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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gallery

프랑스 국립 베르사이유 특별전 (1)

작성자은보|작성시간19.12.08|조회수506 목록 댓글 0



The Exhibition of Chateau de
Versailles
From Louis XIV To Marie Antoinette


    >> 전 시 개 요 전 시 명: 프랑스 국립 베르사이유 특별전 <베르사이유의 영광 - 루이 14세부터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The Exhibition of Chateau de Versailles - From Louis XIV to Marie Antoinette 전시기간: 2010년 11월 5일 ~ 2011년 3월 6일 전시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전시실 전시작품: (1) 프랑스 국립 베르사이유 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급 회화 작품 및 유물 등 총 84점 전시 (2) 프랑스 절대 왕정의 전성기인 루이 14세부터 루이 16세에 이르기까지 근 200여 년의 시간을 아우 르는 화려하고 세련된 왕실 문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줄 작품들로 구성 (3) 베르사이유의 대표적인 안주인,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로 더욱 친숙한 '마리 앙투아네트 왕 비'의 공식 초상화를 비롯한 그녀의 모습을 담은 회화 작품 및 그녀가 직접 사용하던 유물 대거 전시
    >> 전시 의의 1. 프랑스 국보급 회화 작품과 유물의 한국 최초 전시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회화 및 조각, 그리고 왕실 유물 등을 포함한 84점의 작품들은 루이 14세 집권 시기에서 부터 루이 16세를 거쳐 프랑스 혁명기에 이르기까지 베르사이유 궁에 머물렀던 프랑스 왕실 일가의 국보급 유물 이다. 특히 프랑스 왕실의 유물들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많은 양이 유실되어 그 희소성 면에서도 단연 독보 적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이번 한국 전시를 위하여 프랑스 정부와 베르사이유 궁에서는 최고의 회화 작품 및 조각, 유물 등을 직접 선정하여 84점의 전시 작품을 구성하였으며, 아시아 최초로 최대 규모의 프랑스 왕실 문화 를 소개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2. 프랑스 옛 왕실의 중심지였던 '베르사이유'가 한국 '조선 왕조'의 수도인 서울에서 조우하다! 프랑스 전 문화통신부 장관이자, 현재 국립 베르사이유 궁 대표를 맡고 있는 장 자크아야공(Jean-Jacques Ailla- gon)은 이번 한국 전시 개최를 결정하면서,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정' 역사와 한국의 역사가 서로 닮은 점이 많 다고 언급했다. 10세기경 한국에서는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으며,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 는 카페 왕조가 나라를 통일했었다. 또한 베르사이유 통치 시기를 대표하는 '태양왕' 루이 14세는 조선 왕조의 세 종 대왕에 필적할 만한 정치적, 문화적 부흥기를 프랑스에 가져왔다. 프랑스의 왕실 문화를 대표하는 '베르사이유' 가 서울에서 소개된다는 점은 그 역사적인 유사성에서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역사를 대표하는 '왕조'가 서로 조 우한다는 점에서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다. 3. 미술 작품과 유물을 통해 한 눈에 살펴보는 프랑스 절대 왕정 200년 세계사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프랑스 절대 왕정 시기, 태양왕 루이 14세와 베르사이유 궁의 화려하고 찬 란한 문화를 소개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또한 미술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바로크'와 '로 코코' 양식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회화 및 유물 또한 교육적으로 중요한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Chateau de Versailles(도시 쪽의 베르사이유 궁 전경), 1668 by 피에르 파텔(Pierre Patel:1604-1676)
    4. '베르사이유'에서 탄생한 '프랑스식 유행'의 재발견 프랑스가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강력한 전성기를 누렸던 17세기~18세기에는 '베르사이유 궁정'으로 상징되는 프랑 스 왕실 문화가 유럽의 문화를 선도한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르사이유 궁 자체가 보여주는 웅장함과 화려함은 당시 모든 유럽의 왕조들이 모방하고자 했던 하나의 '건축 양식'이 되었으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유행'이 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당시 유럽의 문화를 선도했던 '베르사이유 발(發) 프랑스식 유행'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5. 프랑스 왕실 '공식 초상화' 속의 숨겨진 비밀을 찾아라! 이번 전시에는 루이 14세부터 루이 16세에 이르기까지 왕실 주요 인물들의 3미터에 육박하는 '공식 초상화'가 대 거 소개된다. '공식 초상화'는 단순한 그림으로서의 의미를 넘어, 왕실이 지닌 '권력'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 자 체로 '국가'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왕실 '공식 초상화'들은 당대 최고의 실력을 지닌 궁정화가들의 손으로 탄생되었으며, 초상화의 크기에서부터 액자 장식, 그림 속 하나하나의 요소들에 이르기 까지 철저한 계산과 의도로 그려졌다. 왕실 '공식 초상화'가 가진 숨겨진 의미를 찾아보는 것 역시 이번 전시의 재미있는 '감상 포인트'가 될 것이다. 6.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를 만나다! 오스트리아의 대공녀에서 프랑스 최고의 자리인 '왕비'에 올라 화려한 생활을 했으나, 결국 프랑스 혁명에서 '단 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번 전시를 통해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14세의 어린 나이로 루이 16세와의 결혼을 위해 프랑스로 왔던 당시의 풋풋하고 호기심 어린 모습이 담긴 초상화 에서부터, 베르사이유 궁의 안주인으로서 문화와 유행을 선도했던 그녀의 화려한 모습, 궁정의 엄격한 생활에서 벗어나 아이들과 함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어머니'로서의 모습, 혁명군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유폐되고 사형 일을 기다리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를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그녀가 직접 사용했던 도자기와 은 세공품 등의 유물을 통해, 그녀의 세련된 취향까지도 엿볼 수 있다.
Garden facade of the chateau(<물의 화단>이 보이는 베르사이유 궁의 전경), ca. 1675 Showing the terrace that was later to become part of the Hall of Mirrors. by Anonymous, French school(프랑스 화파)
    >> 세계 최대의 궁전, 유럽 왕실 문화의 중심:베르사이유(Chateau de Versailles) 프랑스 절대 왕권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베르사이유 궁은 당시 프랑스 왕실과 귀족 문화의 중심지로서, 웅장함과 화려함으로 대표되는 바로크 및 로코코 양식이 완성된 상징적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 엄청난 규모의 궁전은 당시 전 유럽의 모든 왕들이 탐내마지 않았던 오랜 모방의 대상이자, 필적할 상대가 없었던 단 하나의 최고의 궁전이었다. 베르사이유 궁은 원래 루이 13세가 왕실의 사냥용 별장으로 지었던 것이다. 당시에 청석과 대리석을 직사각형 형태의 모양으로 잘라 지붕 기와를 얹었기 때문에 '카드로 만든 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 궁을 왕실의 본궁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기존 궁전의 증·개축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처음에 만들어진 'ㄷ'자 형태의 모양을 고수한 채 앞뒤로 건물과 정원 등을 확장하여 현재의 베르 사이유 궁과 같은 모습으로 재탄생시켰다. 궁의 기본 증·개축 공사는 약 45년 간 이루어졌으나, 이후에도 100여 년간 지속적으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베르사이유 궁의 영지는 베르사이유 본궁과 왕의 별궁인 그랑 트리아농, 그 리고 왕비의 별궁인 프티 트리아농 등 세 개의 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그 랑카날(대운하)과 화려한 기하학적 모양으로 조성된 거대한 정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베르사이유 궁의 영지는 8,150,000㎡로 서울특별시 면적의 약 1/70 정도의 크기라고 예상할 수 있다. 영지 전체의 10% 이상의 면적에 정 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55개의 크고 작은 호수와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궁의 뒤로 펼쳐져 있는 그랑카날은 인위 적으로 조성된 호수로서는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데, 그 면적만도 500,000㎡에 달한다. 베르사이유의 본궁은 약 700개의 방과 2,513개의 창문, 352개의 굴뚝과 67개의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은 하루 평균 1,000여 명 의 귀족과 4,000여 명의 시종들이 출입했으며, 400여 명의 정원사가 궁 정원의 조경을 담당했다.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오늘날의 베르사이유 궁은 루이 14세때부터 프랑스 혁명기 전 까지 베르사이유 궁에 머물렀던 프랑스 왕가가 실제 사용했던 진품 유물들 및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 시 대의 찬란하고 화려했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세계 최대의 박물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Hall of Mirrors, Palace of Versailles The west facade of the Palace of Versailles seen from the gardens.
    >> 왕실 공식 초상화의 숨겨진 비밀 이번 전시에는 당대 최고의 궁정 화가들이 그린 왕실 주요 인물들의 '공식 초상화'들이 대거 소개된다. 특히 프랑스 왕실 초상화들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루이 14세에서부터 마리 앙투아네트에 이르는 왕과 왕비 의 공식 초상화들은 가장 유명하면서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왕과 왕비의 공식 초상화는 단순히 모델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초상화'의 개념에서 바라볼 수 없는, 하나 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속에 표현된 왕과 왕비는 그 자체가 '국가'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 크기와 형태 공식 초상화는 대체로 실물보다 크게 그려졌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공식 초상화들 역시 3미터에 육박하는 크기를 자랑한다. 또한 이렇게 그려진 초상화는 걸리는 위치 또한 정교하게 계산되었는데, 즉 인물의 눈높이가 감상자의 시선보다 높게 맞추어 걸려야만 했다. 이는 왕과 왕비 등의 왕실 일가가 감상자를 내려다보고, 감상자 는 이들을 우러러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초상화 속에 배경으로 그려진 건축적인 요소들, 다시 말하 면 웅장한 기둥이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닫집 형태의 붉은 커튼, 단상들과 같은 요소들은 이들의 위엄을 강조 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반드시 사용된 장치들이었다.
    2. 왕가를 상징하는 다양한 소품들 이러한 공식 초상화들은 '왕가의 정통성'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되었다. 하여 제대로 그려진 공식 초상화는 궁정 화가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축소형 유화, 판화, 동일한 크기의 유화 등) 로 여러 점 제작되어 외교 선물로 다른 나라 왕들이나 대사들에게 선물로 전해졌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궁정 화가들에 의한 이러한 공식 초상화의 '복제'는 하여 단순한 복제화의 개념으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최고의 평 가를 받았던 공식 초상화들만이 궁정 화가들에 의하여 '복제'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던 것이다. '왕가의 정통성' 을 알리기 위하여, 공식 초상화 속에는 이를 상징하는 다양한 상징물들이 반드시 등장한다. 왕관이나 왕홀, 정 의의 손, 흰 담비털을 덧댄 '부르봉 왕가'의 백합 문양이 새겨진 파란 망토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이야생트 리고의 「루이 14세의 초상」은 그런 의미에서 공식 초상화의 가장 대표적인 작 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 이후에 다른 유럽 왕실들의 모든 공식 초상화가 이와 같은 도상을 모방하여 그 려졌으며, 실제로 오늘날 '서양 왕의 초상화'로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일 정도로 가장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The Queen's Bedroom
    >> 유행의 탄생, 베르사이유:루이 14세 시기에 탄생한 유행 상품들 '문화와 예술의 나라'로 알려진 프랑스에 대한 이미지가 최초로 형성된 것은 바로 루이 14세를 필두로 한 17~18 세기의 베르사이유 시기였다. "도시 정비에서부터 사람들의 옷차림까지 루이 14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하나 도 없다."라고 한 프랑스의 문호 볼테르의 말처럼. 루이 14세는 왕위에 오르자 마자 '프랑스풍'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스타일을 창조하고자 했고, 이는 재상 콜베르가 무역과 상공업을 발달시키는 데 큰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즉, 프랑스를 하나의 '아이콘'처럼 만들어, 모든 유럽 국가들이 프랑스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사고 싶도록 만든 것이다. 1. 하이힐 누구보다 각선미에 자신이 있었던 루이 14세는 자신이 직접 발레 공연의 주인공이 되어 춤을 추었을 정도로 사람 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했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위 작품에서는 이러한 그의 성향이 잘 드러나고 있 는데, 특히 그가 신고 있는 높은 굽의 신발은 17세기 전반에 새로운 '프랑스 스타일'을 완성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가 되었다. '루이' 혹은 '루이 프렌치'라고 불린 이 구두는 뒷굽이 우아한 곡선을 이루고 있고, 밑창이 굽에서부터 아치를 지나 앞부분까지 이어지는 당시 최고의 유행품이었다. 이와 함께 '뮬'이라고 불리는 뒷창이 없는 신발 또한 이 시대에 탄생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2. 붉은색 스타킹과 신발 장식 붉은색의 스타킹이나 신발 장식품은 17세기 전반 유럽 왕실의 지체 높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특히 루이 14세는 이 붉은색 스타킹을 즐겨 착용했는데, 이후 왕실 귀족 이외에는 이 스타킹을 착용할 수 없도록 하는 칙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Latone Foutain, The Gardens of Versailles
    >> 전시 구성:베르사이유의 영광-루이 14세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프랑스가 누렸던 가장 화려한 시기'를 칭하는 말로 인용되는 '베르사이유의 영광(Fastesde Versailles)'는 루이 14세에서 루이 16세에 이르는 프랑스 최고의 전성기를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중세 시대 이래로 프랑스에서 '루이(Louis)'라는 전통적인 이름을 사용했던 프랑스의 왕들은 루이 14세와 15세, 그리고 16세 단 세 명이었으며, 이들은 바로 '베르사이유'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의 프랑스는 왕을 중심으로 하여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유럽 전역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으 며, '베르사이유'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및 문화 전반에 걸쳐 하나의 시대 양식 을 만들어 냈다. 이번 전시는 <베르사이유의 영광 - 루이 14세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까지>라는 주제로, 전시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베르사이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공간이 구성되었다. 각 섹션은 루이 14세와 15세, 16세를 상징하는 붉은색, 파란색 및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특히 왕실 공식 초상화 섹션 및 루이 15세 섹션은 예술 의 전당 전시실의 8미터 높이의 공간을 활용하여, 실제 베르사이유 궁의 '회랑'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와 루이 16세의 섹션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랑했던 별궁 《프티트리아농》의 분위기 를 자아낼 수 있도록 소박하고 심플한 느낌으로 디자인되었다. 전시장 곳곳에는 베르사이유 궁의 《거울의 방》 이나, 왕실 여인들의 규방(내실) 등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재미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The Family of Louis XIV(신화 속 인물들로 표현된 루이 14세의 가족), 16 by 쟝 노크레(Jean Nocret:1617-1672)
    1. 루이 14세:찬란한 시기(Louis XIV, Le Grand Siecle) 태양왕(Le Roi Soleil) 루이 14세(Louis XIV:1638~1715)는 프랑스 절대주의의 대표적인 군주로, 원래 사냥용 별 장으로 지어졌던 베르사이유 궁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증·개축한 장본인이다. 절대 군주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상징으로서의 '베르사이유 궁'과 루이 14세 집권기의 문화는 바로 프랑스가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했음을 만천 하에 알리기 위한 도구였다고도 할 수 있다. 베르사이유 궁을 통하여 프랑스는 르네상스 이후 모든 유럽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당시 사람들은 이곳에서 탄생하는 새로운 예술에 주목했다. 건축이나 조각, 실내 장식 등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던 시기였으며, 그 덕분에 18세기의 건축 및 미술 양식들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열 살 때의 루이 14세의 초상(Portrait of Louis XIV), 1648 Only Ten Years Old, But Already King of France by 앙리 테스틀랭(Henri Testelin:1616-1695)
    이 작품은 1648년에 창립된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에 처음으로 제출된 작품들 중 한 점으로, 1643년에 아버지 의 뒤를 이어 즉위한 어린 루이 14세의 열 살 때 모습을 앙리 테스틀랭이 대형 초상화로 작업하여 1649년에 제출 했다.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는 왕에게 직속되어 있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아카데미의 총회실에는 반드시 왕 의 초상화를 걸어 두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작품 속의 어린 루이 14세는 황금 백합 무늬가 있는 크고 푸른 왕가 의 망토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며, 성령 기사단(앙리 3세가 창설한 왕족으로 구성된 기사단으로 길게 늘어뜨린 푸른색 리본 목걸이에 '성령의 십자' 훈장을 달고 다녔기 때문에 이들은 '코르동 블루'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 훈장이 달려 있는 목걸이를 걸고 있다. 테스틀랭은 어린 군주를 보다 위엄 있는 모습으로 그리기 위해 그가 앉아 있는 왕좌 아래에 두 단짜리 받침대를 그렸으며, 약간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듯한 구도를 취했다. 그림의 좌측 하단에는 화가의 팔레트가 놓여 있으며, 왕은 월계관을 손에 들고 있는데, 이는 가장 영예로운 화가 들에게 관을 수여하겠다는 의지로 추정된다. 또한 그는 왼손에 든 왕홀로 미술을 의미하는 또 다른 상징인 구체 와 나침반, 제도용 삼각자, 그리고 조각상을 가리키고 있다. 이 조각상이 올려져 있는 받침대에는 작가의 서명과 함께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가 설립된 해의 연도가 새겨져 있다. 이 작품에는 크고 붉은 주름 잡힌 천이 루이 14세 위로 드리워져 일종의 닫집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로 인하여 작품의 전체 구성은 하나의 기 념물과 같은 웅장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Portrait of Louis XIV of France(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의 후원자 루이 14세), 1667 by 앙리 테스틀랭(Henri Testelin:1616-1695) Portrait de Louis XIV en Jupiter(주피터의 모습으로 표현된 루이 14세의 초상), 1654년경 by 샤를 푀르송(Charles Poerson:French Painter, 1609-1667)
    태양왕 루이 14세를 신화 속 인물인 주피터(제우스)에 빗대어 표현한 신화적 초상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당시 최초의 귀족의 반란이었던 '프롱드의 난'을 제압한 용맹스러운 루이 14세가 최고의 신인 '제우스'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작품 속에서 그는 주피터(제우스)의 지물인 번개를 오른손에 들고 있으며, 그의 발치에는 주피터 의 상징물인 독수리가 앉아 있다. 또한 작품 아래쪽에 적혀 있는 글귀에는 '이 젊은 군주가 바로 새로운 주피 터'라고 적혀 있다. 그는 힘을 상징하는 떡갈나무 잎 관을 쓰고, 발은 메두사의 머리로 장식되어 있는 페르세 우스의 방패 위에 발을 올려 놓은 모습이다. 후경의 좌측에서는 키클로페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족으로 태양의 표상에서 생긴 존재로 추정된다.)들이 무기를 만들고 있고, 트럼펫이나 깃털 장식이 달린 투구, 북, 군기, 갑옷과 같은 군사용 도구와 무기들이 왕과 주변에 흩어져 있다. 끝으로 이 작품은 루이 14세 뒤쪽에 그 려져 있는 기둥들과 크고 붉은 천으로 인해 마치 대형 기념물과 같은 느낌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이 그림은 *프롱드의 난(1648~1653)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기가 지난 후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암시하기 위하여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되며, 루이 14세가 대략 열다섯 살 정도의 소년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653년 경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을 신적인 존재에 빗대어 표현하는 '신화적 초상'이라는 장르에 속한다. 이 장르는 앙리 4세와 루이 13세 시대에 크게 유행했던 양식으로, 이 작품은 그 유행이 거의 끝날 무렵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프롱드의 난:1648년부터 1653년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내란. 루이 145세의 섭정 모후 안 도트리슈 및 재상 마자랭을 중심으로 한 궁정파에 대항하여 일어난 최초의 시민혁명이다. '프롱드(Fronde)'는 원래 당시 청년들 사이에 유행했던 돌팔매 용구로서, '귀족들에게 반항하여 돌팔매질을 한다.'라는 뜻으로 빗대어 쓴 말이다.
Portrait of Louis XIV(루이 14세의 초상), 1670~1675년경 by 클로드 르페브르 아틀리에(Atelier de Claude Lefebvre:French Painter, 1637-1675)
    이 작품은 클로드 르페브르가 그린 루이 14세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하여 1670년에 니콜라 피토(Nicolas Pitau) 가 만든 판화 적품을 모델로 만든 초상화일 가능성이 높으며, 르페브르의 원 작품은 현재 미국 뉴올리언스 박 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품 속의 왕은 갑옷을 입고 레이스 깃을 목에 두르고 있으며, 금실로 수를 놓고 붉은 리본으로 화려하게 강조한 의상 위로 성령 기사단의 십자가가 달려 잇는 푸른 리본이 가로질러 걸려 있다. 왕관은 탁자의 앞 부분에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붉은 깃털이 달린 투구가 있는데, 이 두 가지 물품은 17세기의 왕이 갖는 두 가지 근본적인 기능이자 역할, 즉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서의 역할과 군대를 통솔하여 전쟁을 지휘하는 왕으로서의 역할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후경에 범선이 한 척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작품 은 해군을 통솔하는 왕의 이미지를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아마도 1670년대 중반의 *네덜란드 계승 전 쟁(1672~1678) 당시 프랑스 함대가 시라쿠사와 펠레르모의 대양 및 리파리 섬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해상 전투 를 배경으로 그린 작품으로 보인다. 작품 속의 왕은 오른손에 긴 사령봉을 쥐고 바닥을 지긋이 누르고 있는데, 이 사령봉은 마치 왕홀과 같은 느낌을 준다. 예전에는 이 초상화가 필립 드 샹페뉴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으 나, 현재는 클로드 르페브르의 아틀리에에서 만들어진 작품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네덜란드 계승 전쟁:루이 14세가 영국의 찰스 2세와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를 공격하여 시작된 전쟁이다. 이전 부터 상공업이 발달한 네덜란드를 견제해 왔던 루이 14세의 정복 전쟁 중 하나로, 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네이 메헌 화약은 루이 14세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힌다. 이 전쟁 이후 루이 14세는 '루이 르 그랑(Louis Le Grand)' 이라는 칭호를 얻고 프랑스의 가장 강력한 군주로 등극하게 된다.
Trompe l'oeil avec les portraits de Louis XIV et de Marie-Therese, 1660~665년경 루이 14세와 마리 테레즈의 초상화가 있는 트롱프뢰유 by 작자 미상(프랑스화파)
    이 작품은 붉은 커튼 위에 핀으로 고정되어 있는 루이 14세와 그의 아내 마리 테레즈의 판화 형식의 초상화를 표현한 *트롱프뢰유(Trompe-l'oeil)이다. 붉은 커튼 사이로 보이는 커튼 뒤쪽의 인물로 인해 작품의 입체감이 두드러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트롱프뢰유의 효과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 외에도 화가는 사실적이고 세밀 한 묘사를 통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했는데, 특히 왕비의 판화 오른쪽 아랫부분에 프롱프외유 기법으로 표현된 찢어진 부분을 살펴보면 그 효과를 더욱 실감할 수 있다. 이 작품을 그린 화가는 니콜라 미나르의 작품을 바 탕으로 한 니콜라 드 포이의 판화를 모델로 왕의 초상을 그렸고, 왕비의 초상은 앙리 보브룅과 샤를 보브룅 형제의 작품을 바탕으로 니콜라 피토가 만든 작품을 모델로 했다. 루이 14세의 모습이 담긴 원형 장식은 헤라 클레스의 지물인 네메아의 사자 가죽으로 둘러 싸여 있다. 반신(半神)인 헤라클레스의 이미지는 르네상스 시 대 이래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사용되어 왔는데, 루이 13세는 헤라클레스의 몽둥이 이미 지와 "이 몽둥이도 괴물들을 벌하리라.(HAEC ERIT QUOQUE COGNITA MONSTRIS)"라는 문장을 선택하여 좌우명으 로 삼았다. 아폴론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자신을 스스로 '태양왕'이라고 칭했던 루이 14세 역시 샤를 르 브룅 이 진행한《거울의 방》 내부 장식 중 한 곳에서 헤라클레스의 이미지로 표현되기도 했다. *트롱프뢰유(Trompe-l'oeil):'눈속임' 또는 '속임수 그림' 등으로 번역되는 회화의 장르로 마치 실제의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을 말한다. 구도 및 명암, 양감, 질감 등을 '회화 양식'을 사용하여 실물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현하는 것이 트롱프뢰유의 주 목적이다.
안 도트리슈 모후와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 왕비가 함께 그려진 초상, 1664 by 시몽 르나르 드 생 탕드레(Simon Renard de Saint-Andre, 1613-1677)
    이 작품은 각각 지혜와 평화를 상징하는 인물로 표현된 루이 14세의 어머니인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모후와 부인인 마리 테레즈(Marie-Therese d'Autriche) 왕비가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초상화 로서, 도상학적인 측면에서 각별히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안 도트리슈는 갑옷을 입은 채 크고 붉은 깃털 장식이 달린 투구 위에 왼손을 올리고 있으며, 곁에는 뱀으로 된 머리카락이 꿈틀대는 메두사 머리로 장식된 방패가 놓여 있어, 전통적으로 지혜, 또는 신중함은 뜻하는 알레고리인 미네르바(아테나) 여신의 상징 물들로 꾸민 모습이다. 마리 테레즈는 백합꽃 무늬가 수 놓아진 드레스를 입고, 왼손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의 딸인 마리 테레즈와 루이 14세가 1660년에 결혼을 함으로써, 프랑스와 스페인의 군사적 적대 관계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되었는데, 이 작품은 모후 안 도트리 슈와 마리 테레즈 왕비가 맞잡은 손을 통하여 이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 테레즈의 곁에는 과일 이 잔뜩 쏟아져 나와 있는, '풍요의 뿔'이 놓여 있는데, 이 풍요의 뿔은 평화가 돌아오면 왕국 전역에 풍요로 움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이 그림은 르나르 드 생 탕드레가 1664년에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 에 가입하기 위한 출품작으로 선보인 작품이다.
Jean-Baptiste Colbert(장 바티스트 콜베르:1619~1683), 1715~1716년경 by 니콜라 쿠스투(Nicolas Coustou:French Baroque Era Sculptor, 1658~1733)
    죽음을 맞이하기 얼마 전인 1715년, 자신의 후원자이자 프랑스 유수의 미술 기관들을 설립하고 발전시킨 장 바티 스트 콜베르를 기리고자 했던 조각가 프랑수아 지라르동(Francois Girardon)은 그의 흉상을 제작하여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에 지증하기로 결심한 후, 이 작업을 동료 작가인 니콜라 쿠스투에게 부탁했다. 이미 1683년에 사망한 콜베르의 모습을 회고하여 작업을 시작한 쿠스투는 이듬해인 1716년에 이 흉상을 완성했다. 그가 조각한 흉상 속의 콜베르는 상당히 젊은 모습으로, 성령 기사단의 십자가를 달고 있다. 실제로 콜베르는 1665년에 성령 기사단의 수석 재무관으로 임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간 왼쪽으로 돌리고 있 는 얼굴에는 옅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데 이는 국사에 대한 근심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콜베르는 궁전 관리부 총감이자 재정 총감, 왕실 국부성과 파리 시 , 성직부, 그리고 해군성의 총감으로서 막중 한 임무들을 맡고 있었고, 그 위치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국가의 사법 및 행정, 재정, 예산부 처의 개혁을 단행했고, 파리의 도시 미관을 개선시켰으며, 왕립 아카데미 및 공방들을 설립하고 해외 무역을 재 정비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해군에도 큰 발전을 가져 왔다. 루이 14세는 콜베르를 언제나 깊이 신임했으며, 그 에게 많은 특혜를 베풀었다. 뛰어난 솜씨로 조각되어 있는 가발과 의복을 보면 콜베르의 사회적인 지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Portrait of Jean-Baptiste Colbert(재상 장 바티스트 콜베르), 1666 by 클로드 르페브르(Claude Lefebvre:French Painter, 1637-1675) Portrait of Louis XIV, 1702 by 이아생트 리고(Hyacinthe Rigaud:French Baroque Era Painter, 1659-1743)
    이 작품은 이아생트 리고의 아틀리에에서 루이 14세의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을 바탕으로 만든 축소판이다. 이 작품의 모델이 된 초상화는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작이 1700년에 서거한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2세의 유 언에 따라 1701년에 스페인의 왕 펠리페 5세가 되었을 때, 할아버지의 화려하고 장엄한 모습을 담아 스페인으로 가지고 가기 위해 주문한 것이었다. 원 작품에서 루이 14세는 담비 털을 덧대고 황금 백합 무늬가 수놓아진 파란 색 대관식 망토를 입고서 연단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또한 검은 가발을 쓰고 성령 기사단의 훈장이 달린 금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으며, '레갈리아', 즉 프랑스의 왕을 나타내는 상징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루이 14세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꼭대기가 백합 모양으로 되어 있는 왕홀, 허리춤에 차고 있는 대관식용 검(샤를마뉴의 검), 그리고 그의 왼쪽으로 황금 백합 무늬의 푸른색 방석 위 에 놓여 있는 '정의의 손'과 프랑스의 왕관이 모두 프랑스 왕의 상징물들이다. 왕은 힘을 상징하는 기둥 앞에 서 있는데, 이 기둥의 받침 부분은 '정의'를 우의적으로 나타낸 여인상을 새긴 저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이 정의의 알레고리는 한 손에는 저울을 반대편 손에는 검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이를 통하여 프랑스의 왕들이 백성에 대해 가져야 하는 첫 번째 덕목이 바로 정의였음을 알 수 있다. 왕좌는 오른쪽 깊숙한 곳에 그려져 있고, 주름 잡힌 붉은 천이 왕의 모습 위로 마치 닫집 같은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렇게 완성된 리고의 대형 초상화는 마드리드로 전해지지 못했다. 앙주 공작이 펠리페 5세로 스페인 왕좌에 앉자마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초상화 (현재 루브르 박물관 소장)는 베르사이유 궁전의 왕좌의 방, 즉 아폴론의 방 벽난로 위에 걸리게 되었고, 그 대 신 펠리페 5세에게 전달된 것은 역시 리고가 그린, '전쟁의 왕'의 모습으로 표현된 갑옷을 입은 <루이 14세의 초 상화>(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였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이 초상화는 리고가 대형 초상화를 제작한 이후에 아틀리에의 문하생들과 함께 제작한 축소판이며, 많은 공작 초상화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 역시 여러 점이 복제화 로 그려져 왕실 일가에 전해지기도 했다. 또한 오늘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루이 14세의 이미지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다.
Portrait of Louis XIV(갑옷을 입은 루이 14세), 1701 Museo del Prado, Madrid by 이아생트 리고(Hyacinthe Rigaud:French Baroque Era Painter, 1659-1743) Portrait of Louise-Marie-Anne de Bourbon, dite Mademoiselle de Tours(Girl Blowing Soap Bubbles), 1681년경 루이즈 마리 안 드 부르봉, 일명 마드무아젤 드 투르(1674~1683) by 피에르 미냐르(Pierre Mignard:French Baroque Era Painter, 1612-1695)
    이 작품은 오랫동안 루이 14세의 그가 총애했던 정부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 사이에서 태어난 후 적자로 인정을 받았던 마리 안 공주, 즉 마드무아젤 드 블루아(1666~1739)의 초상화로 여겨져 왔으나, 루이 14세와 라 발리에 르 이후에 왕의 총애를 받게 된 몽테스팡 후작부인(Madame de Montespan) 사이에서 태어난 루이즈 마리 드 부르 봉, 즉 마드모아젤 드 투르가 죽은 뒤 그녀를 회고하며 그린 초상화일 가능성이 더욱 높다. 이 작품 속에서 여섯 살 정도의 소녀는 손에 든 조개 껍질에 담긴 비눗물과 빨대를 가지고 비누방울을 만들며 놀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실제 마드무아젤 드 투르는 1674년 11월 12일에 태어나 여섯 살이 되던 해인 1681 년 9월 15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17세기 당시 삶의 허무함을 상징하던 이미지였던 비누방울이 그려져 있다는 것 은 작품 속의 소녀가 어려서 죽었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피에르 미냐르가 그린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활기 있고 역동적인 모티프는 비누방울을 잡기 위해 뛰어 다니고 있는 작은 개 한 마리뿐이며, 소녀의 얼굴에는 구슬픈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소녀가 앉아 있는 붉은색의 방석 과 대비되는 초록색 털을 가진 앵무새는 성모 마리아의 상징이자, 마드무아젤 드 투르의 순결함과 순진무구함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휘장, 1693~1727 양모와 명주로 짠 태피스트리, 고블랭 왕립 제조소 제작 by 샤를 르 브룅(Chyarles Le Brun:1619~1690) & 보두앵 이바르(Baudouin Yvart:1611~1680)
    이 휘장은 마치 왕실에서 주문하여 만든 것처럼 화려하지만, 이 휘장의 바탕이 된 작품은 원래 왕실이 아닌 개 인이 주문했던 것이다. 그 작품을 주문했던 인물은 바로 루이 146세가 성년이 되기 전에 재무 장관을 역임했던 니콜라 푸케(Nicolas Fouquet)였다. 뛰어난 미술품 수집가이기도 했던 푸케는 1653년에 건축가인 루이 르 보, 화가 샤를 르 브룅 및 정원사 앙드레 르 노트르로 하여금 파리의 남동부에 있는 보-르-비콩트 지역에 멋진 성을 한 채 짓도록 했는데, 그 결과 당시 프랑스에서는 본 적이 없을 만큼 실로 화려하고 완벽한 성이 완성되었다. 푸케는 1661년 8월 17일에 이 성의 준공식을 열고, 어린 루이 14세와 왕실 일가, 그리고 궁정의 인사들을 초대 하여 성대한 파티를 개최하는 등 호사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친정이 시작된 이후, 직권 남용 등의 독직 혐의로 루이 14세의 재상인 콜베르에게 고발되어 구금되었고, 결국 모든 재산을 몰수 당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아래에서 일하던 예술가들은 왕실의 건축 작업 쪽으로 편입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푸케가 보-르-비콩트 성 근처에 설립했던 맹시 직물 제조소는 1662년 당시 새로 설립된 파리 의 고블랭 직물 제조소로 옮겨 병합되었고, 그가 실각하기 전에 주문하여 이미 제작이 완료된 열한 점의 휘장 은 그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전반적으로 수정을 해야만 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이 휘장 역시 푸케의 주문 으로 르 브룅이 밑그림을 그려 맹시 제조소에 넘겼던 것이다. 원래의 밑그림에는 푸케의 가문 문장인 '은색 바 탕에 뒷발로 선 적갈색 다람쥐(푸케의 문장)'가 그려져 있었고, 그 위로 후작의 관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밑그림이 맹시 제조소에서 고블랭 제조소로 넘겨지면서 르 브룅은 푸케의 문장을 중앙에 방패 모양 문장이 있고, 그것을 왕실 기사단의 목걸이와 성령 기사단의 목걸이가 둘러싸고 있으며, 두 명의 어린 큐피드 가 왕관을 떠 받치고 있는 형태인 프랑스 및 나바르(1589년부터 프랑스에 일부 병합된 피레네 주변의 왕국)의 왕실 문장으로 대체했다. 중앙의 여성 흉상 두 개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여성 흉상들은 각각 '승리'와 '명예' 를 상징하는 전쟁의 알레고리이다. 그 아래쪽에는 원래 '충성'과 '용맹'을 상징하는 동물인 개와 사자의 모습 이 표현되어 있었는데, '충성'과 '용맹'이라는 덕목은 왕이 아닌 신하에게 어울리는 덕목이라고 판단되어 곧 삭제되었고, 그대신 무기를 형상화한 문양으로 대체되었다. 1727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문장이 들어간 태 피스트리 72점이 고블랭 제조소에서 만들어졌으며, 그 중 24점은 금실로 제작되었고, 그 후 프랑스 왕실의 문 장 모양이 새롭게 바뀌면서 이들 휘장 역시 수정되었다.
Le Char de Mercure(메르쿠리우스의 전차), 1673년경 by 장 바티스트 드 샹페뉴(Jean-Baptiste de Champaigne:French Baroque Era Painter, 1631-1681)
    이 작품은 장 바티스트 드 샹페뉴가 1671년에서 16780년 사이에 베르사이유 궁 내 왕의 《그랑 아파르트망》 중 《메르쿠리우스의 방》의 중앙 천정화를 제작하기 위하여 그린 초별화이다. 작품의 중앙에는 신이자 동시에 '수성'이라는 행성을 의인화한 이미지인 메르쿠리우스가 카두케우스 지팡이를 들고, 날개 달린 모자 페타소스 를 쓴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의 수레를 끌고 있는 것은 수닭인데, 수닭은 경계심이 많다는 특성 때문에 메 르쿠리우스를 상징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메르쿠리우스의 왼편에서 두루마리 종이를 펼쳐 든 채로 작은 푸토(Putto:르네상스 시대의 장식적인 조각으로 큐피드 등 발가벗은 어린이 상)가 씌워주는 월계관을 받고 있 는 여성은 웅변의 뮤즈인 폴림니아이며, 이는 메르쿠리우스가 화술을 관장하는 신이라는 점과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수닭과 더불어 경계심이 많은 동물이자 작품의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두루미 앞에 앉아 날개가 달린 자신의 이마를 검지로 가리키는 자세를 통해 과학과 예술의 신인 메르쿠리우스의 지성을 상징하고 있는 인물은 '경계심'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삼각자와 나침반, 각도기, 기하학적인 도면들이 그려진 천 조각들은 '과학'과 '예술'을 상징한다. 아래쪽으로 네 명의 푸토들이 리라를 들고 있어 메르쿠리우스가 이 악기를 발명 했음을 상기시켜 주는데, 메르쿠리우스는 아폴론으로부터 소를 훔친 것을 용서받기 위해 이 악기를 그에게 양 보했다. 메르쿠리우스의 수레는 작은 큐피드 신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새벽별'은 머리에 별을 달고 손에 든 트럼펫으로 날이 밝았음을 알리고 있다. 또한 '이슬'은 두툼한 구름 아래에서 항아리 속에 든 물을 붓고 있는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후경에는 황도 12궁의 일부가 그려져 있는데 메르쿠리우스의 수레는 점 성술 상에서 수성의 궁인 처녀좌와 쌍둥이좌를 지나가고 있다. 작품의 네 모서리는 부채꼴 모양의 귀가 표시 되어 있는데, 이는 실제로 구현될 천장 벽화의 네 모서리에 같은 모양으로 장식 액자가 구현될 것임을 표시해 놓은 것이다.
제피로스와 플로라(Zephyrus and Flora), 1688 by 미셸 코르네이유 2세(Michel Corneille II:1642~1708)
    이 작품은 베르사이유의 그랑 트리아농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그랑 트리아농은 루이 14세가 베르 사이유 궁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지친 몸을 쉬기 위하여 지은 별궁이다. 때문에 그랑 트리아농의 장식은 특히 왕이 열정적으로 좋아하던 대상 중 하나인 꽃을 중심으로 한 자연의 테마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었고, 왕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백 송이의 꽃들을 화분째 정원에 옮겨 심고 매일같이 꽃을 갈아 주었다. 그런 맥락에서 궁정의 회화 장식 주제로 '제피로스와 플로라'가 선택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제피로스와 플로라'라는 주제는 먼저 장 주브네가, 그 다음으로 미셸 고르네이유 2세가 각각 회화 작품으로 제작한 바 있다. 제피로스는 오로라의 아들이자 바람의 신 중 한 명으로서, 플로라라는 님프와 사랑에 빠져 그녀에게 꽃과 정원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이 이야기는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변신 이야기> 에서 시로 표현한 신화 이야기로, 그랑 트리아농의 장식을 맡았던 화가인 주브네 및 코르네이유 2세는 이 이야 기로부터 영감을 받아 궁의 장식을 제작했던 것이다. 작품 속에서 플로라는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정 중앙에 그려져 있고, 나비의 날개를 단 모습으로 표현된 제피로스는 자신의 튜닉에 모아 담은 꽃들을 플로라에게 내밀 고 있다. 이 작품을 보면 코르네이유 2세가 라파엘로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 및 프란체스코 알바니, 도메니키노와 같은 17세기 *볼로냐 화파의 화가들이 구사했던 솜씨를 완벽하게 연구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았음 을 알 수 있다. *볼로냐 화파:북이탈리아의 고도 볼로냐를 중심으로 활약한 일군의 화가와 그 유파를 말한다. 이 화파를 통해 대표적인 바로크 화가들이 등장했는데, 통일성 있는 명암의 표현과 동적이면서 장식적인 화풍은 카라바조의 강렬한 명암 대비에 의한 사실주의와 더불어 17세기 유럽 회화의 양대 주류를 이루었으며, 19세기에 이르기까 지 이탈리아 화단뿐만 아니라 전 유럽 회화에 결정적 지침이 되었다.
궁전《북쪽 화단》의 전경, 1688 by 에티엔 알렉그랭(Etienne Allegrain)
    이 작품은 루이 14세가 그랑 트리아농을 장식하기 위해 주문했던 작품들 중 한 점이며, 원래 코텔 회랑 끝에 있 는 커다란《포르티코의 방(정원의 방)》을 장식하기 위한 그림이었다. 이 작품 속에는 프랑스의 조경 설계가 앙드레 르노트르의 감독 하에 1660년대 초에 재정비된 베르사이유 궁의《북쪽 화단》의 모습과 더불어 오른쪽에 는 축조가 마무리된 궁전의 북쪽 날개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작품 중앙의 중경에는《왕관의 분수》와 두 개 의《피라미드의 분수》가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화단은 작은 나무들을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자르고 다듬어 만든 여러 가지 '토피어리'와 대리석 조각품들로 꾸며져 있다. 또한 화단으로 이어진 계단의 양 측면에는 두 개의 청동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왼쪽은 앙투안 쿠아즈보의 <웅크린 아프로디테>이며, 오른쪽에 있는 것은 지오바니 바티스타 포기니의 <칼 가는 사람>으로, 고대의 유명한 조각상들을 복제한 것이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 궁의 정원을 궁정 사람들에게 직접 안내하면서 산책하는 것 을 즐겼는데, 작품의 전경에는 정원 감상을 끝낸 듯한 사람들과 그 가운데서 지팡이를 짚고 있는 루이 14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는 궁정 사람들의 의상과 지형의 모습이 매우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The Palace of Versailles in 1722, 1722 《아름 광장》에서 바라본 1722년 베르사이유 궁의 전경 by 피에르 드니 마르탱(Pierre-Denis Martin:1663~1742)
    1722년에 제작된, 베르사이유 궁의 전경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아마도 조부인 루이 14세가 1710년 9월에 서거한 후 궁을 떠났던 젊은 루이 15세가 다시 돌아온 것을 기념하며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루이 15세는 몇 년 간 파리에서 살다가 궁전의 증축 공사가 끝난 이후인 1722년 6월 15일에 베르사이유로 돌아 왔다. 전경에 그려져 있는 아름 광장은 마치 공사를 준비하기 위해 자재 등을 쌓아놓는 공간처럼 표현되어 있다. 피에르 드니 마르탱은 이 작품에서 좌우의 《대신의 날개관》으로 둘러싸여 있는 《대신의 안뜰》과 그 안쪽에 자리한 《왕실의 안뜰》, 또 그보다 더 안쪽에 있는《대리석 안뜰》까지 세밀하게 묘사했는데, 이 《대리석 안 뜰》공간에 위치한 성이 바로 루이 13세가 지었던 베르사이유 궁 최초의 성이다. 당시 이 성은 벽돌과 석재를 주재료로 해서 청석으로 지붕을 얹었으며, 그 위에 금으로 도금한 캄파네(campa- ne:종을 거꾸로 세운 모양의 기둥머리, 건축 장식물)를 놓은 형태로 지어졌다. 그 후 오랜 기간의 공사를 통하여 성을 확장했으나, 루이 13세가 처음 지었던 성의 형태, 즉 안뜰을 감싸고 있는 'ㄷ'자 형태의 구조는 유지되었다. 작품 속에는 사륜마차의 행렬이 무기와 깃발을 들고 정렬한 프랑스와 스위스 근위대의 경례를 받으며 궁을 나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작품 전경의 마차는 이 작품을 주문한 콩티 공작 가문의 시종들이 이끌고 있다. 대신의 안뜰 가운데에는 왕을 태운 마차가 그 뒤를 따르고 있으며, 그 뒤에는 루이 15세의 숙부이자 섭정인 오를레앙 공작의 마차가 따르고 있다. 궁전과 궁전의《북쪽 날개관》(우측), 그리고 《남쪽 날개관》(좌측)이 이루고 있는 경계선 너머로는 중앙부의《그랑 카날, 즉 대운하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펼쳐져 있는 궁전의 넓은 정원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왕실의 거처인 그랑 트리아농, 마를리 성, 뫼동 성, 풍텐블로 성 및 샹보르 성을 표현한 다섯 점의 작품들과 함께, 루이 14세와 그의 정부인 마드무아젤 드 라 발리에르 사이에서 태어난 마리 안 드 부르봉, 즉 콩티 공주를 위해 지어졌으나 이후 1739년에 그녀의 조카인 루이 15세에게 팔리게 된 슈아지 성의 삭당 문 위 쪽 벽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1739년에 그녀의 조카인 루이 15세에게 팔렸다.
Le Jugement de Midas(미다스 왕의 심판), 1701 by 미셸 코르네이유 2세(Michel Corneille II:1642~1708)
    이 작품은 그랑 트리아농을 장식했던 작품 중 하나이다. 루이 14세는 수많은 궁정 인사들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 고, 베르사이유의 허영과 허식으로부터 몸을 피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사적인 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1686년 에 도자기 타일로 장식되어 있던 트리아농 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대리석으로 된 그랑 트리아농을 짓도록 했 다. 완공 직후인 1688년부터 궁 장식을 위한 여러 회화 작품 제작이화가들에게 의뢰되었으나, 1689년에 발발한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 때문에 그 제작이 중단되기도 했다. 루이 14세는 그랑 트리아농 내에서 처소를 세 번 옮겼다. 그가 처음으로 머물렀던 곳은 궁의 우측 날개관이 있는 공간으로 1691년부터 1692년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그 다음으로는 좌측 날개관에 처소를 마련했으며, 마지막으로 1702년에는 우측 날개관에 있던 맹트농 부인의 처소와 인접한 곳에 세 번째 처소를 마련하여 지냈다. 미셸 코르네이유 2세가 그린 이 작품은 첫 번째 처소의 대기실인《앙티샹브르 데주》를 장식하기 위해 1701년에 제작한 작품이며, 그 대기실은 오늘날《상브르 뒤 소메이》와 합쳐서《그랑 살롱》, 즉 대 거실이 되어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미다스 왕의 심판'이다. 작품 중앙의 뒤쪽에서 왕관을 쓰고 있는 프리지아의 왕 미다스는 리라를 연주하는 아폴론과 목신 판의 피리를 연주하고 있는 반인반수의 '사티로스'인 마르시아스 둘 중에 누가 더 뛰어난 음악가인지를 결정해야 했는데, 결국 마르시아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에 노한 아폴론은 미다스에 게 무지의 죄를 물어 그의 귀를 당나귀 귀로 바꾸어 버렸고, 마르시아스는 감히 태양의 신과 재주를 겨루려 했 던 죄로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형벌을 받았다. 즉, 이 작품의 숨겨진 의미는, 감히 루이 14세의 권위와 위엄에 대적하려 하는 자는 무모하다는 것이었다. 왕권 모독은 프랑스 왕의 백성으로서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중죄였기 때문이다.
베르사이유 궁 내 루이 14세의 침실, 1861 by 루이 빅토르 나블레(Louis Victor Navlet:1819-1886)
    이 작품은 루이 14세의 명에 따라 통치 말기에 베르사이유 궁 한가운데에 지어진 그의 침실 모습을 담고 있다. 원래 이 침실의 옆방을 사용하고 있었던 그는 자신의 수석 건축가인 쥘 아르두앵 망사르를 시켜 궁전의 중앙 살 롱의 벽을 장식용 띠벽을 이용하여 두 부분으로 구분하는 일종의 복층과 같은 형태인 이탈리아 식으로 개조하고 《거울의 방》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세 개의 문을 없앤 뒤 그 자리에 창문을 마주하고 있는 내실을 하나 만들어 침대를 놓도록 했다. 하지만 1680년대부터 내부의 벽을 장식하고 있던 금색과 흰색의 기둥 장식은 철거하지 않 은 채로 두었고, 왕실 컬렉션에 포함된 초상화와 종교화, 풍속화 등도 문의 위쪽 벽 및 복층 장식용 띠벽의 위 쪽에 그대로 두었다. 각별히 격식을 갖춰 만들어진 이 침실은 그때부터 왕의 '기상 및 취침 의식(왕의 기상 및 취침의식은 왕에게 중요한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특히 기상 의식에는 시종과 전담 이발사, 시계 담당자와 의 상 담당자 등 20여 명이 왕의 아침 준비를 도왔다.)'이 치러지는 장소이자 궁정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왕권을 상징하는 이 방의 기능은 루이 15세를 이어 루이 16세까지 유지되기는 했으나, 이례적으로 루이 15세는 이 침실을 사용하지 않고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별도의 아늑한 침실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혁명군들이 궁에 난입하여 집기류를 팔아 치우고 직물들을 불태워 금실을 뽑아내면서 이 침실은 크게 훼손되었으나, 구체제의 왕들이 가졌던 권위를 되찾고자 했던 루이 필립 왕에 의해 1830년대에 복 원되었다. 특히 사르트르 공작으로 불리던 어린 시절 이 침실의 침대를 보고 기억하고 있었던 루이 필립은, 가 구 세공가인 자콥 데말테르에게 그와 비슷한 대형 침대를 제작해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 빅토르 나블레는 루이 필립에 의해 복원된 침실의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이후에 이 침실은 다시 한 번 복원 작업을 거친 후, 집기류까지 갖추어 1980년에 공개되었다.
Louise XIV(루이 14세), 1705 by 앙투안 브누아(Antoine Benoist:1632~1717)
    67세가 된 루이 14세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그 사실적인 표현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 작품을 만든 앙 투안 브누아는 모델의 얼굴에 대고 직접 본을 뜬 후, 그것을 이용하여 굉장히 사실적인 작품을 만드는 독특한 연출 기법으로 유명한 작가였다. 특히 이 작품에는, 루이 14세가 어린 시절에 앓았던 천연두의 흉터까지도 정밀 하게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기록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 이 초상 작품은 세월의 흐름과 노화에 맞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한 군주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이 제작된 1705년 당시, 루이 14세는 손자이자 스페인의 왕이었던 펠리페 5세의 왕좌를 지켜주기 위해 유럽을 상대로 힘겨운 전쟁 을 치르고 있었지만, 그 전쟁은 끝을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 작품에 나타난 왕의 얼굴에는 노쇠의 흔적이 확연하게 드러나 있지만, 정성들여 다듬은 듯한 여러 층의 풍성 한 곱슬머리 가발에서는 여전히 국왕으로서의 위풍당당함이 느껴진다. 루이 14세는 통치 초반부터 때 이른 탈모 증을 감추기 위해 가발을 썼지만, 이 가발은 점차 그의 왕권을 상징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루이 14세 를 표현한 공식 초상들은 이 가발을 점점 더 크고 풍성하게 묘사했다. 여기 이 작품은 왕을 미화하여 표현하지 는 않았지만, 당시 유럽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왕들 중 한 명이었던 루이 14세를 그 어떤 역경에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을 지닌 듯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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