고 있는 한 줄기 빛은 그가 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상징하고 있으며, 왕의 곁에 두 권의 책을 그려 넣음으로써 작품 속에 종교적인 느낌 또한 담고자 했다. 실제로 당루는 작품 속에 이 책 들의 제목을 적어 놓았는데, 그 중 한 권은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금언과 격언을 담은 신앙 서적인 [그리스도를 본받아]이고, 다른 한 권은 1649년 청교도 혁명 중에 도끼로 참수당한 [영국 왕 찰스 1세의 삶]이다. 다시 말해 당루는 의도적으로 종교적인 이미지들을 선택함으로써, 루이 16세를 순교자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탕플 탑에 유폐된 마리 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 au Temple), 1793 by 알렉산더 쿠샤르스키(Alexandre Kucharski:1741~1819)
    1792년 8월의 사건과 왕정의 몰락 이후 루이 16세를 비롯하여 마리 앙투아넽와 이아들, 그리고 엘리자베스 공주는 탕플 탑에 유폐되었다. 그곳에서 왕실 일가의 구금 환경은 갈수록 열악해져 갔고, 특히 루이 16세의 재판이 시작 된 뒤로 더욱 심해졌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793년 1월 21일에 단두대에 서 처형된 후 상복을 입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녀는 1793년 8월 2일 콩시에르주리 감옥으로 이송될 때까지 탕플 탑에 머물렀으며, 1793년 10월 16일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알렉산더 쿠샤르스키는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 브룅이 망명을 가고 1789년 10월에 왕실 일가가 베르사이유를 떠나 파리로 가게 되었을 당시에 왕비의 초상화가가 되었다. 그는 특히 파스텔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그 작품은 미완으로 남겨 져 있다. 왕비의 재판 기록에 따르면, 쿠샤르스키는 1793년 1월 26일에서 4월 1일 사이에 그녀를 찾아 탕플 탑을 몇 번 방문했으며, 그때마다 그녀의 모습을 크로키나 습작으로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아틀리에에서 탕플 탑에 유폐되어 있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검은색의 상복을 입고 수수하게 단장한 왕비는 당시 사람들의 증언대로 무척이나 의연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림 속의 그녀는 감옥을 연상시키는 갈색 벽을 배경으로 돋보이게 표현되어 있으며, 그림의 바깥에서 자신을 보고 있을 사람을 향해 뚫어질 듯이 시선 을 고정시키고 있다. 이 그림은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쿠샤르스키는 이 그림의 복제화를 여러 점 만들어서 왕정 복고 시대 초기에 그 작품들을 보급했다. 베르사이유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작은 그림은 그때 만들어진 수많은 복 제화 중 한 점으로 추정되며, 당시 왕정의 순교자같은 아이콘이 된 마리앙투아네트를 숭배하는 경향이 세차게 퍼 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793년 1월 20일,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루이 16세, 1793 by 찰스 베나체크(Charles Benazech:English Portrait and Historical Painter, 1767~1794)
    루이 16세는 1792년 8월의 사건 이후에 가족과 함께 파리의 오래된 요생인 탕플 탑에 유폐되었다가, 1792년 12월에 재판을 받고 1793년 1월에 사형을 당했다. 그는 재판이 시작되던 1792년 12월 11일부터 아내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공주, 그리고 아이들인 마담 루아얄 및 왕세자 루이와 떨어져 지내야 했으나, 1793년 1월 21 일 사형 집행일 전날 밤에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시간을 허락 받게 되었다. 탕플 탑에서 왕의 시중을 들었던 클레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왕이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나려 하는 순간 마담 루아얄은 정신을 잃고 왕의 발치에 쓰러졌다."고 적었는데, 찰스 베나체크의 이 작품은 바로 그 순간을 묘사 한 듯하다. 루이 16세를 둘러싼 다른 인물들은 각자 고통스러운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반면,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앉아 있는 인물인 루이 16세는 중압감에 짓눌리고 체념한 듯한 모습으로 유언장을 작성했던 탁자 가까이에서 자신 의 고해 신부인 엣지워스 신부를 바라보고 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하늘에 기도하고 있으 며, 마리 앙투아네트는왕의 뒤에 서서 마치 불행을 몰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팔을 벌려 왕을 지키려는 자세를 취하 고 있다. 베나체크는 이 작품에서 각 인물들의 자세를 통해 실로 비장감이 느꺼지는 장면을 연출했다. 또한 작품의 오른쪽 끝에는 왕을 데려가기 위하여 막 도착한 파리 경찰대원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로 인해 이 마지막 작별 인사의 극적인 긴장감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베나체크는 이 작품을 통하여 처형을 담담하게 받아들이 는 의연한 왕의모습을 표현함으로써, 그를 칭송하고 찬양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종교화의 분위기 역시 분명하게 찾아볼 수가 있다. 중앙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성화의 주제인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를 연상케 한다. 작품 속에 있는 엣지워스 신부가 엘리자베스 공주와 함께 기도를 하고 있느 모습이나 창가에 놓인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 그리고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종교적인 내용의 서적들은 왕의 독실함과 경건함을 더욱 강조해주는 장치들이자 곧 다가올 잔혹한 처형의 흉폭함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작품 속에서 왕의 가족들이 표출하고 있는 슬 픔과 고통은 왕에게 사형선고가 떨어졌을 때 왕의 지지자들이 느꼈을 감정을 화폭에 옮겨 담은 것이며, 왕이 가족 과 국민들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었는지를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베나체크가 밑그림을 그려서 제작한 판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그가 직접 제작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작품에는 서명도 들어있지 않다. 즉, 그는 완성된 회화 작품이 아니라 밑그림만을 제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에 이탈리아의 판화가인 루이지 스 키아보네티는 이 밑그림을 바탕으로 판화를 제작하여 널리 보급하기도 했다.
Louis XVI taken to the Place of Execution January 21, 1793, 1793 단두대로 향하는 루이 16세 by 찰스 베나체크(Charles Benazech:English Portrait and Historical Painter, 1767~1794)
    혁명주의자들로부터 사형을 선고 받은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21일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단두대가 설치된 장소는 예전에 왕들이 머물던 파리의 왕실 거처, 튈르리 궁 맞은 편의 카루젤 광장이었다. 이 작품에는 애수나 비애감이 아닌, 오직 죽음만이 표현되어 잇다. 왼쪽 아래에서부터 오른쪽 위로 이어져 있는 사선 구도은 단두대를 향해 상승하는 듯한 움직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새하얀 셔츠를 입고 있는 왕의 모습은 어두운 색조의 옷을 입고 있는 주변 다른 인물들과 뚜렷한 대비를 이루며 두드러져 보인다. 땅을 향해 뻗고 있는 파리나 뒤를 향한 시선을 통해 그가 단두대를 향해 어려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왕의 고해 신부였던 엣지워스 드 피르몽 신부의 말에 따르면, 루이 16세는 이 순간 "나는 죄 없이 죽는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가 처형의 순간에 보인 귀감이 될만큼 의연한 행동들, 그리고 그가 남긴 이 말을 왕당파 사람들은 후에 판화 탁본으로 제작하여 영국 내에 널리 보급하기도 했다. 왕의 왼쪽에는 그의 고해 신부인 엣지 워스 신부가 왕과 반대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는 왼손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단두대와 그 너머의 하늘을 가리키며 왕에게 "성루이의 아들이여, 하늘로 오르십시요"라고 말하고 있다. 작품의 오른쪽에는 유명한 혁명대 대장인 상테르(Santerrd:1752~1809)가 말을 탄 채로 호송대를 지휘하고 있다. 당시 그는 사형 집행인 이 단두대의 날을 준비하는 동안 루이 16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호송대 로 하여금 계속해서 북을 치도록 했다고 한다. 루이 16세의 머리 뒤쪽 후경에는 파란색과 흰색, 붉은색이 가로로 길게 칠해져 있는 국민군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데, 이는 새로운 세력이 왕정을 대신하게 되었음을 상징한다. 전경의 주요 인물들은 명확하게 그려져 있는 반면, 병사들과 함께 후경에 모여 있는 민중들은 흐릿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베나체크는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는 루이 16세>에서처럼 이 작품에서도 혁명의 주체인 민중들의 모습은 흐릿하게 처리한 채 병사들에 의해 사형장으로 내몰리는 왕의 모습을 경건하고 담담하게 표현함으로써, 루이 16 세를 왕당파의 순교자적 아이콘으로 묘사했다. 이 작품은 베나체크가 직접 제작했다기보다는 그가 그린 밑그림으 로 만든 판화 작품들 중 하나를 바탕으로 하여 제작된 그림으로 추정된다.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루이 16세> 와 더불어 이 작품을 통해 베나체크가 그린 두 점의 밑그림이 판화로 제작되어 많이 보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Louise Marie Josephine of Savoy, Countess of Provence, 1775 마리 조제핀 루이즈 드 사부아, 프로방스 백작부인(1753~1810) by 장 바티스트 앙드레 고티에 다고티(Jean-Baptiste Andre Gaudier d'Agoty:1740-1786)
    1775년 마리 앙투아네트의 대형 초상화를 야심차게 제작했던 장 바티스트 앙드레 고티에 다고티는 왕비와의 친분 덕분에 같은 해에 왕비의 동서들인 프로방스 백작부인과 아르투아 백작부인을 모델로 한 작은 초상화 두 점의 제작 역시 의뢰 받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왕실의 가족들이 개인적으로 소유하기 위하여 제작하는 초상화는 화 가가 왕실과의 친분이 없으면 거의 맡을 수 없었던 의뢰였던 것이다. 마리 조제핀 드 사부아와 마리 테레즈 드 사르데뉴 자매는 사르데냐 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1726~1796)와 스페인의 공주 마리아 안토니에 타 데 보르 본(1729~1785)의 딸로 태어나, 각각 루이 16세의 두 동생과 결혼했다. 마리 조제핀은 1771년에 훗날 루이 16세 가 되는 루이 오귀스트의 바로 손아래 동생인 루이 스타니슬라스 자비에와 결혼하여 프로방스 백작부인이 되었 고, 그녀의 여동생인 마리 테레즈는 1775년에 루이 16세의 막내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 샤를 필립과 결혼했다. 각각의 초상화 배경은 고티에 다고티가 상상하여 표현한 궁의 모습이다. 그 속에서 두 여인은 아름다운 의복과 장신구로 치장한 채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는 고풍스럽고 화려한 소품들이 그려져 있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프로방스 백작부인은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남편의 흉상을 가리키고 있다. 그녀의 뒤에 있는, 나무로 세공한 두 마리의 비둘기 장식은 그들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프로방스 백작 부부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남편인 프로방스 백작의 흉상 바로 뒤 쪽 벽에는 프로방스 백작부인의 아버지인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초상화가 걸려 있으며, 이를 통해 이들이 혈연 관계에 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프와 만돌린, 그리고 악보는 그녀의 음악적인 재능을 암시하는 상 징이며 꽃병 뒤에 있는 혼천의는 그녀가 과학에 관심이 많았음을 나타낸다.
Marie-Therese de Savoie(마리 테레즈 드 사부아, 아르투아 백작부인,1756~1805), 1775 by 장 바티스트 앙드레 고티에 다고티(Jean-Baptiste Andre Gaudier d'Agoty:1740-1786)
    푸른 옷을 입은 아르투아 공작부인의 초상화는 언니인 프로방스 백작부인의 초상화와 쌍을 이루는 작품이다. 작품의 우측에는 어머니인 마리아 안토니에타 데 보르본의 그림이, 그리고 그 위쪽으로는 남편인 아르투아 백작 의 흉상이 그려져 있다. 좌측의 안락의자 위를 보면, 어린 아이를 표현한 판화 한 장이 놓여 있다. 이 탁본은 아르투아 백작부인의 소유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초상화를 만든 해인 1775년 8월 6일에 아르투아 백작 부부의 첫 아들로 태어난 앙굴렘 공작을 암시하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베르사이유 궁에는 고티에 다고티가 초상화 속에 그려 넣은 이 판화의 실제 작품이 지금도 소장되어 있다.
Madame Elisabeth de France(루이 16세의 여동생 엘리자베스 공주:1764~1794), 1782~1783 by 엘리자베스 루이 비제 르 브룅(Elisabeth Louise Vigee Le Brun:1755-1842)
    1764년에 태어난 엘리자베스 공주는 루이 15세의 아들인 루이 페르디낭 왕세자와 마리 조제프 드 삭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 중 막내이자 루이 16세의 막내 동생이다. 그녀는 겨우 세살밖에 안 되었을 때 부모를 잃었다. 하지만 독실한 신앙심과 자비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를 오빠인 루이 16세는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으며, 결혼을 하지 않고 계속 베르사이유 궁에 남아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 아네트, 그리고 그 아이들이 죽는 날까지 그들의 곁을 지켜주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후, 1792년 왕의 일가 가 감옥에 유폐되었을 때에도 그들과함께 했으며, 국왕 부처가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았을 때에도 그들의 장녀인 마담 루아얄의 곁에 머물려 그녀를 위로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도 1794년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베르사이유 궁에 도착했을 때부터 자기보다 10살 가까이 아래인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호감을 느끼고 각별히 대했다. 1782년에는 자신의 공식 초상화가인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 브룅에게 직접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하기도 했다. 그 작품은 현재 사라지고 없지만, 1782년과 1783년에 제작된 여러 점의 복제화를 통해 그 원작 역시 잘 알려져 있다. 베르사이유 궁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 역시 소실된 원작을 바 탕으로 제작된 복제화 중 한 점으로, 열여덟 살 난 엘리자베스 공주는 이 작품 속에서 야생화와 밀 이삭으로 장 식된 밀짚모자를 쓴 아름다운 목동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비제 르 브룅은 자신의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 는 그녀의 싱그러움과 상냥함에 매혹되었던 당시를 추억하며 자신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그녀는 선량함으로 가득한 천사였다. 나는 그녀가 불쌍한 자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았다. 너그러움, 겸손함, 예민한 감수성, 헌신... 이 모든 미덕을 그녀는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이 초상화에 담긴 전원적인 모습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엘리자베스 공주가 프티 트리아농에서 보낸 나날들을 연 상할 수 있도록 해 준다. 프티 트리아농은 베르사이유 궁에서 마차로 몇 분 정도 떨어진 거리의 정원 안에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작은 별궁이었으며, 그곳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베르사이유 궁에서 보다 훨씬 자유롭게 생 활했다. 또한 그녀는 1783년에서 1785년 사이에 오두막집이 한 채 있는 마을을 인공적으로 조성하도록 했는데, 이것은《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을》로 현재 알려져 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프티 트리아농의 다락방을 꾸며 그 곳에서 지내기도 했다.
'마담 루아얄'이라고 불린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드 프랑스(1778~1851)와 그녀의 남동생인 왕세자 루이 조제프 자비에 프랑수아(1781~1789), 1783 by 엘리자베스 루이 비제 르 브룅(Elisabeth Louise Vigee Le Brun:1755-1842)
    왕실 여성 중 왕비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지위인 '마담 루아얄'의 호칭을 수여 받은 마리 테레즈와 왕세자 루이 조제프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사이에서 각각 1778년과 1781년에 태어났다. 특히 왕세자의 탄생은 모든 이들이 기다려 마지 않은 일이었다. 왕실이 영속하기 위해서는 왕위를 이를 남자아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 브룅이 그린 이 초상화는 마리 테레즈와 루이 조제프의 여섯 살과 세 살 때 모습을 담고 있으며, 이들의 어머니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시 총애하던 초상화가인 비제 르 브룅에게 직접 주문한 것 으로 추정된다. 비제 르 브룅은 이 작품을 위하여 프랑수아 위베르 두루에가 1760년대에 루이 15세의 두 손자 아르투아 백작과 클로틸드 공주의 초상화를 그릴 때 사용했던 형식을 차용하여, 초상화의 배경을 자연 풍경으 로 처리했다. 이 작품에서 마리 테레즈와 루이 조제프는 궁정 의상을 입고 있으며, 그 중 루이 조제프는 당시 프랑스 왕정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기사단이었던 '성령 기사단'의 십자가와 리본도 달고 있다. 프랑스 왕의 아들로 태어나는 아이는 실제로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령 기사단의 십자가를 부여 받았기 때문 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두 인물이 공식 초상화의 느낌이 드는 궁정 의상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외의 푸르른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분위기가 전원적이다. 자칫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요소들이 자연이라는 배경으로 인해 완화된 느낌이며, 유년기의 이미지와 자연의 이미지가 적절하게 조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리 테레즈는 마치 남동생을 보호하려는 듯 한 손을 그의 어깨 위에 올리고 있고, 그에게 따뜻한 눈 길을 보내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기 새가 여러 마리 든 새집이 놓여 있는데, 이는 어린 시절을 뜻하는 상징물로서, 작품 속 두 사람이 유년임을 상기시키는 장치이다. 이 작품 루브르의 회화 전시회였던 17854년의 살롱에 출품되었고, 그곳에서 비평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같은 해, 궁전 관리부에서는 비제 르 브룅에게 왕비의 이미지를 좋게 선전하기 위한 홍보용 작품으로 왕비와 아이들을 모델로 한 대형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주문했는데, 그녀는 이를 위하여 이전의 작품보다 훨씬 더 공식 적인 성격을 가진 초상화를 그렸으며, 이 작품은 그 뒤 1787년의 살롱에 출품되었다. 마담 루아얄은 루이 16세 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네 아이들 중 어려서 죽지 않고 성인이 된 유일한 자식이었으며, 1852년 74세의 나이로 망명 중에 죽음을 맞았다. 영리하고 다정했지만 몸이 허약했던 그녀의 남동생 루이 조제프는 1789년에 구루병으 로 세상을 등졌다.
1785년, 프티 트리아농의 <에로스의 시전> 근처의 마리 앙투아네트와 마담 루아얄, 그리고 왕세자, 1868 by 외젠 바타이유(Eugene Battaille:1817~1875)
    스웨덴의 왕 구스카브 3세가 개인적으로 파리를 방문하여 머물던 당시인 1784년 7월 31일에 왕립 회화·조각 아 카데미에 가입하게 된 아돌프 율리크 베르트뮐러는 궁전 관리부로부터 마리 앙투아네트의 대형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당시에는 왕비에 대한 여론이 상당히 좋지 않았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위압적이지 않고 오히려 인간적인 느낌이 강한 초상화를 제작함으로써, 왕비 역시 한 가정의 따뜻한 어머니라는 새로운 이미지 를 사람들에게 심어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새로운 공식 초상화를 스웨덴 출신의 화가인 베르크뮐러 에게 의뢰함으로써, 당시 파리에 머물고 있던 스웨덴 왕을 기쁘게 하려는 의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작품은 그 이듬해 살롱이 열리기 전날 완성되어, 관례대로 공식 초상화가 놓이는 가장 좋은 자리에 전시되 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모두 제각각의 평가를 내렸을뿐만 아니라, 왕비 본인조차도 "어떻 게 이것이 나란 말인가?"라며 소리를 질렀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궁정과 파리의 관습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 던 베르트뮐러가 주제와 목적에 맞지 않는 '부적절한' 초상화를 그려냈다고 평가했다. 다시 말하면, 대례복을 입고 있는 왕비의 모습이 있어야 하는 공식 초상화 속에 거의 평민과 같은 차림을 한 평범한 여성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결국 베르크뮐러는 살롱이 끝난 뒤 이 작품을 정성 들여 수정해야 햇으며, 파리 주재 스웨덴 대사인 스타엘 홀슈타인 남작을 통해 1786년에 스톡홀름에 있는 스웨 덴 왕 구스타브 3세에게 이 작품을 선물로 전달했다. 스웨덴의 왕실 소장품이 된 이 초상화는 이후 스웨덴 국 립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1867년 베르사이유에 머물렀던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인 외제니 황후는 외젠 바타이유 에게 베르트뮐러의 초상화를 토대로 지금 전시되어 있는 이 복제화를 제작할 것을 주문했으며, 바타이유는 이 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렇게 복제된 작품은 당시 파리에서 열렸던 만국박람회와는 별개 로 프티 트리아농에서 개최된 <마리 앙투아네트 회고전>에 전시되었고, 그 후 프티 트리아농의 식당에 자리하 게 되었다.
<타피 베르>의 초입에서 바라본 벌목 공사 중인 베르사이유 궁의 정원, 1775~1777 by 위베르 로베르(Hubert Robert:French Rococo Era Painter, 1733-1808)
    루이 14세가 통치 시절에 베르사이유 정원에 심었던 나무들이 1775년이 되어 말라 죽기 시작하자, 루이 16세는 이 나무들을 모조리 뽑아내고 전부 다시 심을 것을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궁정 간부들은 곧바로 이를 실행하 였으며, 심지어 작은 정원에 있는 나무들까지 모두 뽑아낸 후 새로 심는 작업을 시작했다. 루이 16세는 이러한 작업의 모습을 위베르 로베르에게 두 점의 작품 속에 담아 기록할 것을 명령했으며, 이에 그는 서로 크기와 비율이 동일하고 쌍을 이루는 작품을 두 점 만들었다. 이 두 작품은 177년에 루브르의 회화· 조각 전시회인 살롱에 출품되었다. 폐허가 된 시적인 풍경을 주로 그렸던 로베르는 이 작품들을 통해 작업 현 장의 활기를 보여주는 기록적인 장면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한 풍경으로 선보였다. 이 작품은《타피베르》가 시작되는 위쪽 지점에서 본 광경을 표현한 것으로, 완만하게 경사가 진 잔디의 끝은 저 멀리에서 마치 거울처럼 보이는《그랑카날》, 즉 대운하와 만나고 있다. 왼쪽에는 건축가 쥘 아르두앵 망 사르가 1685년에 만든 아치의 주랑이 자리하고 있고 오른쪽에는《돔의 숲》의 황금 정자가 보이는데, 이 또한 쥘 아르두앵 망사르가 1677년에 세운 건축물이다. 이 황금 정자는 1820년에 철거되었다. 전경의 좌측에는 제우스와 레다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 <카스토르와 폴록스> 군상이 그려져 있으며, 우 측에는 피에르 퓌세의 유명한 족각상 <크로토나의 밀로>가 대칭적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로베르가 묘사한 작 업 현장에는 잘린 나무들과 조각상들 사이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데, 왼쪽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루이 16세와 함께 산책하고 있는 모습도 담겨 있다. 이 작품과 쌍을 이루는 또 다른 작품에는 1764년부터 1772년까지 토마스 르뇨댕과 프랑수아 지르 로베르가 설계하여 조성한《아폴론의 숲》을 재정비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그 작품은 베르사이유 궁의 작은 정원에서 진행된 재정비 공사를 시적인 정취로 기록한 그림으로, 잘려 있는 나무들이 풍기는 우울한 느낌과 그림 속에 그려진 사람들의 활기 있는 움직임이 좋은 균형을 이루 고 있다.
베르사이유 궁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그리는 고티에 다고티, 1775 by 장 바티스트 앙드레 고티에 다고티(Jean-Baptiste Andre Gaudier d'Agoty:1740-1786)
    1775년에 마리 앙투아네트를 모델로 한 호화로운 대형 초상화를 의뢰받은 것응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겼던 장 바 티스트 앙드레 고티에 다고티는 화장대 앞에서 포즈를 취해주고 있는 왕비와 그녀를 화폭에 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작품을 그렸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렸던 대형 초상화는 혹평을 받게 되었 고, 왕비는 다른 초상화가인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룅을 고용하여 의도에 맞는 적절한 공식 초상화를 별도로 제작하도록 해야 했다. 이 작품 속에서 고티에 다고티는 비록 뒷모습이기는 하지만 전경 우측에 표현되어 있 다. 궁 안에 들어갈 때 남자들이 반드시 소지해야만 했던 칼은 옆에 두고 손에 팔레트를 쥔 그는 주문받은 대형 초상화의 밑그림을 분필로 그려둔 캔버스를 마주하고 앉아 있다. 캔버스의 모양이 사각형이 아닌 타원 형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그 대형 초상화임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왕비는 방 한가운데에서 화장대 앞에 앉아 있다. 수놓인 모슬린 천과 레이스로 덮여 있는 화장대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시종들이 왕비를 위하여 내실인《알코브》에서 꺼내 가져다 놓았던 것이다. 화장대 위에 놓인 금 도금한 은으로 된 거울은 루이 16세 의 어머니인 마리 조제프 드 삭스 왕세자비가 사용하던 것이다. 창 사이의 장식 거울 위에는 마리 앙투아네 트의 오빠인 요제프 2세의 초상을 담은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는데, 이는 현재 사라지고 없다. 우측 안쪽 깊숙이에는 왕비의 보석함이 놓여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작품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음악 교사와 미용사, 그리고 시녀들에 둘러싸여 하프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 싼 인물들 중 한 명이 새롭게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고티에 다고티를 '왕비의 화가'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올리고 있다. 실제로 그림 속의 청원서에는 "왕비 마마, 왕비 마마의 모습을 그림 속에 담아 여러 점의 초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영광을 얻은 J.B.G. 다고티가, '왕비의 화가'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기를 겸허하게 청하옵니다."라고 적혀 있다. 실제로 고티에 다고티는 작품 속에 이와 같은 서신을 그려 넣 음으로써 우회적으로 '왕비의 화가'라는 칭호를 요청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고티에 다고티의 의도 외에도 궁정 생활 중에서 기상 의식이 끝난 후에 왕비가 어떤 활동을 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기록 작품이기도 하다.
1781년, 프티 트리아농의 <벨베데르 음악당>에 밝혀진 조명, 1781 by 클로드 루이 샤틀레(Claude-Louis Chatelet:1734~1795)
    프티 트리아농은 원래 퐁파두르 부인을 위해 지어졌으나 그녀는 공사가 끝나기 전에 죽음을 맞았고, 그 후 루이 15세가 정부인 뒤바리 부인에게 주었던 별궁이다. 이 별궁은 베르사이유 궁에서 말을 타고 몇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며, 정원 내의 그랑 트리아농과도 멀지 않다. 루이 16세는 1774년에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별궁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주었고, 그녀는 궁정에서 벗어난 이곳에셔 보다 소박하고 자연에 가까 운 삶을 영위하며 지내기를 즐겼다. 그런 까닭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1775년부터 풍경화가인 위베르 로베르와 건축가 리사르 미크로 하여금 이 작은 성을 둘러싼 정원의 모양을 바꾸도록 했고, 이 두 사람은 소위 앵글로 차이니즈, 즉 '영화식'이라고 하는 새로운 취향에 맞추어 정원을 재단장했다. 이 정원은 인위적으로 손질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목이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내도록 조성되어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또한 클로드 루이 샤틀레에게 프티 트리아농의 전경을 그려 모음집을 만들어 줄 것을 주문 하여 이를 손님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샤틀레는 프티 트리아농의 곳곳을 자주 방문하여《벨 베데르 음악당》이나《에로스 신전》 등을 화폭에 담아내기도 했고,왕비가 정원에서 열었던 밤의 연회에 참석 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샤틀레가 작품의 아래쪽에 적어 넣은 연도인 1781년에는 프티 트리아농의 정원에 조명이 밝혀진 일이 두 번 있었다. 그 첫 번째는 7월 26일로, 왕의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린 날이었다. 두 번째로 조명이 밝혀진 것은 바로 그 다음 주인 8월 1일이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 이자 당시 팔렌슈타인 백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신분을 감추고 여행을 다니던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제프 2세가 베르사이유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요제프 2세를 환영하기 위하여 트 리아농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극장에서 글루크의 오페라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공연하도록 했으 며, 공연 중에 정원 전체에 조명을 밝히도록 했다. 이 조명은 초목들 사이 여기저기에 불항아리들을 숨겨 두 거나 조그마한 구덩이를 여러 개 파서 나뭇단을 넣어 둔 다음에 불을 붙여 연출한 것이었는데, 밤에 불을 환 하게 밝혀 연출한 이 인상적인 광경을 즐기는 특권을 누린 것은 실제로 궁정 인사들 중에서 일부뿐이었다. 샤틀레는 이 작품을 위하여 1777년에 지어진《벨베데르 음악당》을 주요 모티프로 삼았다. 정자 쪽에서 보았 을 때 이 인공 호수의 반대편, 즉 그림의 전경을 보면 사람들이 그림의 바깥을 향해 등을 돌리고 정자와 호 수에 불이 밝혀진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샤틀레는 이러한 기법을 통해 그림에 원근감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 라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연회에 참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연출했다. 샤틀레는 밤의 연회와 조명이 밝혀져 있는 장면들을 전문적으로 그렸으며, 전·중·후경을 여러 겹으로 구성 해 순차적으로 겹치게 하여 원근감을 주는 이와 같은 표현 기법을 자주 사용하였다.
말을 타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1783 by 루이 오귀스트 브룅, 일명 브룅 드 베르수아(Louise-Auguste Brun, Brun de Versoix:1758~1813)
    1770년에 베르사이유에 도착한 어린 왕세자비이자 훗날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승마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그녀는 말을 타고 긴 산책을 즐기기도 했고, 또 왕실에서 주최하는 사슴이나 멧돼지 사냥에 따라 나서기도 했다. 그녀는 당시에 여성들에게 일반적으로 권장되었던 방식대로 두 다리를 한쪽으로 모아 걸터앉던 방식대로 두 다 리를 한쪽으로 모아 걸터앉아 말을 타기도 했지만, 남자들처럼 두 다리를 양쪽으로 나누어 내리고 앉아 말은 타는 일도 많았다.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딸과 정기적으로 주고 받던 서신을 통하여 일찍부 터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런 말타는 습관을 우려했다. "내가 생각컨데 분명 너는 남자처럼 말을 타고 다니고 있겠지. 그런 방식으로 말을 타고 다니면 아이를 갖는데 위험하고, 또 좋지도 않단다. 네가 프랑스로 시집 간 것은 후계자를 낳기 위해서이며, 아이를 낳아야만 너의 행복을 견고하게 만들 수가 있을 것이다. 네가 나나 다른 여인들처럼 다소곳하게 말을 타면 나에게서 이런 잔 소리를 듣지 않을텐데 말이다. 사고란 것은 예고를 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야. 포르투갈의 왕비를 비롯해서 다른 많은 부인들도 말을 타다 사고를 당한 뒤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니." 사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상기시켜 주었던 것처럼, 마리 앙투아네트의 첫 번째 의무는 바로 프랑스 왕실에 왕위 계승자를 낳아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녀의 말 타는 습관 때문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사이에서는 그들이 결혼하고 8년이 지난 뒤인 1778년이 되어서야 첫 아이가 태어났다. 작품 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바지를 입고 손에는 채찍을 쥔 채 격렬하게 말을 몰고 있으며 그 뒤로는 사냥개 들이 뒤따르고 있는데, 왕비를 이런 모습으로 표헌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안장을 덮고 있는 표범 가죽은 이 초상화에 이국적이고 장식적인 느낌을 부여해 주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브룅 드 베스 수아의 작품들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에 왕실 사람들이나 친척들에게 선물하거나 서로 교환하기 위하여 브룅에게 직접 이와 같은 초상화를 자주 의뢰했다. 이 작품 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가 갖는 공식적이고 다소곳한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베르사이유 궁에는 브룅이 그린 말을 탄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가 한 점 더 소장되어 있는데, 그 작품에는 드레스를 입고 양 다리를 한쪽으로 내린 다소곳한 모습이 담겨 있다.
사냥복을 입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1788 by 아돌프 율리크 베르트뮐러(Adolf Ulrich Wertmuller:Swedish Painter, 1751-1811)
    1784년에 스웨덴의 왕 구스타브 3세가 베르사이유를 방문했을 때, 궁전 관리부에서는 스웨덴 출신의 화가인 아 돌프 율리크 베르크뮐러에게 마리 앙투아네트와 아이들, 즉 당시 여섯 살이던 마담 루아얄과 세 살이던 왕세자 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를 한 점 제작하도록 했다. 베르크뮐러는 같은 해인 1784년에 프랑스에서 일하는 예술가 들의 공식 협회라고 할 수 있는 왕립 회화·조각 아카테미의 회원으로 가입했다. 궁전 관리부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대형 초상화는 1785년에 루브르의 회화 및 조각 전시회인 살롱에 출품되었는데, 그 작품을 본 마리 앙 투아네트는 그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림을 실물과 닮게 그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 겼는데, 이 작품 속의 그녀는 실물과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베르트뮐러는 이 초상화를 다 시 손질해야만 했으나, 왕비에게 다시 포즈를 취해달라는 요청을 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 고 그 작품은 1786년에 파리 주재 스웨덴 대사에게 전해졌으며, 그 후 스웨덴 왕에게 선물로 보내졌다. 이 대형 초상화가 실패작으로 여겨진 후, 근 2년 동안 궁정으로부터 공식 초상화 의뢰를 받지 못하게 된 베르 트뮐러는 1788년, 이전 초상화 속 왕비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여 얼굴의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초상화를 그렸는 데, 이는 아마도 궁정 인사들로부터 다시금 인기를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반신 초상으로 그려진 이 작품은 그 크기가 작을 뿐만 아니라 왕비가 드레스가 아닌 사냥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여서 공식 초상화라기보다는 사 적인 목적으로 만든 초상화인 듯한 느낌을 준다. 사실상 이 초상화를 통해 초상화가로서의 일지를 회복하고자 했던 베르트뮐러는 이 초상화의 축소판을 여러 점 제작하여 왕비의 측근들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이 작품 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고개를 가볍게 뒤로 젖힌 채로 관람객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짓고 있으며, 역 동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음에 드는 그림 을 제작하려 했으면서도 지나치게 튀어나온 턱과 돌출한 눈, 살짝 크다 싶은 코와 툭 튀어나온 이마 등 당시 사람들이 지적했던 그녀의 신체적 결함을 숨기지 않고 그림 속에 표현해 넣었다.
프티 트리아농 궁에 있는 <왕비의 극장> 내부, 1838 Versailles ; musee national des chateaux de Versailles et de Trianon by 앙투아네트 아셀리노(Antoinette Asselineau:1811~1841)
    프티 트리아농에 있는《왕비의 극장》은 1780년에 리샤르 미크가 건축한 공간으로, 왕실 일가나 그 주변 사람 들이 직접 작은 연극과 같은 공연을 주최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 극장은 1770년 훗날 루이 16세가 되는 왕세자와 오스트리아 로렌-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 앙투아네트 대공 녀의 결혼 피로연과 함께 개관되었던 베르사이유 궁의 왕립 오페라의 형태와 장식을 본 따 만들었으나 크기는 그보다 훨씬 작다. 당시 극장 벽면은 회화 작품들 및 푸른색, 금색의 천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널찍한 천장은 <아폴론과 뮤즈 그리고 삼미신>의 모습이 표현된 장 자크 라그르네의 작품으로 꾸며져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최 측근 인사들만을 이곳에 초대했으며, 시동생과 동서들, 즉 프로방스 백작과 아 르투아 백작 부처나 친구들과 함께 직접 연기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이곳에서의 유희는 왕비의 지극히 철저한 사생활이었지만, 특정한 사람들만 초청되었던 탓에 이곳에 초대 받지 못해 불만을 가진 사람들 은 이곳에서의 왕비의 생활에 대한 왜곡된 소문을 퍼트려 좋지 않은 환상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으며, 결국 이것이 프랑스 혁명 시기에 가서는 큰 차별을 받아야 할 범죄인 것처럼 부풀러지게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에 의해 한 차례 복원되기도 했던 이 극장은 1836년 루이 필립 왕에 의해 또 한 번 새롭게 복원 되었는데, 이는 루이 필립 자신이 그랑 트리아농에 머무는 동안 가족들에게 극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 해서였다. 그는 원래 극장을 장식하고 있던 회화 작품들 및 푸른색과 금색의 천을 모두 없애고 당시의 미적 기준에 부합하는 붉은색 및 금색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장식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복원 공사를 맡았던 건축 가 프레데릭 넵뵈는 극장의 조명으로 사용되었던 카셀 램프에서 발생하는 가스가 외부로 배출될 수 있도록 하 기 위해 천장 한가운데를 뚫으려고도 생각했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않은 덕분에 라그르네의 작품은 훼손 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20세기에 들어 원래의 색상들로 재복원된 이 극장을 통해, 궁정 생활의 숨막히는 예의범절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느끼고자 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바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프티 트리아농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을》에 있는 방앗간(La moulin du hameau du Petit Tranon) by 샤를 장 게라르 아틀리에(Atelier de Charles-Jean Guerard:1790~1834)
    1809년 첫 번째 부인인 조제핀 황후와 이혼한 이후, 이듬해인 1810년에 오스트리아의 대공녀 마리 루이즈와 다시 결혼한 나폴레옹은 베르사이유 궁의 별궁인 그랑 트리아농과 프티 트리아농이 있는 구역을 마리 루이즈와 가족 들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폐쇄하였다. 따라서《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을》에 있는 풍차 앞을 거닐고 있는 일반 인들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왕정복고시대 초기인 1815년부터 1820년경 사이, 즉 왕실 사람들이 더 이상 베 르사이유 궁에 머물지 않게 되어 트리아농 구역이 일반에 다시 공개되기 시작한 때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완성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려 실제로 그녀는 거의 이용하지 못 했던《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을》 내의 건축물들은 워낙 약해서 완성 이후에도 지속적인 유지 보수가 필요할 정도였으며, 이후 혁명 정부의 관료들은 이를 피하기 위하여 몇 차례의 공사를 통해 건축물의 내구성을 강화 시켰다. 지금 이 작품에는 공사 이후 보수된 방앗간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인내심를 갖고 오랜 시간을 들여 현 재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한 후에도 꾸준한 복원 작업과 정원 관리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트리아농 구역 구 체제 말, 자연으로 회귀하여 평온한 삶을 즐기고자 했던 왕실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장소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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