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llection of British Landscape Paintings From TURNER to IMPRESSIONISTS

영국 근대 회화전-터너에서 인상주의까지
자연의 진실 담은 영국 낭만주의 회화의 향연
낭만주의 화가들은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 현대 추상미술이 대세를
이루는 요즘의 미술계에 드물게 순수 자연의 모습을 그린 영국 낭만주의 회화전이 열린다.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18~19세기 <영국 근대 회화전- 터너에서 인상주의까지> 전시는 6월 25일~9월 26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어떠한 변형이나 꾸밈없이 순수한 있는 그대로의 자연으로의 회
귀를 주창했던 낭만주의 화가들의 사상을 통해 자연의 진리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번 전시는 18~19세기
에 이르는 영국 근대 회화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는 자리로, 영국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윌리엄 터너 및 존
컨스터블을 비롯한 80여 명의 작품 116점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의 영국 회화들은 모네, 르누아르 등
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인상주의 화풍이 태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제공
한 것으로 평가 받으며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영국의 국민화가이자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
가로 평가받으며 세계 최고 권위의 현대미술상인 '터너 상(Turner Prize)' 탄생의 모티프가 된 화가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를 재발견하고, 영국 근대 회화의 전성기를 이끈 대표적 화가
들의 작품과 그들의 영향을 받아 화풍을 형성했던 폴 고갱, 피에르 보나르, 카미유 피사로 등 프랑스 인상주
의 화가들의 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이번 전시의 의미라 할 수 있다. 서양 회화의 역사적 흐름을 이해
함과 동시에 자연의 빛과 색을 통해 자연의 찰나적인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을 감상함으로써 잊고 있었던 자연
의 목가적인 아름다움과 순수함, 낭만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Self-Portrait, 1799
by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English Romantic Painter, 1775~1851)
영국 근대 화가들에게 있어서 풍경화는 곧, 정신적인 안식처이자 명상의 영역이었으며, 나아가 새로운 회화적
시도를 가능하게 한 창조적인 도구로 사용됐다. 산업혁명 후 편리함의 이면에 파괴되어 가는 자연의 모습을
보며 향수를 느끼게 된 사람들은 자연 회귀를 불러오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태동된 화가들의 작품은
자연 풍경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추구하고 있다. 풍경화는 눈앞에 펼쳐진 자연을 화폭에 단순히 옮기는 작업
을 넘어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심을 화폭 속에 응집해 놓은 표현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풍경화
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자연에서 인간이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는지에 대한 화가들의 끊임없는
성찰 및 시도'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산업혁명'의 시발지인 영국에서 18-19세기에 일어난
급격한 산업화는 곧이어, 자연 순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연 회귀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다시 말하면, 산업 발전이 가져온 편리함의 이면에 파괴되어 가는 자연의 모습을 목격하며 일종의 향수를 느
끼게 된 사람들은 다시 자연의 순수함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영국 회화는 역사나 종교적 메
시지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영국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화가들에게 그 순간순간을 기록하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과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석양이 내려앉은
들판 등 영국의 사실적 풍광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화가들은 꾸밈이 없는 '있는 그대로
의 자연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자 부단히 시도했으며, 이 작품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연을 바라
보는 또 다른 시각을 제시해 준다. 그들이 당시에 바라본 자연 풍경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현재 우리들이 추
구하고 있는 자연 친화적인 삶과도 연관지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은 시대
를 앞서간 화가들의 눈으로 바라본 자연의 모습이다.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자연의 순간적인 아름다움
을 담은 작품들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순수함과 낭만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자연의 빛과 색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The Hay-Wain, 1821
by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English Romantic Painter, 1776~1837)
전시의 구성은 자연의 진실- 순수 풍경과 자연, 하늘과 물의 풍경, 목가적인 풍경, 삶이 어린 풍경, 새로운
풍경의 등장-여행하는 사람들/건축물이 있는 풍경, 프랑스 인상주의라는 6개의 소주제로 나뉘어있다.
소주제들은 화가들이 영감을 받았던 자연과 장소를 대표함으로 각각의 장소가 갖고 있는 고유의 아름다움을
눈여겨보는 것은 관람의 묘미를 더해줄 것이다. 대표작품으로는 '프랑스 풍경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 컨
스터블의 <햄스테드의 브랜치 힐 연못>을 비롯해 색과 톤의 강도를 끊임없이 다양하게 표현하여 화가들에게
드로잉의 표본이 되는 윌리엄 헨리 헌트의 <자두, 복숭아 그리고 헤이즐넛>이 있다. 또한, 조제프 말로드 윌
리엄 터너에게 명성과 부를 가져다 준 초기 대작 중 하나인 <바람 부는 날>, 목가적인 분위기의 평온하고 친
근한 에드워드 스톳의 <나룻배>, 그리고 단순한 도시의 거리 풍경 속에서도 사회계층간의 삶의 환경과 사회
적인 실상을 진실하게 담으려고 한 조지 클라우슨의 <봄날의 아침, 하버스톡 힐>, 프랑스 인상주의의 화풍으
로 폴 고갱의 초기작 <디에프 항구의 풍경> 등의 작품이 있다.
영국 맨체스터 시립 미술관, 베리 미술관, 맨체스터 테블리 하우스 컬렉션, 블랙번 미술관, 라잉 미술관, 올
덤 미술관, 터치스톤스 로치데일 미술관 등 8개 영국 주요 미술관이 이번 전시에 참여했다.
The Alley at Middelharnis(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 1689
by 마인데르트 호베마(Meindert Hobbema)
I. 영국 풍경화의 기원
영국 풍경화의 기원은 17세기 플랑드르 및 네덜란드 미술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찍이 풍경화 전통이 발전한
플랑드르(현재의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북부지방을 일컫는 지역구분)의 페테르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 야코프 판 라위스달(Jacob van Ruysdael:1628?~1682)과 같은 화가들은 풍경을 그림의
주제로 다루면서 이를 신화적, 종교적인 사건의 배경으로만 여기지 않고 이상화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했다. 북유럽 화가들은 그 자체로는 특별할 것 없는 장소이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생활을
영유하는 장소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평범하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고, 그들의 세월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시골과 소도시 그리고 마을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18세기와 19세기 초의 영국 화가들은 이러한 유럽 대륙의 풍경화 전통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영국에서 네덜란드와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앵글리아(East Anglia) 출신인 토머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
borough:1727~1788)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1776~1837)은 네덜란드 거장들로부터 구성의 기술과 그
림의 모티프들에 대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영국 미술관들이 소장한 북유럽 풍경화 작품들이 다양
하고 풍부했기 때문에 화가들은 풍경화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림 그리는 일을 취미나 문화생
활이 아닌 자신의 생계 수단으로 여겼던 화가들은 당시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이러한 17세기 화가들의
그림을 의도적으로 모방하기도 했다. 후원자의 지원을 받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과거의 화가들과는 달
리, 자신의 작품을 직접 팔아 돈을 벌 수 있음을 체험하게 된 당시의 화가들은 과거 거장들의 풍경화가 사
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작품 양식이라고 생각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작품들이 이러한 거장들의
작품처럼 명작의 반열에 오르기를 바라기도 했다.
Farm in the Woods, 1662(좌) 햄프셔의 링우드, 1830(우)
by 마인데르트 호베마(Meindert Hobbema) by 패트릭 네이스미스(Patrick Nasmyth)
위 두 작품은 언뜻 보기에도 전체적인 그림의 구성과 색채감, 그리고 표현 방식까지 동일한 작가의 작품처
럼 여겨질 정도로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화면의 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하늘과 구름의 움직임이 강조
된 풍경화는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의 전통적인 풍경화의 양식이다. 또한 지평선을 강조함으로써 전경, 중경,
원경의 구분을 없애고, 단숨에 전경과 원경을 자연스럽게 이어 전체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왼쪽 그림의 작가는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네덜란드의 화가 마인데르트 호베
마(Meindert Hobbema:Dutch Baroque Era Painter, 1638-1709)이며 오른쪽의 그림은 영국 풍경화가인 패트
릭 네이스미스(Patrick Nasmyth:Scottish Painter, 1787-1831)의 작품이다.
이 두 그림을 통해, 당시 플랑드르 또는 네덜란드의 풍경화 작가들의 작품이 영국의 풍경화가들에게 큰 영
향을 미쳤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외에도, 컨스터블은 얀 뵈이낭스(Jan Wijnants:Dutch Painter,
1632~1684)와 라위스달(Salomon van Ruisdael:Dutch Golden Age Landscape Painter, c.1602~1670), T.S.
쿠퍼(Thomas Sidney Cooper:English Landscape Painter:1793~1902))는 알베르트 코이브(Aelbert Cuyp:
Dutch Landscape Painter, 1620~1691)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사실 18세기 이전까지 다른 유럽 나
라들에 비하여 국가적인 회화의 전통이 형성되어 있지 못했던 영국에서, 특히 풍경화의 입지는 크게 높지
못한 상황이었다. 특히 왕립 미술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영국 화가들은 학생들의 콩쿠르에서 조차
풍경화를 입상시키지 않을 정도로 풍경화를 경시하는 풍조가 강했다. 하지만, 문학과 문화 전반에서 일어
났던 낭만주의 경향은 미술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기울인 이러한 사상과 더불어
18~19세기에 걸쳐 영국 풍경화는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A Peasant Cottage, 1646~1684
by 얀 뵈이낭스(Jan Wijnants:Dutch Painter, 1632~1684)
Cattle in the Pasture, 1881
by 토마스 시드니 쿠퍼(Thomas Sidney Cooper:English Landscape Painter, 1793~1902)
>> 영국 풍경화의 발달:낭만주의와 합리주의 사상의 발달
낭만주의, 영어로는 Romantism은 18세기 유행했던 중세의 모험담을 가리키는 '로망(Roman)'에서 유래한 말
이다. 프랑스에서는 소설을 가리키는 단어가 바로 '로망(Roman)'인데 이 역시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는 말
이다. 로마네스크 시대와 중세의 고딕 시대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출발한 낭만주의 사상은 18세기 중엽 계
몽주의의 발전과 그 맥락을 함께 한다. 기존의 종교 혹은 불합리한 제도에 반발하여 사람들은 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거나, 아니면 감성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 모두 공통으로 갖고 있었던 욕구는 바로 '자연으로의 회귀'였다. 합리주의자들은 자연이란
이성의 가장 근원적인 형태라고 이야기했으며, 낭만주의자들은 억제되지 않고 늘 변화하는 자연을 숭배했다.
또한 자연의 모습을 통해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고, 과거의 문명에 대한 향수와 그 아름다움을 예
찬하였다. 진경(珍景)이 토대가 된 낭만적인 풍경화들은 광대한 공간감과 자연의 변화,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감상을 느끼게 해주었다. 바다의 거친 풍랑, 산악 지방의 험한 산맥 등 자연의 내재된 에너지를 표현한 풍
경화들은 자연이 인간에게 전달하는 다양한 감정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며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낭만주의
회화의 대표적 이미지로 자리 잡는다. 이로써 영국 풍경화는 자연에서 느끼는 비장감, 장엄미 등을 보여주
는 그림과 단순히 아름답고 감상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두 가지 종류의 새로운 미학을 형성하게 된다.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의 대표적 작가로 잘 알려진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 존 에버렛 밀
레이(Sir John Everett Millais:English Pre-Raphaelite Painter, 1829-1896)가 그린 이 풍경화는 스코틀
랜드의 '버넴 협곡'을 그린 작품이다. 해 질 녘 협곡의 구불거리는 숲길을 걷는 여인의 뒷모습과 풍경은
안정된 구도와 서정적인 색으로 묘사되어, 자연이 주는 편안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고 있다.
Glen Birnham(버넘 협곡), 1891
by 존 에버렛 밀레이(Sir John Everett Millais:English Pre-Raphaelite Painter, 1829-1896)
존 에버렛 밀레이는 1848년에 결성된 라파엘전파의 주요 3대 화가 중 한 명으로 활동했던 시기부터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배경으로 한 인물의 모습이나 순수한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주로 그렸다.
그가 커다란 크기의 화폭에 순수한 자연의 모습만을 담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에 들어서부터였다.
물론 이 시기에도 간간이 이 작품에서처럼 우연히 등장하는 듯한 인물들을 풍경 속에 등장시키기는 했다.
그는 풍경을 그리면서 쏟아지는 초상화 작업 의뢰로부터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실제로 말년에 들어서 그는 초상화가로서 큰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특히 그의 대부분의 수입원이 바로 초상
화 판매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풍경화는 그에게 있어서, 순수하게 자
연을 접하는 일종의 안식처였던 것이다. 추상화가로 명성을 쌓던 시기에도 그는 꾸준하게 자신의 풍경 작품
들을 전시했으며, 이 작품 역시 1891년에 왕립 아카데미에서 이러한 목적으로 전시되었다.
밀레이가 스코틀랜드를 방문하고 그곳 풍경을 사랑하게 된 것은 1853년 여름에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이 그를 스코틀랜드로 초청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존 러스킨은 에피라는 여인과 결혼을 한
상태였으며,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하기 위하여 밀레이를 스코틀랜드 고원으로 초청했던 것이다.
에피는 곧 러스킨과 결별했으며 이후 밀레이와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1855년 결혼에 이르게 된 두 사람은
그녀가 나고 자라난 퍼스 지방 부근의 보워스웰에서 1857년까지 머물렀다. 당시 운동하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1873년, 스코틀랜드에 사냥과 낚시를 하며 풍경화를 그릴 수 있는 집을 한 채 빌리기도 했다.
그는 특히 퍼트셔의 테이 강 유역에 있는 버넘과 던켈드의 마을 풍경을 좋아했는데, 1881년부터 1890년까지
는 가족들과 함께 버넘 홀에서 늦여름과 가을을 보냈다. 겨울 풍경을 담은 이 작품은 밀레이가 버넘 홀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던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그리고 그가 특별히 사랑했던 지방의 풍경을 그린 그의 모든 작
품들 중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밀레이를 잘 알고 있었던 어린이 책의 저자이자 삽화가인 베아트릭스 포터
는 이 작품에 대하여 1892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버넘 홀을 무척 사랑했던 밀레이는 그곳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마음에 무척 아쉬워했다. 작품 속에서 뒤돌아 서 있는 애절한 모습의 인물은 마치
그곳을 떠나야 하는 그의 안타까운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자두, 복숭아 그리고 헤이즐넛(Plums, Peaches and Hazelnuts)
by 윌리엄 헨리 헌트(Willam Henry Hunt:English Painter, 1790~1864)
>> 과학의 발달과 객관적 관찰
미술사학자이자 비평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은 그의 [근대 화가들 제4권 Modern painters
Vol.4, 1856]과 1857년 발간한 화가들을 위한 지침서인 [드로잉의 요소들 The Elements of Drawing]에서
"화가들은 최대한 근접하여 자연을 관찰함으로써, 자연 세계의 다양한 면을 보여주어야 한다."라고 했다.
18~19세기에 들어서 합리주의 정신과 함께 발전하게 된 과학 분야에서 화가들은 자연현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기록하는역할을 담당했다. 과학자들은 화가들과 한 팀을 이루어 자신들이 발견한 혹은 발견할
자연의 현상들에 대해서 시각화된 자료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화가들로 하여금 좀 더 자세
하고 세밀한 관찰을 통한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있는 그대로 자연을 표현하는 것이 자신의 작업 목표라고 했던 컨스터블이 즐겨 읽던 책이 길버트 화이트
(Gilbert White)의 [셀번의 자연사 Natural History of Selbourne, 1789]라는 점은 이러한 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컨스터블은 자연에 대한 이러한 관심을 곧바로 자신의 작품에 적용하여, 나
무의 구조를 세세하게 분석하거나 자연현상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구름 연구(Study of Clouds)
연작은 이러한 관심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존 러스킨은 1847년의 [드로잉의 요소들]에 이 작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윌리엄 헨리 헌트의 과일 작품들의 화려함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순수한
색채들의 병렬 효과를 통해 나타난다. 헌트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 목적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그의 세
세한 관찰에 따른 적절한 화법은 존경받을 가치가 충분한 모범적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타인머스(Tynemouth), 1822
by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
>> 영국 풍경화의 계승과 영향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의 배경 정도로 인식되었던 풍경화는 약 200년의 세월이 지나 영국에 이르
러 하나의 대표적 회화의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자연 풍경
에 대한 습작이 그 자체의 목적이 되어 전시회에 출품할 수 있게 되면서, 한 세기가 넘게 지속되어 온 풍
경화의 변화를 위한 투쟁이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와
존 컨스터블은 현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되는 영국의 위대한 풍경화가들이다. 자연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영국 특유의 소박한 풍물을 묘사한 컨스터블이 발견한 밝은 색채감과 초록색은 터너와 함께 근
대 풍경화의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영국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던 그의 색의 사용은 들라크루아를
비롯해 프랑스 인상파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터너 역시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빛과 색
에 대한 연구를 통해 수많은 풍경화를 남겼다. 특히 컨스터블이 초록색의 발견자라고 한다면, 터너는 하
얀색의 화가로서 그의 배경의 밝은 부분에 사용된 하얀색 밑바탕 작업은 인상파 화가들의 밝은 색면 처리
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 모두, 풍경화를 새로운 권위의 중심에 끌어올리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했다.
그들은 붓과 물감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도 하고, 눈앞에 보이는 사실에 대하여 정직하게 탐구하고 세
심하게 묘사했다. 이들의 작품은 영국 근대 풍경화의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결과물임과 동시에, 새
로운 시대의 등장, 즉 자연의 빛을 화폭에 담고자 했던 인상주의와 영국 근대 회화와의 연관성을 잘 드러
내 준다. 자연의 진실에 좀 더 다가가려 했던 영국 근대 풍경화는 풍경화를 단순히 보이는 풍경들의 묘사
하는 개념으로 출발하여, 자연의 숭고미와 주변의 소소한 아름다움의 발견이라는 두 가지의 차별되는 아
름다움의 개념을 만들었다. 또 다른 한편 그들이 자연으로부터 얻은 빛과 색채의 연구는 시각적 예술로서
의 근대 회화 개념의 시작을 알리는 초석이 되었다. 결국 영국 근대 풍경화를 통해서 후대 화가들은 신화
와 역사에 의존했던 그림의 소재와 아름다움을 다양화할 수 있었고, 회화의 기법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영국 근대 풍경 회화의 요소들을 통해서 우리는 독립적인 회화 장르로서의 풍경화의 발전 과정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상주의를 비롯한 근대 회화에 미친 영향력의 발판을 이해할 수 있다.
휘트비 수도원(Whitby Abbey), 1875년경
by 월터 크레인(Walter Crane:English Artist and Book Illustrator, 1845~1915)
II. 픽처레스크(Picturesque)
우리는 근사한 풍경이나, 멋진 광경을 바라볼 때 '그림 같은 풍경'이라는 말을 자주 쓰곤 한다.
'그림 같은 풍경'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아름답다'와 '그림 같다'는 말로 풀이될 수 있을까?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과연 어떤 것이 다른 것이며, '그림 같은'에 표현되는 '그림'에 해당하는 그림은
어떤 것일까? '그림 같은' 혹은 '그림이 될 만한'으로 해석될 수 있는 '픽처레스크(Picturesque)'라는 말
은 1782년 윌리엄 길핀(William Gilpin)이 쓴 [와이 강과 남웨일스 지방의 관찰기Observations on the
River Wye, and Several Parts of South Wales, etc. Relative Chiefly to Picturesque Beauty; made in
the Summer of the Year, 1770]에서 처음 쓰인 용어이다. 이 책은 영국으로 취미 여행을 즐기러 가는 사람
들을 위한 지침서로, 그는 이 책에서 '그림과 같은 아름다움의 방식으로 시골을 마주하는 방법(The face
of a country by the rules of picturesque beauty)'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는 중세 고딕과 켈틱 문화에
대한 문화적 향수와 더불어 18~19세기 낭만주의 유행과 함께 그 의미가 확장되고 보편화되었다.
휘트비 수도원은 중세 고딕 수도원의 폐허들을 즐겨 그렸던 낭만주의 화가들이 자주 소재로 삼았던 장소로
서 월터 크레인(Walter Crane:English Artist and Book Illustrator, 1845~1915)뿐만 아니라, 윌리엄 터너
역시 휘트비 수도원을 찾아 그곳 폐허의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사실, 픽처레스크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
해서는 두 가지 미학적 개념, 숭고함(Sublime)과 아름다움(Beautiful)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연이 내뿜는 다양한 모습과 그의 무한한 모습에 빠져들곤한다. 자연이 빚어내는 풍경은 매 순간
마다 변화하는데, 어느 순간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그림처럼 아름답다'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자연에 매혹되는 순간, 우리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는데 우리가 느끼는 이러한 경외심을
다른 표현으로 '숭고미'라고 부를 수 있다. 에드먼드 버크와 칸트의 정의에 따르면, 매혹적인 아름다움과
숭고는 다르며, 이러한 숭고미는 어떠한 이성적 판단의 결과물은 아니다. 풍경의 구도에 대한 책을 쓴 르
네 루이 지라댕 후작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인간의 눈을 매혹하는 '픽처레스크'한 풍경으로부터 이
윽고 영혼을 매혹하는 철학적인 풍경이 만들어진다." 한편, 18세기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
:1723~1792)는 픽처레스크를 이렇게 정의하기도 했다.
"픽처레스크란 아마도 '취향'의 동의어일 것이다."회화의 역사에서 '픽처레스크'라는 정의에 가장 먼저
충실했던 화가는 17세기 로마에서 활동한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1600~1682)이라고 할 수 있다.
로랭은 엄격하고 정확하게 풍경을 묘사했던 푸생과는 달리, 자연을 직접 관찰하면서 얻을 수 있는 빛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그림 전체 풍경을 중간톤 계열의 색조를 통해 조화롭게 묘사했다. 그의 그림은 베르
길리우스가 이야기했던 이상적이며 조화로운 세계인 아르카디아를 표방하며 고전주의와 서정적인 분위기를
특징으로 한다. 로랭의 풍경은 17세기 이후 수많은 화가들에게 있어서 마치 '풍경화의 교본'처럼 회자되었
고, '그림이 될 만한'이라는 단어로 수식되는 풍경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특히, 영국 풍경화에서 그의 영
향력은 막강했는데, 특히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클로드 로랭에 대한 예찬은 수많은 에피소드를 통
해서 전해 내려올 만큼 유명하다.
영국 호수 풍경(An English Lake), 1851
by 헨리 도슨(Henry Dawson:1811~1878)
헨리 도슨(Henry Dawson)의 이 작품은 영국의 호수 지역에 있는 넓은 호수들 중 한 곳을 담은 것이다.
이 지역은 얼스호수(얼스워터)나 윈더미어 등 호수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주변 산들이
이루고 있는 풍경이 보여주는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작품 속에는 두 명의 인물들이
그려져 있는데, 여인은 붉은색 모자를 쓰고 손에는 책 혹은 스케치북을 들고 있으며, 어두운 색 외투를 입
고 있는 남자는 여인의 뒤에서 눈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을 응시하고 있다. 그림을 통해 픽처레스크 풍경을
찾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이 찾은 아름다운 풍경을 상상할 수 있다. 18세기에 유행한 '그랜드 투어
(Grand Tour)' 형식의 고대 문화 기행은 이러한 숭고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
다. 왕족 혹은 귀족들이 외국을 여행하며 이러한 고대 문명의 낭만을 찾아다니는 동안, 일반 대중들 사이
에서는 도시를 떠나 지방의 자연과 풍광을 쫓으려는 픽처레스크 여행(Picturesque Tour)이 유행했다.
문학에서부터 발전하게 된 자연과 야생 그대로의 풍경의 아름다움에 대한 낭만주의적 예찬은 이러한 대중
적 여행의 붐과 더불어 회화에서도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많은 영국 화가들은, 아마추어든 직업적인 화가
든 그림의 소재를 찾기 위해 떠나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풍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그려진 토마스 롤랜드슨(Thomas Rowlandson:English Artist and Caricaturist, 1756~1827)의 에칭화를
보면, 허구의 인물인 신택스 박사(Dr. Syntax)가 시골 탐험 도중 위험과 불편함을 겪는다는 이야기가 그려
져 있는데, 신택스 박사는 당시의 수많은 영국 화가들을 풍자하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이렇듯 사람들은 아
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지침서를 들고 찾아가려 했다. 출판업자들은 이러한 지침서를 좀 더
그럴듯하게, 마치 고대 아르카디아의 모습처럼 꾸미고자 했고 화가들은 그러한 출판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
기 위하여 '그림 같은 풍경'을 그렸다. 픽처레스크 사냥꾼이라고 불렸던 이러한 화가들 또는 아마추어 작가
들은 모두들 하나같이 영국 호수 지역(Lake District)에 모여 '클로드 유리(Claude Glasses)'를 들고 아름
다운 풍경을 찾아다녔다. '클로드 유리'란 코팅된 흑색 볼록 거울로서 클로드 로랭이 고안한 것인데, 그것
을 통해서 풍경을 바라보면 전체적으로 색은 낮은 톤으로 보이고 초점은 약간 흐릿해진다. 클로드 로랭의
그라데이션 기법과 환상적인 그림을 통해서 '아름다운 풍경'을 경험한 영국인들은 그가 그렸던 것과 같은
풍경화를 얻고자 이 유리를 가지고 '그림과 같은 풍경'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맸던 것이다.
'클로드 유리' 보급자인 길핀은 이 유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유리는 우리에게 자연의
사물을 한층 부드럽고, 그윽한 색채로 바라보게 한다. 마치 거장의 색채처럼…."
신택스 박사의 호수 스케치, 1819
by 토마스 롤랜드슨(Thomas Rowlandson:English Artist and Caricaturist, 1756~1827)
>> 새로운 픽처레스크 풍경의 등장
18~19세기는 영국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다. 이러한 급격한 사회의 변화는 사람들의 시각을
빠르게 변화시켰다.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마음의 위안을 찾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이루어지는 도시에
빠르게 적응해갔고, 화가들은 자연의 정적인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도시의 활기와 그 속의 아름다움을 발견
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외국 여행을 자주 했던 화가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들이 많았다.
터너의 말년 작품인 베네치아 풍경을 통해서 물의 도시로 잘 알려져 있는 베네치아를-물론 이전의 베두테
(Vedute)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던 풍경을-조금 더 낭만적인 시각에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터너는 더 나
아가 증기선이 증기를 뿜어내는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세밀한 묘사보다는 증기선에서 뿜어나
오는 증기와 하늘, 그리고 지평선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표현했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새로운 풍경의 등장을 알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국적인 풍경을 다수의 그림으로 남
긴 데이비드 로버츠(David Roberts)가 스페인에 머물 당시 그린 이 작품은 당시 전형적인 픽처레스크 풍경
이라고 불리는 자연의 풍광이 아닌 스페인 중소 도시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도시의 모습이지만, 수채화 특
유의 투명함과 은은한 색조를 이용한 약간 바랜 듯한 화면의 처리는 이전의 낭만주의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발렌시아의 미겔레테 종탑(El Micalet, Valencia), 1832
by 데이비드 로버츠(David Roberts:1796~1864)
>> 이상적인 세계의 모방, 그리고 변모
아주 오랜 역사 속에서부터 사람들은 모두 이상적인 사회, 살기 좋은 시기를 꿈꿨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하
여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특히 서양에서는 이러한 세계를 '아르카디아'라는 신화 속의 세계로 대표하고 있
다. 서양 풍경화, 특히 영국 근대 풍경화 발전의 기반이 되었던 이러한 픽처레스크화의 발전은 바로 이러한
'아르카디아' 탐구의 결정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아르카디아'는 고정된 하나의 세계가 아니다.
끊임없이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매 순간을 통해 변모해 온 것처럼, 이상적인 사회인 '아르
카디아', 그리고 그를 닮은 '픽처레스크' 풍경 역시 변화를 거듭했다. 픽처레스크화는 18세기 영국을 비롯한
낭만주의 풍경회화의 전형에 대한 의미로 한정되었지만, 이러한 '아르카디아'의 탐색은 19세기 인상주의 화
가들에 의해서 계승되었으며, 조슈아 레이놀즈가 얘기했던 것처럼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아
름다움에 대한 취향'을 보여주고 있다.
Venice, The Rialto(베네치아:리알토다리), 1820~21
by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English Romantic Painter, 1775~1851)
III. 제 1장: 자연의 진실 - 순수 풍경과 자연
Pure Landscape Subject and Nature
전통적인 회화 장르에 있어서, 신화나 종교에 대한 주제를 담은 작품들은 그 자체로 고상하다는 평가를 받으
며 높은 서열을 차지하고 있었던 반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주제로 그린 '장르화'라고 불린 회화는
비교적 낮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을 담은 풍경화는 심오한 주제 의식
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가장 낮게 평가되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영국화파가 미술을 주도해 왔던 영국은 다
른 유럽 국가들보다 이러한 전통적 회화의 서열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의 유
럽 국가에서는 회화가 종교적인 도구로 활용되었던 반면, 영국에서는 그러한 분위기가 거의 없었을 뿐만 아
니라, 파리나 로마 등지에서 이루어졌던 아카데미적인 미술 교육 체계가 런던에서는 굳게 자리 잡힌 적이 없
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영국 화가들의 화풍은 유별나거나 체계적이지 않게 보일 수밖에 없었으며, 간
간이 전시회에 출품되는 영국 화가들의 작품들에 대한 평가 역시 일관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아카데미적인 단일화된 체계가 확립되지 않았고 고급 예술에 대한 수요가 늘지 않았던 상황하에, 영국에서는
초상화와 풍경화의 두 영역이 특징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대다수 영국 화가들은 후원자로부터 경제적인 지원
을 받았으며, 그 대가로 후원자 및 그 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거나 후원자와 연관되어 있는 장소의 풍경화를
그려 주었다. 이렇게 풍경화라는 장르가 영국에서 특수하게 발전해 나가는 동안, 풍경화를 바라보는 시선도
점차 달라지게 되었다.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애정, 그리고 계절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 하는 전원의 풍경에
대하여 사람들이 열광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은 순수 자연 풍경 회화에 대한 전통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시야가 넓게 트인 시골의 풍경은 사회 계층을 막론한 모든 사람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여 사회적인
부를 축적한 상류층의 사람들은 런던과 같은 대도시에서의 복잡한 삶보다는 시골의 넒은 사유지를 구매하여
그곳에서 영위하는 한가로운 삶을 선호하게 되었으며, 상류층은 아니더라도 대도시에 거주하는 일반 사람들
역시 자신의 선조들이 생활하던 시골의 환경에 대한 아련한 향수에 젖어 들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들은 영국인들로 하여금 풍경화에 더욱 깊은 애정을 갖게 만들었고, 나아가 익숙한 주
변의 풍경이나 이국적인 풍경을 그린 화가들의 작품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고취시켰다. 결과적으로 점점
더 많은 영국 화가들이 풍경화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가졌던 화가들조차 경제적인 이
유나 개인적인 위안으로써, 혹은 감정 표현의 수단으로로써 풍경화를 자주 그렸다. 어떠한 장소에 대한 특정
한 부분을 부각시키거나 인간 생활에 대한 관찰에 초점을 두었던 그림들에 비하여, 순수한 자연 자체를 소재
로 다루었던 화가들은 자신들이 눈으로 관찰한 풍경에 대한 지질학적인 정보를 얻기 위하여 좀 더 심도 있는
조사나 연구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영국의 풍경화는 더욱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발전을 거듭
하게 되었다. 더불어 자연의 모습을 좀 더 사실적으로 화폭에 담기 위하여 화가들은 부단히 색채와 질감의
회화적 표현의 새로운 시도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풍경화를 자신의 미학적 실험에 박차를 가하는 도구로
여기기도 했다. 풍경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날씨의 변화및 빛의 효과는 화가들이 색채와 질감 표현에 있어
서 추상적인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즉, 영국 화가들에게 있어서 풍경
화는 곧 정신적인 안식처이자 명상의 영역이었으며, 나아가 새로운 회화적 시도를 가능하게 한 창조적인 도구
이기도 했던 것이다.
햄스테드의 브랜치 힐 연못(Branch Hill Pond, Hampstead), 1820
by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English Romantic Painter, 1776~1837)
1819년 여름, 존 컨스터블은 런던의 뜨거운 열기와 탁한 공기에서 벗어나 자신과 가족을 위한 인식처로 햄스
테드 지방에 '앨비언 커티즈'라고 불리는 집을 한 채 빌렸다. 1826년까지 컨스터블은 햄스테드 안에서 여러
차례 이사를 했으며, 1827년에는 그곳 웰워크 마을에 직접 집을 지어 생활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햄스테드를
사랑했던 그는,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햄스테드'라고 표현해 마지 않았던 그곳 풍경을 담은 작품들
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또한 그는 햄스테드에서 많은 작가들, 화가들과 친분을 맺기도 했는데, 윌리엄 콜린
스 및 존 린넬과는 이웃으로 지내기도 했다. 컨스터블은 1820년대 초반에 햄스테드 히스의 광활한 초원을 담
은 많은 작품을 그렸다. (햄스테드 히스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런던의 공원이다.) 작품 속에는 앨비언 커티즈
바로 옆에 있는 화이트스톤 연못에서 바라본 풍경이 담겨 있는데, 작품의 중경 왼쪽에는 브랜치 힐 연못의
넓은 수면이 보인다. 풍경은 북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오른쪽에 보이는 '솔트 박스'라고 불리는 건물을 포함
하여 사람들의 눈에 익숙한 다양한 건물들이 그려져 있다. 또한 저 멀리 우측 지평선 부근에는 해로우 마을이
보인다. 전경에는 채석장에서 자갈을 채취하여 마차에 싣고 가는 일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컨스터블은 햄스테드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광활한 지형의 풍경, 다시 말하면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이고 드넓
은 하늘이 펼쳐져 있는 풍경을 통해,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야콥 반 루이스달 및 얀 뵈이낭스(Jan
Wijnants:Dutch Painter, 1632~1684) 등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거장들이 그린 풍경화 형식을 마음껏 시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 속에 과거 전통적인 풍경화의 형식이 그대로 답습되어 모호하게 반영되지는
않았다. 컨스터블은 전통적 풍경화의 전통에 스스로 구축한 개념과 직접 풍경을 관찰한 결과를 더하여 새로운
풍경화를 시도하고자 노력했다. 이후 컨스터블은 과거의 전통이나 선례를 참고하는 대신, 자신이 직접 관찰한
경험에 의거하여 영국의 풍경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을 화폭에 담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앗다.
그의 단 한 가지 목적은 '나를 사로잡는 자연 풍경을 아무런 외부의 영향 없이 순수한 그 자체의 모습으로 표
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유화의 기법만이 풍경 속에 비치는 빛의 끊임없는 변화를 포착할 수 있음을
깨닫고 이를 표현하는 데 점점 더 몰두했다. 이 작품 속에서 하늘 위로 지나가는 먹구름은 전경의 왼쪽 부분
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컨스터블은 이곳 햄스테드에서 1821년부터 1822년까지 날씨의 변화에 따라 변화
하는 순수한 구름의 습작을 연속적으로 그렸다. 이렇듯 그의 신속한 야외 작업을 통해 얻어진 풍경화들 중 세
점이 1824년에 파리에서 열린 [영국 화가들의 살롱전]에 출품되었을 때, 프랑스의 대중 및 비평가들은 그 작
품들에 큰 감동을 받았으며, 이 작품들 중 하나가 당시 대상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
인 외젠 들라크루아는 컨스터블을 가리켜 '프랑스 풍경 회화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햇으며, 이후 컨스터블
의 작품들은 프랑스의 미술 중개상들에게 불티나게 팔리게 되었다.
에든버러 근처의 크래몬드(Cramond, near Edinburgh)
by 패트릭 네이스미스(Patrick Nasmyth:Scottish Painter, 1787-183)
패트릭 네이스미스는 1807년부터 계속 런던에 살았지만, 그가 전시한 작품들의 목록에 정기적으로 스코틀랜드
의 풍경을 담은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종종 그림을 그리러 다녔음을
알 수 있다. 풍경화가로서 네이스미스의 독창적인 실력을 엿볼 수 있는 이 작품은 마치 17세기 네덜란드 풍경
화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특히 야코프 판 라위스달(Jacob van Ruysdael:1628?~1682)의 작품을 연상하게도 하
면서, 마인데르트 호베마(Meindert Hobbema)의 작품과도 무척 유사한 특성을 지닌다. 운집해 있는 나무들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세심하게 묘사된 다양하게 뒤틀려 있는 나무 줄기, 밝게 빛나는 서쪽 하늘에 반해 어두운
실루엣 속에서 의도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나무들은 네덜란드 풍경화에 매료되어 있던 당시 소장가들의 눈에
띄도록 네이스미스가 치밀하게 계산한 회화적 장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 덕분에 그는 네
덜란드 풍경화의 전통을 잇는 19세기의 풍경화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자주색 자두, 녹색 자두, 블랙베리와 들장미 열매
(Plums, Greengages, Blackberries and Rose-hips)
by 윌리엄 헨리 헌트(Willam Henry Hunt:English Painter, 1790~1864)
이 자연주의적인 풍경화는 영국 시골의 과수원에서 늦여름이나 초가을쯤 볼 수 있는 과일들을 모아 놓은 듯하
다. 윌리엄 헨리 헌트의 수채화 기법은 후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영국 당대 최고의 수채화가이
자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인 풍경을 담아낸 화가로 손꼽히고 있는 마일즈 버켓 포스터와 프레데릭 워커는
특히 헌트의 열렬한 추종자들이었다. 1879년 겨울, 비평가 존 러스킨은 풍경화가 새뮤엘 프루트가 그린 건축적
풍경화들을 헌트의 수채화들과 함께 전시했다. 이 전시를 통해 러스킨은 '진정한 회화는, 엄밀히 말하면, 감정
이나 배경 스토리에 대한 조사가 없어도 그려지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는데, 헌트의 수채화를 통
해 그는 이러한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말년에 들어서, 그는 자기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애잔한 설명을 언급하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포도나 사과를 그리는 데 열중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단지 '먹고 싶다'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심혈을 기울인 색채 표현 그 자체를 좋아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노스 웨일스, 모엘 시아보드 근처의 풍경(Landscape Near Moel Siabod, North Wales), 1855
by 조지 프라이스 보이스(George Price Boyce:1826~1897)
조지 프라이스 보이스는 원래 건축가였으며, 그가 그린 초기의 연필 드로잉들은 대부분이 건물들이나 건물 장
식용 요소였다. 1849년 8월은 이런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계가가 되는 시기엿는데, 휴가를 맞이하여 노슨 웨일
스 지방을 방문했던 그는 화가 데이비드 콕스(David Cox:1783~1859) 를 만나게 되었고, 그로부터 수채화에 대
한 정보와 지침을 받게 되었다. 이 만남 이후 보이스는 건축일을 그만두었으며, 외골수적이면서도 완벽주의적
특징을 가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작품 제작시기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가
웨일스 지방에 두 번째 머물던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모엘 시아보드는 베투스-어-코이드의 서쪽 지
역에 있는 스노든 산의 동쪽 봉우리이며, 그 높이가 872미터에 달한다.
바위 습작, 참나무가 있는 카펠 큐릭(Rock Study:Capel-The Oak Bough), 1857
by 알프레드 윌리엄 헌트(Alfred William Hunt:English Painter, 1830~1896)
이 작품은 구도상 우측 상단에 지붕 모양을 이루고 있는 참나무의 신선한 녹색 잎들과 아래쪽 침식된 바위 위
로 비치는 투과된 빛의 표현으로 볼 때, 알프레드 윌리엄 헌트가 초여름에 웨일스 북부 지방을 방문하여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리버풀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의 초기 작품들은 스노우도니아 지방이나 고지대 시골 마을의
풍경을 담고 있는 것이 많은데, 그 이유는 이 지역들이 북부 도시에서 비교적 접근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850년대 후반에 비평가 존 러스킨이 발표한 풍경화 이론을 충실히 따랐던 헌트의 화풍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전문 화가나 아마추어 화가들을 위하여 러스킨이 1857년 초여름에 출간했던 [드
로잉의 요소]라는 책에 헌트가 얼마나 심취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팽번의 흑양나무 숲(Black Poplars at Pangbourne), 1868
by 조지 프라이스 보이스(George Price Boyce:1826~1897)
조지 프라이스 보이스의 풍경에 대한 시각은 1860년대에 이르러 점차 독특해졌다. 특히 그의 시점과 풍경 범위
에 대한 주의 깊은 표현을 통하여, 풍경의 이질적인 요소들은 나란히 배열되어 서로 섞여 있는 듯한 느낌을 주
는데, 특히 초원 위에 높게 자라 있는 풀숲 속에서 반쯤만 보이는 황갈색의 '집'처럼 보이는 건축물은 인공의
느낌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자연적 요소로 보인다. 또한 화폭의 가장자리까지 꽉 차 있는 풀숲의 느낌은 밀페된
공간처럼 압축되어 있는 느낌을 준다. n영국 화가들 중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보이스
의 작품들은 오히려 사려 깊은 비평가들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특히 1864년 미술전문지인 [아트 저널]은
"보이스는 단순한 자연을 바라보는 올바른 눈을 가진 화가이다. 그는 자연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바탕으로 하
여, 자연을 변형하거나 조합하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당시 새롭게 결성된 화가들의 모임 중 하
나였던 '수채화가협회'에 소속되어 있었던 보이스의 미술 세계는 한마디로 '꾸밈없고 소박하다'라는 말로 표현
할 수 있다."라고 평했다. 그리고 2년 후, [아트 저널]은 그에 대한 또 다른 평론을 다음과 같이 게재했다.
"보이스는 자신의 화폭에 그릴 풍경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그릴 만한 대
상이 없을 것 같은 곳에서도 빼어난 스케치를 해낼 정도로 그는 현명했다."
이 작품에서는 드리워진 그늘로 인하여 다양한 느낌을 보여주는 초록색의 향연을 감상할 수 있다. 전경의 풀밭
과 묘목 뒤로 여름의 무성한 잎들과 후경에 보이는 숲의 짙은 색감에서 다채로운 초록의 표현이 눈에 띈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붉은 지붕의 건물과 다리, 소, 그리고 닭을 쫓아 달려가는 스파니엘 견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저녁 무렵 강가 풍경(River Landscape with Evening Sky),
by 에드워드 달지엘(Edward Dalziel:1817~1905)
에드워드 달지엘의 이 작품은 저녁 노을이 잔잔히 빛나고 있는 강가의 풍경을 담고 있다. 나무로 뒤덮여 있는
지평선이 펼쳐져 있고, 지붕 위로 종탑이 솟아 있는 교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두 그루의 주목나무 가
까이에는 교회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쪽문이 보인다. (주목나무는 중세시대 때부터 긴 활을 만들기 위한 목재
로 재배되기 시작했는데, 그 씨앗이나 나뭇잎에 독성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말들이나 양 떼가 먹지 못하도록
언제고 교회 영지에서만 재배되었다.) 1839년에 달지엘은 형 조지 달지엘과 함께 '달지엘 형제'라는 이름의
판화 회사를 설립했는데, 이곳에서 그들은 책이나 잡지, 혹은 간행물에 삽입되는 삽화들의 판화 작업을 했다.
이 회사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달지엘 형제는 스코틀랜드와 경계에 있는 잉글랜드의 최북단 카운티인
노썸벌랜드 출신이다. 이 작품 속의 풍경이 잉글랜드의 어느 지방을 그린것인지에 대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달지엘은 자신이 태어난 북부 지방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며 이 강가 풍경을 그렸을 것으로 예측된다.
비오는 날(Rainy Day), 1886
by 조지 클라우슨(Sir George Clausen:English Realist Painter, 1852-1944)
1880년경, 조지 클라우슨은 런던을 떠나, 런던 북쪽 하트퍼드셔 카운티에 있는 '칠드윅그린'이라는 마을로 옮
겨 갔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 화가 쥘 바스티앙 르파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시골스러운 형태의 대상'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하지만 때때로 순수한 풍경을 그리기도 햇다. 들판과 울타리 위로 하늘을 가득 덮고 있
는, 비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이 그려진 이 수채화는 클라우슨이 1886년에 빠르고 즉흥적으로 풍경을 스케치한
연작들 중 하나이다. 이 연작들은 각각 3기니(4.15 파운드)의 가격에 그의 후원자에게 팔렸다.
나무가 있는 풍경(Landscape with Trees)
by 새뮤얼 존 라모나 버치(Samuel John Lamorna Birch:1869~1955)
1906년부터 새뮤얼 존 라모나 버치의 작품들은 런던에 있는 순수예술협회에서 여러 차례 전시되었다.
특히 이 전시회에서 주목받았던 작품들은 햇빛이 찬란하게 표현된 수채 풍경화들이었다. 이 작품들 속의 풍경
은 그가 1896년부터 살았던 콘윌 지방의 해안이나 내륙 지방, 또는 그가 자주 여행했던 잉글랜드 및 스코틀랜
드, 웨일스 지역의 풍경들이었다. 열렬한 낚시광이기도 했던 버치는 낚시를 하면서 동시에 그림을 위한 사색
을 할 수 있는 장소를 항상 찾아 다녔고, 이런 이유로 그의 대부분의 풍경화 속에는 강가의 풍경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의 전경에는 나무가 줄지어 자라나 있는 갈색의 개울이 자리잡고 있다. 버치의 친구이자 화가였던 로
라 나이트는 "버치는 풍경 위로 펼쳐져 있는 그림자, 그리고 그림자를 쫓는 태양에 의해 순식간에 나타나는
바다나 개울, 바위 위의 표면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 수채 물감과 더불어 연필, 초크 등을 세심하게 활용했다."
라고 묘사했다. 실제로 이러한 그의 표현을 통해 작품 속 풍경은 세심하고 사실적일 뿐만 아니라, 영국 날씨
의 끊임없는 유동성을 성공적으로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콘월의 황무지(Cornish Moor)
by 어니스트 프록터(Ernest Proctor:1886~1935)
이 밝고 추상적인 수채화는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물과 그 뒤쪽으로 펼쳐져 있는 풍경을 담고 있다.
작품의 제목이 '콘월의 황무지'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이 작품이 언제, 어디서 그려졌는지를 정확하게 말
하기는 불가능하다. 잉글랜드 북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콘월 지방의 뉴린에서 살게 된 어니스트 프록터는
뉴린 화가 학교의 알렉산더 스탠호프 포브스에 의해 발탁되어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프록터는 그의 아내이자 화가인 도드 프록터와 함께 콘월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했지만, 주기적으로 해외여행
을 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 군대에 입대하였고, 그곳에서 서부전선의 풍경을 담은 많은 드로
잉을 그렸다. 이후 1920년대에는 미얀마로 가서 양곤에 있는 코카인 궁전의 장식을 담당하기도 했다.
1834년부터는 글래스고 미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쇼어햄(Shoreham), 1832년경
by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English Romantic Painter, 1775~1851)
IV. 제 2장: 하늘과 물의 풍경
Marines, Rivers, Lakes and Costal Subjects
영국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바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눈앞에 넓게 펼쳐진 바다, 해변으로 밀려
들어와 부서지는 파도는 오랫동안 음악이나 문학 등의 소재가 되었으며 회화에서도 자주 다루어졌다.
바다에 대한 예술가들의 관점은 여러 가지로 표현되었는데, 신비스럽고 상냥하며 풍부한 자원을 제공하는 자
연의 모습으로 비춰지거나, 또는 무한의 에너지를 지닌 '파괴'와 '위협'의 이미지를 지닌 존재로 표현되기도
했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바다의 매혹적인 모습은 화가들을 통해 '숭경화'라는 장르로 많이 그
려지게 되었다. 특히 조제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는 영국의 바다 풍경, 그리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방문했던
유럽 다른 나라들의 해안가 풍경을 작품 속에 담았다. 사실 화가들이 영국의 해안 풍경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
고 발전적으로 바다 풍경을 그리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799년부터 1815년까지 일어난 나폴레옹 전
쟁 동안에 어쩔 수 없이 생긴 영국의 고립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전쟁 중에 다른 나라를 여행하며 풍경을
관찰 할 수 없었던 화가들은 대안으로 국내의 풍경을 탐험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영국의 자연 지형 특히
바다에 대한 특별한 인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해협은 그 폭이 34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좁기 때문에, 영국의 도버에서 건너편 프랑스의 북부 지역은 육안으로도 확인이 될 정도이
다. 하여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에 영국 해협 주변에는 매우 강력한 방어 요새가 많이 축조되었는데, 유명
한 요새인 마텔로 타워도 1803년에 영국의 남동쪽 해안에 세워진 것이다. 이렇게 해안가에 설치된 요새들은
당시 화가들의 작품 속에서 간간이 찾아볼 수 있지만, 대부분은 이 시설들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요새 자체가 지닌 군사적인 기밀이 화가들의 사실적인 풍경화를 통해 유출될 수 있다라는
기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영국이 막강한 해상력을 장악하고 외부로부터 침입을 막을 수 있었던 배경에
는 이러한 방어 요새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이에 요새들은 단순한 풍경 속 건축물이 아닌 군사적 요
충지 그 자체였다. 하지만 1851년경에 이르러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프랑스 정권이 다시 강화되고 프랑스의
군대가 침략 전쟁에 집중하면서 화가들은 영국 해안가의 방어 대책의 실상에 대한 우려를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홀만 헌트가 1852년에 그린 <우리의 영국 해안>이나 F.G. 스티븐이 그린 <헤이스팅스 근교의 서식 스 풍경>과 같은 작품 속에는 외국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방어벽이 전무한 국가의 국방 상태를 풍자하고 있다.
1859년부터 1860년 사이에 제작된 포드 매독스 브라운의 작품 <윌튼 온 더 네이즈>에서도 역시 바다를 통해
들어올 수 있는 외침 가능성에 대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영국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묘사했다.
이 작품 속에서 폐허처럼 묘사된 마텔로 타워 및 당시의 영국 해군을 상징하는 듯한 구식 선박의 모습은 영
국 해군의 기량이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음을 표현한 것라고 할 수 있다.
협곡의 거친 물결 한가운데(Mid the Wild Music of the Glen), 1888
by 닐스 뮐레르 룬(Niels Moeller Lund:1863~1916)
18~19세기의 영국의 경제는 모든 종류의 해상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에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교역의 절반 정도는 영국 상선에 의해 이루어졌
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국의 선박 건조 기술은 발달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Isambard
Kingdom Krunel)과 같은 기술자들은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전성기를 누렸다. 윌리엄 클락슨 스탠필드 및 에
드워드 윌리엄 쿡과 같은 바다 풍경 전문 화가들은 작품 속에 다양한 종류의 최신식 선박의 모습을 그려 넣
음으로써, 이름을 알리고 생계를 유지했다. 선박의 발달과 더불어, 당시 영국 해안에는 항구 및 둑의 정비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많은 방파제와 등대가 축조되기도 했는데, 이는 모두 항해를 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번 전시에 소개된 알프레드 윌리엄 헌트의 작품
<타인머스 방파제의 건설 현장의 천정 크레인과 잠수종>은 영국 북해 해안 연안 타인 강 어귀의 방파제 건
설 현장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또한 많은 화가들은 폭풍우를 헤치고 항해를 하거나, 폭풍우를 피해 항구에
정박해 있는 어선들의 모습 역시 작품 속에 많이 표현했는데, 특히 이번 전시에 출품된 코플리 필딩의 작품
들 속에서 이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다 풍경 전문 화가들 외에도 영국의 섬 풍경 및
외국의 강이나 호수의 모습을 자주 다른 화가들로 많이 있다. 그중에서 특히 이번 전시에 소개된 헌트의 작
품 <동틀 무럽 고요한 호수>는 작품 속 여리고 가벼운 대기의 표현을 통하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온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거친 날씨, 돌풍이 부는 날(Rough Weather:A Squall Coming on), 1830년대
by 앤소니 반다이크 코플리 필딩(Anthony Vandyke Copley Fielding:1787~1855)
1830년대에 앤소니 반다이크 코플리 필딩은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풍경이나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나간 배들
의 모습, 또는 항구에 정박하는 배들이 있는 풍경을 많이 그렸다. 이 작품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점점
악화되는 날씨 속에 항구로 돌아가기 위하여 거친 파도와 싸우는 작은 어선의 모습을 담고 있다.
거친 파도 속에서 물 속으로 거의 기울어진 채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돛의 모습을 통해, 바람의 강도가 실
제로 느껴질 만큼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필딩은 이런 종류의 바다 풍경을 자주 그렸는데, 1830년대에는
특히 그의 이런 작품들이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많이 팔렸다.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을 감상한 소장가들이
나 비평가들, 그리고 관람객들은 모두 그의 해안 풍경에 깊은 관심을 드러냈는데, 이는 당시 영국이 해안
무역을 주업으로 삼는 해양 국가로서, 연안의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관련 산업들에 영국 경제가 의존하고 있
었던 지역적, 사회적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여 항해사들이 거친 바다에서 겪은 위험한 무용담
에 대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한 모든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강한 연관성을 느꼈으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덕분에 바다 풍경을 전문적으로 그렸던 필딩은 주목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필딩의 작품을 무척 좋아했던 미술 비평가 존 러스틴은 자신이 1843년에 발표한 저서 [근대 화가들]
속에서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기도 했다. "어떤 화가도 강한 바람에 의해 밀려 오는 거센 파도의 역
동성을 필딩처럼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했다. 그의 작품 속에는 바람에 의해 부서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
며 때로는 빨라지기도 하는 파도의 굴곡들이 우아하면서도 세부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텍셀 섬의 어귀|(The Mouth of the Texel), 1855
by 윌리엄 클락슨 스탠필드(William Clarkson Stanfield:1793~1867)
1850년대까지 윌리엄 클락슨 스탠필드는 영국의 화가들 중에서 선구적인 바다 풍경 전문 화가로 인정 받았으
며, 전시된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비평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영국 북해 연안의 항구도시인 선덜랜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배 위에서 보내기도 했던 클락슨 스탠필드는 바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만큼 바다
의 풍경에 대해서 한결같이 매력을 느꼈다. 나이가 들어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에 이르는
해안 도로를 따라 긴 대륙 여행을 했을 정도로 바다의 풍경은 그의 예술 세계에 있어서 많은 영감을 주는
모티프였다. 간간이 도시의 풍경을 그리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도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
도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역시 바다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 들이다.
이러한 그의 작품들에서는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가의 모습이나 항구나 강 어귀에서 폭풍우를 피해
안전한 은신처를 찾는 배의 모습들을 항상 찾아볼 수 있다.
강의 범람(The Rising of the River), 1867
by 존 린넬(John Linnell:English Romantic Painter, 1792-1882)
1850년대에 존 린넬은 건강이나빠지고 시력이 악화되면서 작품을 많이 그리지 못했다. 말년에 이르러 린넬은
폭풍에 휩싸인 풍경이나 드라마틱한 날씨 효과를 화폭에 담는데 몰두했다.
이 작품 속에서 보이는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강물은 둑을 무너뜨리고 초원을 뒤덮고 있다. 양치기는 양 떼를
높은 곳으로 몰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은 걱정스럽게 범람한 강을 바라보고 있다. 전경에는 쓰러진 나무 줄
기들이 널브러져 있으며, 오른쪽에는 잎이 무성한 나무가 폭풍에 휩쓸려 뿌리째 뽑혀 있다. 지평선 부근의
구름은 꼭 장대 같은 비를 쏟아낼 것처럼 잔뜩 흐려 있다. 린넬은 이 작품에서처럼, 인류가 자연의 힘 앞에
맞서 대항조차 하지 못하고 벌을 받는 듯한 주제를 즐겨 그렸는데, 이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강한 종교적인
신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에게 종말론적 계시에 의거한 신의 심판, 혹은
신의 의지와 같은 메시지를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노란 붓꽃이 핀 연못(Pond with Yellow Irises)
by 윌리엄 조제프 본드(William Joseph J.C. Bond:1833~1928)
윌리엄 조제프 본드는 이 작품에서 갈대로 둘러싸인 연못 수면과 더불어, 저 멀리 줄지어 서 있는 왜소한
나무들을 표현했다. 작품의 전경에는 야생 붓꽃들이 그려져 있는데, 붓꽃의 노란 꽃잎들은 뒤쪽에 어두운
수면의 색채와 대조를 이루며 더욱 밝게 부각되고 있다. 본드는 리버풀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당시 리버풀의 북부 지역에는 윌리엄 터너 및 라파엘전파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진보적인 풍
경 화파가 번성하고 있었다. 소위 '리버풀 화파'라고도 불렸던 이 화파에는 본드 뿐만 아니라 D.A. 윌리엄
슨 및 A.W. 헌트와 같은 풍경화가들도 소속되어 있었다. (이후 윌리엄슨과 헌트는 경력을 위하여 리버풀 지
방을 떠났지만, 본드는 결혼 후 잠시 캐마르폰에 정착했던 1860년대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리버풀
에 머물렀다.) 이 세 화가들은 '리버풀 아카데미'라고 불리는 전시 협회의 회원으로 함께 모이기도 했는데,
본드는 1856년에 이 협회의 준회원이 되었고, 이후 1859년에는 정회원으로 활동했다. 이들 리버풀 지방 출
신 화가들은 물기를 많이 담고 있는 듯한 색채를 능숙하게 다루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독특한 유화 채색 방
법을 선구적으로 개발하기도 했다. 흰색으로 칠해진 배경 위에 물감의 표면이 마르기 전에 다른 색의 물감
을 차례차례 덧칠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독특한 채색 방법이었는데, 이러한 방법은 작품 전반에 반짝이면서
도 신선한 느낌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풍경 속에 동요하는 빛의 강약이나 변화하는 날씨 표현에 있어서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스토브홀 근처의 테이 강(The Tay, near Stobhall), 1871년경
by 존 윌리엄 노스(John William North:1842~1924)
존 윌리엄 노스는 1870년대 초반에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윌리엄 그래엄의 초대를 받아 스코틀랜드를 방문했
다. 그래엄은 매년 여름을 퍼스 지방 내륙의 스토브홀 테이 강 부근 농가에서 보내곤 했다.
노스는 이곳에서 자연 요소가 가진 강한 힘에 매료되었으며, 작은 개울들이 넓은 테이 강으로 굽이쳐 흘러
들어가는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작품 속에 표현된 수면에는 크고 작은 돌과 바위들이 잔뜩 그려져 있
는데, 돌과 바위들은 하나같이 흐르는 물살에 깍이고 닮은 듯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전경의 바위 틈 사이
에서 자라난 헤더 한 무더기 외에 다른 식물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노스는 전문 삽화가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풍경 모티프를 작은 선 판화로 제작하는 일을 하기도 했는데, 이
러한 전형적인 경험들은 그를 당시 다른 화가들이 추구했던 강렬한 색상의 화풍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게 했다. 1850년대의 라파엘전파의 화풍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당시의 화가들은 자신들의 풍경 화풍을 노
스에게도 전하고자 노력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 작품에서 노스는 칙칙한 갈색과 회색을 주로 상용했
는데, 이렇듯 몇 가지밖에 되지 않는 엷은 색조만으로도 풍경을 충분히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
여주고 있다. 작품 속 풍경을 구성하는 모든 모티프들은 사실적으로 보일 만큼 생기와 활력이 넘쳐 흐른다.
콘월 연안의 트레보스 헤드(Trevose Head, Coast of Cornwell), 1881
by 존 브렛(John Brett:English Pre-Raphaelite Painter, 1831-1902)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초창기에 존 브렛은 알프스 산맥의 풍경을 꼼꼼하게 관찰하여 세심하게 묘사하였는
데, 특히 1856년에 그린 <로젠라우이 빙하 계곡>과 1858년에 그린 <아오스타 언덕>이 그중 가장 훌륭한 작
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후 1870년부터 그는 바다 풍경 쪽으로 관심을 돌렸는데, 특히 이때부터 매년 여
름마다 영국의 해안가를 돌며 여행을 했던 것이 그의 작품 활동 패턴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여름 동안에 해안가의 집을 빌려 거주를 하거나, 또는 요트 직접 바다를 항해하면서 수많은 생생한
유화 스케치를 남겼고, 이 스케치들을 바탕으로 겨울에는 자신의 아틀리에 안에서 큰 크기의 유화 작품들을
그렸다. 브렛이 1881년 6월 7일에 그린 이 작품은 그가 바다 풍경이나 바람의 효과에 대하여 관람자의 오감
을 자극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즉흥적 스케치의 전형적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이 그려진 날의 날씨는 맑았지만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는데, 작품 속에서 햇빛이 비추는 연안과 어
둡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부분을 통해 강한 바람이 몰아치는 바다의 느낌이 배가되고 있다.
이 작품은 콘월 주의 북부 해변에 있는 트레보스 헤드의 풍경을 담았다. 브렛은 트레보스 헤드에서 북쪽으
로 조금 떨어져 잇는 포스코던 마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 풍경을 그렸다고 한다.
강가의 풍경(River Landscape), 1890
by 알프레드 윌리엄 파슨스(Alfred William Parsons:1847~1920)
서머싯 지방에서 태어난 알프레드 윌리엄 파슨스는 젊은 시절 우체국에서 일하기 위하여 런던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 사우스 켄싱턴 스쿨에 입학하여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풍경화가로
소 그리고 원예학의 삽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의 화가였던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
gent:American Painter, 1856-1925)와 친하게 지내기도 했는데, 1885년 그와 사전트는 우스티셔 지방의 브
로드웨이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소설가 헨리 제임스가 코츠월드 마을에 대하여 쓴 수필집을 위한 삽화를
그렸다. 또한 1889년에는 이브즈햄과 퍼쇼 사이를 흐르는 에이본 강가의 플래드베리에서 사전트와 함께 그
곳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파슨스는 시골의 풍경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이러한 화풍
에 대하여 A.L. 볼드리는 1899년에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야외 풍경은 마치 예술적인 모티프를 가득 담고
있는 창고처럼 파슨스를 매료시켰다. 그는 언제나 즉흥적으로 문밖의 풍경을 그렸고, 언제나 자연을 직접적
으로 연구했다. 그의 목적은 풍경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빈틈없고 정확하게 화폭에 담는 것이었다.
그가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는 자연에 대한 해석은 신선할 뿐만 아니라, 자연이 선사하는 가치에 대하여 자
신만의 방법으로 솔직하게 표현한다."
Ehrenbreitstein(에렌브라이트슈타인)
by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English Romantic Painter, 1775~1851)
V. 제 3장: 새로운 풍경의 등장 l - 여행자
New Panorama in Landscape Painting l - Travellers
흔히 '섬나라 근성'이라고 일컬러지는 영국인들의 일반적인 국민성은 사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있었던 프랑스와의 23년 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확고해졌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도래한 혼
란기에 군부를 장악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 1세는 1799년부터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나폴레옹
전쟁'이라고 불리는 정복 전쟁을 시작했고 대부분의 유럽 대륙을 정복하기에 이르렀으나, 1815년에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1802년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맺어진 아미앵 조약에 의
해 휴전 상황에 이르게 된 1년의 기간을 제외하면,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기까지 20여 년의 기간 동안 영국
국민들은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었던 유럽 대륙을 여행할 수 없었던 까닭에, 국내에서만 고립된 듯이 생활
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영국 화가들은 영국 해협을 건너 물밀듯이 유럽 대륙을 여행했
으며, 그곳에서 오랫동안 접할 수 없었던 회화적 모티프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또한 이러한 경험을 통해
영국의 국민들이 특별히 좋아할 만한 회화의 소재들을 찾고자 했다. 이렇듯 유럽을 여행하며 새로운 소재
에 대한 갈증을 해소했던 화가들은 1815년부터 유럽 각지의 풍경을 담은 작품을 그렸으며, 사람들은 런던
에서 정기적으로 열렸던 전시회에 출품된 이 작품들을 통하여 유럽의 풍경을 감상하게 되었다.
또한 터너와 같은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ㅇ럽 명소의 풍경화들은 판화집으로 제작되어 쏟아져 나오기도 했
다. 해외 각지의 풍경과 그곳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던 이러한 책들은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
했으며, 나아가 해외여행의 붐을 조성하기까지 했다.
비평가인 존 러스킨 역시 당시 중산층에게도 유행했던 해외여행의 붐에 동참했다. 특히 스위스 및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했던 그는 그곳에서 외국의 지형 풍경을 담은 많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으며, 여행의 기념
으로 작품을 구매해 오기도 했다. 1846년에 출간한 저서 [근대 화가들]이나 1851년부터 1853년 사이에 출간
한 [베니스의 돌]에서 러스킨은 영국사람들에게 책 속에 언급되어 있는 장소를 꼭 찾아가서 삽화로 실린 작
품들을 실제로 감상해 볼 것을 강력하게 추천하기도 햇다. 그는 또한 회화의 소재를 찾기 위하여 해외여행
을 계획하고 있는 화가들에게는 반드시 여행을 가서 향후 붕괴되거나 다른 형태로 재건될 수도 있는 건축물
들에 대한 스케치를 남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서 [근대 화가들]을 통해, 그리고 터너 재단이 국가에 기증
한 작품들을 가지고 직접 구성한 전시를 통해 러스킨이 피력했던 화가 터너에 대한 열렬한 지지는 후대 화
가들로 하여금 터너의 발자취를 따라 그가 여행했던 곳을 다니면서 그곳의 풍경을 작품 속에 담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제임스 베이커 파인의 작품 <코블렌츠와 에렌브라이트슈타인>
및 알프레드 윌리엄 헌트의 <하이델베르크>는 터너라는 위대한 본보기가 없었다면 완성되지 못했을 작품들
일 것이다. 스코틀랜드 출신 화가인 데이비드 로버츠는 1832년에 긴 스페인 여행을 끝으로 유 럽 여행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업했던 스케치와 메모들을 바탕으로 작업실에서 작품을 완성했다.
1839년에 그는 중동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화가로서의 경력에 있어서 중요하고도 선구적인 기회가 되었다.
이집트를 지나 팔레스타인에 이르는 여행에서 로버츠는 회화나 삽화의 소재로 사용할 많은 소재들을 수집
하기도 했다. 이렇듯 영국 화가들은 '훌륭한 탐험가'라고 불린 만큼 세계 각지를 여행했다.
조지 헨리와 에드워드 에킨슨 호넬은 일본을 여행했는데, 일본에서 머물면서 영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
양적인 전통이나 아름다움의 기준 등을 관찰하고, 다양하고 새로운 회화적 소재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결론적으로 볼 때, 화가들은 여행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자신들이 보고 듣고 겪은 모든 소재들을 마치 정보
원처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 그리고 다른 문화를 소개하고 보급하는 통신원으로서의 역할을 했
던 것이다.
갈리리의 가나(The Site of Cana in Galilee), 1839
by 데이비드 로버츠(David Roberts:1796~1864)
1838년 8월 중동으로 여행을 떠난 데이비드 로버츠는 그곳에서 작푸을 위한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알렉사드리아를 거쳐 카이로를 지나 나일 강을 따라 여행을 했던 그는 기자의 파라미드를 둘러볼 수 있었으
며, 강을 따라 나일 강의 제2폭포 역시 관찰할 수 있었다. 1839년 2월에는 시리아를 지나 예루살렘에 도착
했으며, 4월에는 나블루스를 지나 가나와 갈리리 호에 도착했고, 드디어 5월에 알렉산드리아와 말타를 경유
하여 귀국햇다. 귀국 이후, 1840년 2월에는 여행하는 동안에 완성했던 드로잉을 가지고 책으로 출판하자는
의뢰를 받게 괴었으며, 그 결과 그의 중동 지역에 대한 드로잉들이 [성지-시리아, 이두메, 아라비아, 이집
트와 누비아]라는 제목으로 1842년부처 1849년까지 시리즈 형식으로 발간되기에 이르렀다.
1839년 4월 20일이라는 날짜가 적혀있는 이 작품은 수채물감과 과슈로 그려졌다. 이 작품은 로버츠가 여행
을 하면서 남긴 풍경에 대한 기록의 표상이자, 그리고 저서인 [성지] 시리즈에서 보여준 초기 석판화를 위
한 기초를 형성했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종종 신약성서 속 장면의 배경이 되었을 법한 풍경을 그
림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은 성서 속에서 '어느 혼인 잔치에서 물을 와인으로 바꾼 예수의 기적이 일어난
곳'이라고 기술했던 가나의 풍경을 표현한 것이다. 작품 왼쪽 아래에 보이는 저수지 쪽으로 흐르는 물의
모티프가 바로 성경 내용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명백한 암시는 더 이상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 작품에는 기독교도들이 긴밀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풍경, 특히 영국 프로테스탄트들이 매료될
만한 풍경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풍경화를 보면서 성서 속의 배경이자 영적인 유대감을 느끼도록 해주는
장소가 실제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관람자들은 종교에 대한 안락함
을 느끼고 일종의 위안을 얻게 되었다.
고대 아슈도드(Ancient Ashdod), 1839년경
by 데이비드 로버츠(David Roberts:1796~1864)
데이비드 로버츠가 이스라엘의 남부 도시인 아슈도드를 그린 이 수채화는 1839년에 그가 팔레스타인에 머
물면서 그곳의 풍경과 도시를 탐구하던 중에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이후 [성지]라는 제목의 출판물
시리즈에 삽입하기 위하여 이 작품을 석판화로 다시 제작히가도 했다.
아슈도드는 지중해 연안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고대 이래의 항구 도시이자 예배의 중심지이다. 이 지역
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은 기원전 20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이곳은 가나안 문화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그리스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와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저서에서 아슈
도드를 자주 언급하기도 했으며, 구약성서에도 이 지역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아조투스 파랄리유스(Azotus POaraliyus)'로 알려진 이 고대의 항구 도시는 중심 시가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로버츠는 이 지역을 원래 존재했던 고대의 모습처럼 보여주기 위하여 작품의 후경
오른쪽 언덕에 옛 건물을 그려 넣었다. 작품의 제목을 <고대 아슈도드>라고 붙인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
문이며, 판화로 제작된 후에도 동일한 제목을 사용했다. 작품 중앙에 보이는 큰 건축물은 비잔틴 함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7세기에 세워진 해안 요새이다.
코블렌츠와 에렌브라이트슈타인(Coblentz and Ehrenbreitstein), 1848
by 제임스 베이커 파인(James Baker Pyne:1800~1870)
이 작품은 제임스 베이커 파인의 전형적인 화풍이 가장 잘 나타나는 작품으로서, 넓은 수면 및 빛과 대기가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독일의 모젤 강 남쪽에서 동쪽을 향해 바라본 풍경을 담은 이 작품의 오른쪽 원경
에는 독일 서부의 도시 코블렌츠가 보인다. 멀리 언덕 위에는 거대한 에렌브라이트슈타인 요새가 보이는데,
이곳은 라인 강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모젤 강과 라인 강이 합류하는 지점과 가까운 곳이다.
파인은 이 작품 외에도 에렌브라이트슈타인 요새의 모습을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담은 또 하나의 작품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판화로 제작되어 1856년 [아트 저널]에 실리기도 했다.
에렌브라이트슈타인은 라인 강을 건너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로마 시대 때부터 요새화된 곳이다.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에는 프랑스에 의해 다섯 차례나 포위 당했으며, 1799년에는 프랑스 군대가 점령하
기까지 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에 프로이센 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곳을 보강하기 위하여 원
래의 요새를 허문 뒤, 1817년부터 1832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거대한 규모로 막대한 비용을 들여 요새
를 재건했다. 역사적인 도시 코블렌츠에는 이 요새 외에도 훌륭한 건축물이 많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1344
년에 완성된, 14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모젤 다리 및 똑같이 생긴 두 개의 탑이 나란히 서 있는 리프프라우
엔 교회를 들 수 있다. 이 두 건축물 역시 이 작품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브리스톨에서 태어난 파인은 그림 교육을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면서 이름을 서서히
알릴 수 있었다. 1835년에는 런던으로 거처를 옮긴 후에 긴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이 여행을 통하여 그는
풍경화를 위한 많은 영감과 모티프를 충족할 수 있었다. 많은 영국의 근대 화가들이 그랬듯이, 파인 역시
자신만의 독특한 풍경화 세계를 구축함에 있어서 터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트 저널]은 파인을 터너에 비유하면서, 그의 작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호평하기도 했다. "터너를 제
외하고, 다른 어떤 화가들도 파인처럼 대기원근법이나 대기의 세부적인 현상을 표현하는 방법을 철저하게
익히지 못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터너의 작품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파인은 간간이 왕립 아카데미에 작품을 전시하기는 했으나, 오히려 왕립 아카데미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영국미술가협회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결국 협회의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브르타뉴 해변(On th Coast of Brittany), 1858
by 윌리엄 클릭슨 스탠필드(William Clarkson Stanfield:1793~1867)
이 작품이 1859년 왕립 아카데미에서 처음 전시되었을 당시, 사람들은 "오래된 방파제와 낡은 배들, 난파
선의 잔해들, 그리고 거칠어 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일상적이고 보잘것 없는 저지대 해안가의 모습이
작품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아트 저널]의 한 비평가는 이 작품에
대하여, "빛이 많이 비치지 않는 흐린 날의 풍경이기는 하나, 윌리엄 클락슨 스탠필드가 작품 속에 표현
하고 있는 빛은 작품의 주제를 잘 드러내고 잇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라고 언급하기
도 했다.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1859
by 알프레드 윌리엄 헌트(Alfred William Hunt:1830~1890)
이 작품은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를 흐르는 네카어 강 북쪽에서 바라본 풍경을 담고 있다. 알프레드 윌리엄
헌트는 1859년 8월에 이곳 하이델베르크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작품의 왼쪽에는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다리가 보이고, 강가에는 마을이 보인다. 선제후(중세시대 독일에서 황제 선거권을 가졌던 제후)의 거처로
사용되었던 하이델베르크 성이 언덕의 위쪽에 있는데, 이곳은 1689년 루이 14세의 군대에 의해 점령 당하
기도 했다. 이곳의 풍경은 헌트뿐만 아니라 다른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는데, 헌트에 앞서, 조제
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가 이곳 풍경을 담은 작품인 <무지개가 뜬 하이델베르크>와 <해질 무렵의 하이델베 르크>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두 작품 모두 헌트의 이 작품과 유사한 구도를 취하고 있는데, 먼저 그려진
터너의 작품들을 보고 영감을 얻은 헌트가 하이델베르크를 여행하면서,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구도로 그림
을 그리면서 의도적으로 연습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헌트는 이러한 방식으로 그림 연습을 많이 했는데,
이는 비평가 존 러스킨의 개인적인 권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1856년에 왕립 아카데미에서 열린 전
시에 작품을 출품했는데, 당시 러스킨이 그의 작품에 대한 논평을 하면서 둘은 친분을 맺게 되었다.
1857년 국가에 기증된 터너의 수채화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했던 러스킨은 이 작품들을 헌트에게 보여주기
도 했다. 하지만 헌트가 터너의 화풍을 모방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작품 역시 터너가 이미 그렸던
장소이기는 했지만, 헌트는 같은 장소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때때로 터너의 경
험이나 화풍에 대하여 세세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 헌트에게 있어서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1859년 8월, 그는 다음과 같은 자조 섞인 글을 남기기도 했다. "최고의 작품을 그릴 수 있는 방법이 유일
하게 하나만 존재한다고 볼 때, 터너는 그 유일한 방법을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그 방법으로 최고의 작품
까지 그려냈다." 이런 이유로, 터너가 세상을 따난 후에도, 헌트와 같은 많은 젊은 화가들은 그의 압도적인
천재성을 쫓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심한 압박감에 시달렸던 것이다. 1873년, 비평가 F.G. 스티븐는 이 작품
에 대하여 [애서니엄]이라는 문예평론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수많은 학습을 거쳐, 주의 깊게
그려진 이 작품은 뛰어난 기량으로 정확하게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각각의 다양하고 아름다
운 색채들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답고 인상적인 강가의 풍경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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