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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림 퐁피드센터 특별전 : 화가들의 천국 # 1

작성자은보|작성시간19.12.16|조회수810 목록 댓글 0


    서울시립미술관과 프랑스 국립 퐁피두센터(Musee National D'Art Moderne du Centre Pompidou) 공동으로 [프랑스 국립 퐁피두센터 특별전:화가들의 천국]은 프랑스 국립 퐁피두센터 국립 현대미술관의 소장품전으로, 세계 최고의 근현대미술 및 동시대 미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대표작들을 선별하여 '아르카디아(Arcadia)'라는 주제로 전시를 구성한 것이다. 퐁피두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소장품들은 20세기의 작품들은 물론, 현대미술의 최근 동향까지 보여주는 21세기 초까지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렇듯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세심하게 선별된 작품들로 구성된 소장품의 다양성은 퐁피두 국립현대미술관의 가치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도서관, 음향연구소, 영화관, 교육 관 등을 운영하는 퐁피두센터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동시대의 문화와 예술, 교육을 아우르는 세계 최고의 문화센터이다. 특히 퐁피두센터 내에 자리 잡고 있는 국립현대미 술관은 회화, 조각, 데생, 설치, 사진, 디자인, 건축, 실험주의 영화, 비디오 등 1905년부터 오늘에 이르는 약 5,200명의 예술가들의 작품 58,000여 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루블르박물관이 서양 미술의 19세기 중반까지의 작품을, 오르세미술관이 19세기 중반부터 20 세기 초반까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면, 퐁피두센터는 20세기 이후의 현대미술과 현재 진행 되고 있는 동시대의 미술을 아우르는 예술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2008. 11.22 - 2009. 3.22 기간 동안 79점이 소개되는데, 주제인 <화가들의 천국> 은 서양 문화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아르카디아'라는 개념을 주제로 하여 구성되었다. '아르카디아'란 동양의 '무릉도원(武陵挑源)'과 유사한 '천국' 또는 '낙원'을 가리키는 말로 실존하는 고대 그리스의 섬이었다. '아르카디아'는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들에게 자주 인용되었 던 말로, 슬픔이나 죄악, 파멸이 없는 그리스의 이상향이다. 실제로 그리스 펠레폰네소스 반도 의 지명이었던 이곳은 풀 한 포기조차 자라지 않는 삭막한 곳이었지만, 로마 시대의 대문호 베르길리우스(Vergilius:BC 70-BC 19)나 오비디우스(Ovidius:BC 43-AD 17)의 고대 서사 문학 작품에서 풍요와 평화의 땅으로 묘사되면서 신화의 일부가 되었다. 신화 속의 '아르카디아'는 산 정상에 위치한 낙원으로, 그리스의 거인 신들이 살고 평야에는 반인반수인 목신이 뛰어다니 며, 개울에는 물의 요정인 님프들이 사는 곳으로 묘사되었다.
Et in Arcadia Ego(The Shepherds of Arcadia), 1638-40/Musee du Louvre, Paris by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French Baroque Era Painter, 1594-1665)
    이번 전시는 니콜라 푸생의 <아르카디아 목자들>이라는 작품을 근간으로 프랑스 고전주의의 대 가로 알려진 푸생은 누구보다도 아르카디아의 풍경을 자주 그렸으며, 그의 그림들을 통해 목가 적이고 평화로운 낙원 풍경의 전형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부제인 '아르카디아 에도 내가 있다Et in Arcadia Ego'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낙원에도 죽음이 존재함을 뜻하는 '메 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푸생은 이 작품을 통해 죽음의 공포보다는 아르카디아로 대표되는 평온한 세상의 서정성을 극대화시킴으로써 이상향으 로 향한 인간의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황금시대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던 공간이었던 '천국'이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에 이르는 광범위한 근원적 장소로 변모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개념은 20세기에 들어서면 서 '현대성'이라는 시대 정신과 연관을 맺게 되었고, 기계화된 노동의 시간 속에서 여가를 찾 는 현대인들이 꿈꾸는 이상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고대에 실존했던, 혹은 상상 속에서 존재했던 '과거'의 장소가 아니라,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숨쉬고 있는 '낙원'으로 서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황금시대', '전령사', '낙원', '되찾은 낙원', '풍요', '허무', '쾌락', '조화', '암흑', '풀밭 위의 점심식사' 등 총 10개의 소주제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20세기 이후의 작가들이 아르카디아, 즉 낙원을 어떤 방식으로 새롭게 해석했는지를 살펴보는 전시로 각각의 소주제는 푸생의 <아르카디아의 목자들>의 작품에서 사용된 도상들을 모티프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낙원의 다양한 모습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프로롤그(Prologue)
양 떼(Troupeaux de moutons), 1965-1979/설치 작품 by 프랑수아 자비에 라란(Franois-Xavier Lalanne)
    프랑스 화가이자 조각가인 프랑수아 자비에 라란(Franois-Xavier Lalanne:1924-)은 그림에 흥미를 느껴 제1차 세계대전 후 고향을 떠나 파리에 정착했다. 1949년에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 쿠시의 아틀리에 근처였던 몽파르나스에 아틀리에를 마련하여 본격적으로 조각 작업을 시작했 다. 또한 루브르 박물관의 이집트 및 아시리아 전시장에서 스텝 업무를 했던 경험을 통해 이집 트 전통 조각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금속을 이용하여 만든 그의 동물 조각들은 단순 히 동물을 묘사한 차원을 넘어 상상력과 실용성이 조화된 작품으로, 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중세 수공 장인의 주조법을 사용함으로써 작품의 가치를 더욱 높였다. 그의 부인이자 조각가인 클로드 라란과 함께 뉴욕 레만 모핀 갤러리가 뽑은 '20세기 살아있는 예술가 2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머리가 있는 양 10마리를 포함한 총 24마리의 설치 작품으로 양털, 금속, 나무의 혼 합이다. 이 작품이 1965년 [젊은 화가들을 위한 살롱전]에 출품되었을 때 이를 본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만들어졌을 뿐 만 아니라, 전시된 스물네 마리의 양 들 중 열네 마리에 머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미술이 시작된 이후로 동물이라는 소재가 작품의 주제로 다루어지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혹 소재로 사용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동물의 주인, 즉 작품의 주제를 부각 시키기 위한 보조적인 요소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동물을 주제로 표현한 이 작품을 접한 사람 들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청동 조각 위에 실제 양털과 같은 느낌이 나는 재료 를 덧붙여 제작한 이 양들은 기묘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박물관이나 전시장에 전시되 어 있을 때에는 그 느낌이 매우 낯설기까지 하다. 또한 이 작품을 미술의 어떤 분야로 분류해 야 할 지도 모호하다. 조각으로 분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설치미술'로 분류하기에도 어색 하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앉거나 눕거나 하는 가구로 사용할 수도 있으니 '디자인'의 분야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으나, 그 또한 딱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이처럼 프랑수아 지비에 라란의 작품 세계는 모든 경계를 넘나들면서 유머러스한 면을 보여준다. 코뿔소 모양의 술장이 나 고릴라 모양의 수납장, 머리 모양의 집 등과 같이 라란은 꿈을 꾸는 듯한 상상력을 통하여 시적인 느낌의 표현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는 상상력만큼이나 조각가로서 갖추어야 할 섬세하 고도 정교한 묘사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건축과 관련된 다양한 작품들을 제작 하였다. 그런 면에서 동물을 주제로 하여 많은 작품을 만들었던 프랑수아 자비에 라란은 많은 주목을 받는 작가다. 이 작품은 '낙원' 속에 자주 등장하는 양 떼를 통하여 시와 음악이 충만 했던 아르카디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전시의 서막을 알리고 있다.
목자의 잠(Le Sommeil du patre), 1961 by 샤를 라피크(Charles Lapicque)
    샤를 라피크(Charles Lapicque:French Painter, 1898-1988)는 20세기 초반 신파리화파(누벨 에콜 드 파리)의 화가이다. 비구상적인 그림을 주로 그렸던 그는 빛과 색채가 가지고 있는 다 양한 효과와 표현에 대해서 다방면으로 연구했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초기 회화는 입체파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에는 색채를 통하여 구상과 추상의 경계 를 없애는 작업을 지속했다. 원래 과학자 출신이었던 그는 색채의 효과에 대하여 과학적인 방 법으로 접근하여 자신의 그림에 적용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고대와 중세의 유물 연구를 통해 [미술에 있어서의 붉은색과 푸른색]이라는 이론을 만들기도 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는 역사적 인물이나 신화에 관심을 두고 그와 관련된 연작을 그렸으며, 이탈 리아의 베니스에 머무르며 르네상스 시기의 건물들에서 영감을 받아 <해질녘>과 <밤> 연작을 제작하기도 했다. 샤를 라피크는 미래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프랑스의 철학자인 앙리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1859-1941)의 이론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미래주의 자들처럼 명상을 통해 얻은 소재로 주제와 교감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즉, '직감'의 중요성을 자신의 예술 세계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연구하면서, 중세 미학을 자신의 색채 이론 속에 포함시키기 도 했다. 일반적으로 미래주의 화가들은 주제와 소재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 작용이나, 주변 환경과 그 안에 있는 사물과의 상호 작용을 의미하는 '동시성'의 개념을 강조했다. 라피크는 이러한 미래주의 화가들의 '동시성'의 개념을 '투명성'으로 재해석하였는데, 이는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과 관련된다. 라피크는 과거, 현재, 미래 중 현실에서의 '투명성'은 색채를 통해서 자신이 보고 있는 이미지를 기억의 잔재와 겹쳐 지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1960년대 초반 작품들 속에서, 라피크는 도자기나 고대 중국의 청동 작품들 속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를 통해 이러한 투명성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공간이 겹쳐 표현되는 독특한 기법을 통하여, 그는 '낮잠을 자는 목동'을 낙원에서 잠을 자고 있는 목동들의 모습으로 승화시켰다. >> 황금시대(L'age D'or:Golden Age) 고대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아르카디아를 묘사하는 자신의 글 속에서 상상 속의 아르카디아의 세계와 황금시대의 신화를 의도적으로 혼용하여 사용했다. 황금시대는 인류의 창조를 알리는 시기이자, 순수와 풍요, 정의와 완벽한 행복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서, 아르카디아의 시대적 원형으로 꼽히는 시기이다. 니콜라 푸생의 <아르카디아의 목자들>에서 목자들이 손으로 가리키 고 있는 비석에는 '아르카디아에도 내가 있다Et in Arcadia Ego'라고 적혀 있는데, 이를 통해 황금시대의 신화가 재생되고 나아가 아르카디아의 개념이 구체화된다.
'봄'을 위한 습작(Etude pour 'Le Printmps'), 1956/종이에 먹 by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입체주의의 선구자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Spanish Cubist Painter and Sculptor, 1881-1973)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미술 공부를 시작한 이후 프랑스로 이주하여 몽마르트르에서 보헤미안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자 유로운 창작 활동을 펼쳤다. 파란색을 주로 사용하여 그려진 이 시기의 작품들은 빈민가 사람 들의 고된 생활에 대한 참상이나 고독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후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을 시작으로 입체주의의 포문을 열며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와 입체주의 화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후 초현실주의와 신고전주의 등 시대의 조류를 이끌어 나가는 화가로 끊임없 는 창작 활동을 했던 그는 전쟁에 의한 참상을 표현한 <게르니카> 등을 통해 평화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으며, 이후 점토 등을 이용한 목가적 조각을 만들기도 했다. 이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가 염소의 외형에 관한 '입체주의적' 분석에 몰두했음을 보여주는 것 으로, 이 모티프는 그가 1950년대에 거주했던 별장 '라 캘리포니아'의 입구에 장식된 조각의 문양을 떠오르게 한다. 프랑스 남부의 앙티브에서 잠시 동안 작품 활동을 한 후 지중해로 돌아 온 그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형상들을 연구하고 그리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1930년대에는 황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무시무시한 괴물인 미노타우르스를 그리는 데 열중하며 비극적인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가 지난 후 피카소의 작품 속에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한 평화로운 느낌은 옛 신화의 이미지를 더욱 생기발랄하게 만들어 주었 고, 목신의 친구들과 요정들의 영토인 '목가적 아르카디아'의 꿈을 다시 꾸게 해 주었다. 피카소가 앙티브에 머물 무렵 그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기 시작한 '아르카디아의 염소'들은 그 의 1946년 작 <앙티폴리스>의 열네 점의 데생 중 다섯 점 안에도 등장한다. 또한 1947년부터 1948년 작품인 <목동, 음악가 그리고 양>에서도 같은 염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염소는 1950년에 프랑스 남부의 발로리스 지방에서 청동 조각상으로 만들어져 선보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피카소가 신화를 묘사한 옛 그림이나 우화 속에서 이 염소 모티프에 대한 영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신화 속 디오니소스의 행렬이나 바쿠스 축제의 풍경 속에서도 염소의 모습은 찾 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염소는 피카소풍의 우화 속에서 완전히 독창적으로 존재한 모티프라 할 수 있다. 사실 피카소는 별장에서 '에스멜랄다'라는 이름의 염소를 키웠는 데, 그를 통해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 전령사(Le Messager) 전령사는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존재로서, 푸생의 작품 속에서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로 등장하는 '전령사' 여인은 아르카디아의 목동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낙원의 세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현실이 암담할수록 강해지는 '낙원'에 대한 열망은 전령사를 통하여 이상향에 대한 희망으로 나타난다.
잠자는 요정을 유혹하는 목신, 1935/캔버스에 목탄 by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20세기에 등장한 '야수파(Fauvism)'의 대표 화가인 앙리 마티스(French Fauvist Painter and Sculptor, 1869-1954)는 원래 변호사를 하면서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 이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French Symbolist Painter, 1826-1898)의 수업을 들으며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알베르 마르케 (Albert Marquet) 등 후에 야수파의 일원이 되는 동료들을 만났다. 그는 강렬한 색채 기법과 유연하고 독특한 데생 기법으로 회화는 물론 조각, 판화에 이르기까 지 다양한 조형 활동을 했는데, 특히 강렬한 색채 표현을 통하여 야수파의 창시자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후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초기의 거칠었던 색채 표현들을 지속적으로 보완 하여 성숙시켰으며, 보색의 효과를 통해 색이 가진 고유한 순수성을 추구하고자 했다. 1923년경부터 1930년대에 걸쳐 자신만의 확고한 예술 세계를 구축한 그는 피카소와 함께 20세 기 회화의 위대한 지침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9년부터 남프랑스의 니스 지방에서 방스 예배당의 건축 장식 일체를 맡아 다양한 조형 기법과 재료를 동원하여 자신의 예술을 집 대성한 결과물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이 작품의 주제는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앙리 마티스가 이미 다루었던 상징적인 모티프로 서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주제는 1932년에 출판된 스테판 말라르 메(Stehane Mallarme:1842-1898, 프랑스 상징주의 시 운동을 창시, 주도)의 시집에 삽화로 사 용되기도 했다. 마티스는 커다란 캔버스에 그려진 두 점의 목탄화로 이루어진 이 작품을 오랜 기간 동안의 수정 작업을 거듭하여 완성하였다. 1943년까지 수정 작업을 했으나 완전히 마무리 되지 못한 두 번째 목탄화 역시 현재 퐁피드센터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목탄화를 그리면서 오랜 수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생겨난 오묘하고도 특별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흔히 '그리자유 기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기법은 회색 계통의 채도가 낮 은 한 가지 색만으로 명암과 농담을 표현하는 것을 말하는데, 마티스의 수많은 수정 작업이 캔 버스 위에 풍부하고 섬세한 빛과 그림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마티스는 이 두 점 의 목탄화를 자신의 작업실에 항상 걸어 두었다고 한다.
건축과 도덕(Architecturs and Morality), 2004 by 글렌 브라운(Glenn Brown)
    글렌 브라운(Glenn Brown:England Painter, 1966- )은 초현실주의적 작품을 주로 그리며, 다른 시대의 유명한 작가들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조작하는 작업과, SF적인 풍경 또는 장면을 그리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모사한 원본 작품의 색조를 강화하거나, 디테일을 첨가 또는 삭제하는 형식으로 작업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가장 큰 특징은 부드럽고 평탄하며, 폐쇄적인 선의 질감인데, 이것은 표면을 닦아내는(wipe away)듯한 붓질로 만들어진다. 아직 대중적이지 않으 며, 그에 대한 연구자료가 거의 없는 젊은 현대미술 작가다. 유화로 그려진 이 작품은 정밀하게 묘사된 꽃다발이 사람의 얼굴을 대신하고 있는 기묘한 초상 화이다. 작가는 정물과 초상이라는 회화의 두 고전적인 장르를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예상치 못 했던 새로운 모습을 이끌어 낸다. 과거에도 이와 같은 전형적인 혼합배치의 방법은 있었지만 브라운은 다양한 주제와 회화적인 전통을 동시에 차용함으로써 작품 자체에 직접적이면서도 인상적인 특징을 부여하고 있다.
봄, 풍경 속의 남자와 여자(Printemps, ou Femme nue avec l'homme dans un paysage), 1935 by 프란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
    프란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French Dadaist/Surrealist Painter, 1879-1953)는 "나는 끊임없이 나에게 도전한다."라는 말을 신념처럼 되뇌이며, 어느 유파나 화풍에 속하지 않고 다양한 조형 방식을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펼쳤던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분야 로 분류되지만 분열되지 않으며, 조롱과 유머를 오가는 긴장감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된다. 후기인상파와 입체파에서의 활동을 거쳐, 다다이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기계적 이미지'로 대가의 반열에 오른 그는 다시 전통적인 구상 회화로 복귀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자유분방 한 태도는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1892-1966), 만 레이(Man Ray :미국 출신의 사진작가, 1890-1976),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French-born American Dada- ist/Surrealist Conceptual Artist, 1887-1968)과 같은 동시대 화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으 나 동시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미 만들어진 시스템과 관련된 것들에 대한 고발과 단절의 필요성을 외쳤던 그는 모더니즘 주류의 세상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시각을 가지고 현대미술의 모든 분야에 걸쳐 활약했다. 1928년부터 1930년 초반까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투명> 연작이 시대에 뒤진 퇴폐적 작품이 라는 혹평을 받으면서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프란시스 피카비아는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 했다. 하지만 이후 한 명 혹은 두 명의 인물을 화폭의 중앙에 배치하는 일련의 도식적 구성을 만들어 다시금 그림 작업을 시작했고, 그의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에 대해 사람들은 '야수성'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평가했다. 작품의 중심에 서로 껴안고 있는 두 인물은 이미 그의 다른 여러 작품들 속에서도 등장한 적이 있는데, <투명> 연작 속 <스핑크스>라는 작품에서는 이 그림 속 의 왼쪽에 있는 인물이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투명> 연작 속에 등장하는 유령과 같은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피카비아는 일렁거리는 듯한 선 으로 형태를 표현했다. 이를 통해 작품 전체에는 묵직한 느낌이 강조되고 있다. 피카비아는 이 작품을 통해 목가적인 동시에 상징적인 형상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 작품은 세속적이면서도 성스러운 두 가지 구성 요소를 동시에 보여주는데, 이러한 상반된 요소를 한 화면에 드러내는 방식은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나타난다. 작품의 제목인 <봄>은 계절의 순환에 대한 신화적인 면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림 속 연인의 모습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떠오르게 한다. 오른쪽에서 울고 있는 천사는 마치 죄를 지은 부부가 낙원에서 추방 당하는 사실에 대해 슬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피카비아는 그림 속에 담긴 의미를 명쾌하고 단순하게 보여준다. >> 낙원(L'Arcadie) 그리스 중부 지역에 실존했던 지역인 아르카디아는 척박한 산악 지형으로 사람이 살기 힘든 곳 이었지만, 베르길리우스는 이 장소를 '축복과 풍요의 땅'이라고 묘사했으며, 이 아르카디아는 낙원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이상형이었다. 목신을 땅의 신으로 모시고, 시와 노래가 끊임없이 흐르는 풍요의 땅으로 변모한 베르길리우스의 아르카디아가 푸생에 의해서 다시 한 번 낙원의 이미지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현대 예술가들은 프랑스의 남부 지방을 자신만의 아르카디아, 즉 낙원으로 여기며 강렬한 태양 아래 자리잡은 풍요로운 경치를 그림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남프랑스 카네의 풍경(Paysage Meridional), 1929-1930 by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French Nabi Painter, 1867-1947)는 처음에는 법학을 공부했으 나 이후 그림에 흥미를 느껴 미술 학교에 다니며 후일 '나비파(Nabism)'로 불리게 된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French Nabi Painter, 1870-1943) 등의 화가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장식적이면서 실용적인 포스터나 무대 디자인 작업을 했고, 1900년부터는 회 화에 전념했다. 실내의 정경을 주로 그렸으나 인물 묘사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아내 인 마르트를 모델로 하여 작품 속에 여인의 모티프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여인' 그 림으로는 <욕조> 연작이 있으며, 말년에는 남프랑스에 정착하여 자신의 아틀리에를 소재로 하 여 <실내> 연작과 그 앞뜰을 주로 그렸는데, 이 작품들은 그의 감성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높 이 평가되고 있다. '최후의 인상주의'로 불렸던 그는 말년에 이르러 대상에서 벗어난 색을 기초로 한 추상에 가까운 풍경화들을 그리며 독자적인 색채의 세계를 확립시켰다. 이 풍경화는 피에르 보나르가 1925년에 남프랑스의 카네 지방에서 구입하여 '보스케(작은 숲)' 라는 이름을 붙인 집 주변의 정경을 그린 것이다. 그림 전경에 있는 다리는 보스케의 정원 앞 에 흐르고 있는 시냇물과 그 아래쪽 언덕을 연결해 주고 있다. 언덕 아래쪽으로 보이는 짙은 녹색의 들판은 오렌지색 점으로 표현된 집들의 지붕과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그 풍경의 왼쪽 과 오른쪽, 아래쪽은 밝은 색으로 채색된 무성한 초목들이, 그리고 위쪽은 뭉개구름이 떠 다니 는 맑고 파란 하늘이 둘러싸고 있다. 전체적인 구도는 흡사 연보랏빛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그린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작품보다 나중에 그려진 그림들 중에도 비슷한 구도를 취하 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특히 1946년에 그려진 <붉은 지붕이 있는 카네의 풍경>은 언덕 위에서 녹색 평원의 풍경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품의 전체적인 색조는 흰색과 황토색, 붉은색과 연보라색을 사용하여 반짝이는 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이는 나비파에 관심이 있었던 보나르가 그림에 태피스티리와 같은 효과를 주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시간과 자연이 남겨 놓은 난해한 흔적들이 묻어 있는 신비롭고 호젓한 장소인 보스케는 이렇듯 보나르와 그의 그림에 있어서 가장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으며, 그가 임종 때까지 그린 많은 작품들 속에 끊임없이 등장했다.
미모사가 피어 있는 아틀리에(L'Atelier au mimosa), 1939-1946 by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1925년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카네를 방문한 피에를 보나르는 그곳에 겨울을 보내기 위해 분홍색 벽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집을 구입한 후 '보스케'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후 1939년에는 그 집으로 아주 옮겨 여생을 보냈다. 1930년에 그는 처음으로 창을 통해 바라 본 풍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화면 앞쪽으로는 난간이 보이고 뒤로 보이는 창은 화면 속에서 작은 일부분만을 차지하고 있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보나르의 아틀리에가 그리 크지 않았다 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보나르의 두 번째 창밖 풍경화로, 그 밑그림은 1935년에 그려진 것이다. 이후 그는 1939년 겨울에 최초 밑그림을 수정하였고, 1946년 파리 근교의 작은 도시인 퐁텐블로에서 완성했다. 이 작품의 주된 주제는 창과 그 창의 3/4를 차지하는 미모사 숲이다. 화면 앞으로 보이는 비스듬한 난간과 쇠 창틀은 수직과 수평으로 교차되면서, 자칫 어지러워 보일 수 있는 복슬복슬한 노란 미모사 꽃 무리에 안정적인 느낌을 부여하고 있다. 창문의 위쪽으로 보이는 나무와 지붕들을 붉은색과 초록색의 점을 찍어 표현함으로써 마치 부 드러운 솜뭉치와 같은 느낌을 준다. 화면 전체에 빛이 비치는 듯한 화사한 색의 효과에 서서히 적응을 하게 되면, 그림 왼쪽 아래에서 하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1942년에 죽은 보나르 부인, 마르트의 얼굴로 짐작된다. 보나르는 먼저 곁을 떠난, 너무나 친숙하고 사랑스러 웠던 부인의 얼굴을 자신의 대표작 속에 남겨 놓았던 것이다.
꽃이 핀 아몬드 나무(El Almendro en flor), 1946-1947 by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인상주의의 마지막 화가라고도 불리는 피에르 보나르는 자신의 집 정원의 풍경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빛을 발하는 듯 화사하고 풍성하게, 그리고 자유로운 표현법으로 그려진 이 작품은 보나르가 1946년에 그리기 시작하여 1947년에 마무리한 그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자유로운 붓 터치를 통하여 만발한 꽃과 길게 뻗어난 나뭇가지를 표현했으며, 궁극적으로 자연 에 대한 숭고하고 영광스러운 감정을 충실히 드러냈다.
에스타크(L'Estaue), 1906 by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French Cubist/Fauvist Painter, 1882-1963)는 1908년 다니엘 앙리 칸바일러의 전시에서 선보인 풍경화와 정물화를 포함한 27개 작품들이 '입체주의적' 작품 이라는 평을 얻게 되면서 입체파의 대표 작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세잔(Paul Cezanne:French Post-Impressionism Painter, 1839-1906)에 대한 브라크의 성장은 1907년에 제작된 <여인의 누드>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물화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다가 후에 풍경 화로 옮겨 가게 되었다. 특히 세잔이 즐겨 머물렀던 남프랑스의 에스타크에 머물며 그가 특히 선호했던 소재들을 그리기도 했다. 또한 마티스의 점묘화법을 익히며 색채 감각을 길렀는데, 후기인상파로부터 영감을 받은 구성 방법과 야수파로부터 영향을 받은 색채를 혼합하여 결국 자신만의 입체주의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1905년 [살롱 도톤전]에서 조르주 브라크는 정열적이고 화려한 야수파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1년 후, 그는 동료 화가인 프리에스와 함께 그림 작업을 위하여 프랑 스 남부의 미디 지방으로 떠났다. 1906년 10월부터 1907년 2월까지 그는 일부러 마르세이유 근처의 에스타크 지방에서 머물렀는데, 그곳은 이미 1870년대에 후기인상주의 화가인 세잔이 정착하여 많은 대작들을 남긴 장소였다. 왼쪽으로 꺾이는 오르막길과 길가의 울창한 소나무 숲 이 그려진 이 가을 풍경은 세잔이 즐겨 사용했던 색으로 채워져 있다. 브라크는 이 작품에서 완벽한 선과 색의 배열을 통하여 보기 드문 구성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보라색과 오렌지색으로 된 벽이 길 오른쪽을 따라 서 있고, 그 뒤로는 커다란 소나무들이 층을 지어 배열되어 있다. 색이 가진 마법과 같은 힘에 매료되어 있었던 브라크는 색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데 몰두했고, 이로 인해 작품을 보는 사람의 시선은 황색으로 칠해진 땅에서 분홍과 녹색이 스며든 푸른 하늘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된다. 마티스나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모리스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같은 야수파 화가들의 작품처럼 다양한 색으로 그려진 이 작품은 불필요한 장식 요소 하나 없이도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어느 부분에서는 조밀하게, 또 다른 부분에서는 여유있게 칠해진 화면 앞쪽의 붓 터치,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색의 흐름, 부드러운 밀도를 유지하면서 퍼져 나가는 푸른색의 조화는 작품 속의 색들이 마치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시오타의 작은 만(Little Bay at La Ciotat), 1907 by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세델 강가(Bords de la 'Sedelle), 1909 by 프란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
    1909년부터 1919년 사이에 제작된 프란시스 피카비아의 작품들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임의적 색 채 표현이 특징이었다. 특히 이 작품은 그러한 표현 때문에 작품의 주제가 되는 풍경이 정확히 어느 지방을 그린 것인지를 오랫동안 알 수가 없었다. [프로조포페]라는 잡지에서는 이 작품이 그려진 장소를 면밀하게 조사하여 그에 대한 연구 기사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세델 강가, 크로장 마을로 들어서서, 화살표를 따라 오솔길을 내려가면 작은 언덕을 넘어 폴 리 방앗간에 이르게 된다. 그 길 오른쪽으로 50미터 정도의 급류가 흐르고 있고, 작은 건물이 있는 황무지로 향하는 길에는 울타리가 쳐 있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면 돌이 많은 강의 하류 가 대각선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방앗간에서 흘러나온 물은 개울가로 흐르고 있는데, 바로 그 곳이 피카비아가 이 작품을 그린 곳이다." 미술계의 권위자들 역시 이와 같은 묘사가 정확하다 고 인정하면서, 1997년부터 이 작품은 결국 <세델 강가>라는 제목을 가지게 되었다. 이 작품은 피카비아의 이후의 작품들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과감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현실과는 동떨어진 색상을 사용한 점이나 굵은 윤곽선으로 사물들을 한데 뭉친 듯 표현 하여 단순화시킨 점은 깊이감에 대한 시각적인 효과를 주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이다. 그는 또 다른 작품인 <붉은 나무>에서 퍼즐과도 같은 평면적인 이미지를 표현했는데, 이 작품을 통해 화면을 단순화시키는 과정을 이미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마를리-르-루아의 길(Rue a Marly-le-Roi), 1905-1906 by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French Fauvist Painter, 1876-1958)는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자유방임적 가정환경에서 자라나 12세경부터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고,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기계공 등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이어갔다. 화가를 지망하였으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00년 A. 드랭과 알게 되어 센 강가의 성관(城館)에 공동 아틀리에를 가지고부터였다. 이듬해 고흐의 회고전을 보고 정열적인 작풍에 깊이 감탄하여 강렬한 원색과 분방한 필치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05년 마티스의 권고로 [앵데팡당전(展)]에, 다음에는 [살롱 도톤]에 출품하여 H. 마티스, A. 마르케, A. 드랭 등의 작품과 함께 '야수의 우리'에 전시되었다. 그러나 원색배합에 의한 순수한 포비즘 시대는 2-3년으로 끝나고, 1908년경부터 세잔의 화풍에 이끌려 어두운 색조 속에 견고한 화면 구성을 보였다. 또 입체파화가들과도 사귀어 감화를 받 기도 했으나, 그러한 방향이 주지적(主知的)이라고 생각하여 15년경 자기 나름의 정열적인 제 작으로 돌아갔다. 그 후부터 즐겨 그린 거친 날씨의 어두운 풍경화나 정물에는 힘찬 데포르마 시옹(deformation:변형, 과장)과 비극적인 터치의 바닥에 표현주의적인 기백이 넘치며, 본래의 특색인 야성의 부르짖음, 생명감의 약동이 일관하여 엿보인다. 블라맹크는 야수주의 작가중에서 가장 야수적인 정열을 소유한 작가였다. 빨강과 녹색의 대비를 통해 강렬한 느낌을 주는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블라맹크는 자전거 경주 또는 프로 레슬러와 의 시합 등 당당한 체구와 성격에 어울리는 활동적인 경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야수주의 작가들이 귀스타브 모로의 화실에서 공부한데 비해, 모든 전통적인 기법과 소재를 거부하면서 내적 표현의 매체로 색채의 자율적 가치를 강조했다. 그는 "예술은 본능이다." 라고 단언하면서 자신의 내적 충동을 과감하게 분출시켰다. 회화에 의해서 무엇보다도 자기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회화라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생명 표현 의 한 수단으로 나타났다. 색채의 불협화음과 과장되고 기괴한 분위기의 작품을 주로 제작하였 는데, 그것은 그의 속에 흐르는 개인적인 분방한 성격 때문이었다. 또한 아카데믹한 권위를 무시하고자 한 반항적인 의지에서 유래하는 것이었다. 1904-07년까지는 튜브에서 짜내는 물감을 그대로 캔버스에 칠하는 기법으로 색채를 구사했다. 1906년에 그린 <빨간 나무가 있는 풍경>과 <서커스>는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의 직관적인 정열이 낳은 강렬한 원색의 힘찬 선은 진정 야수주의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겠 다. 1907년 세잔의 작품과 만난 이후 그의 작품은 강렬한 원색의 빛이 사라지고, 흐린 청색 또는 다갈색을 주조로 한 구성적인 방향으로 전환된다. 1910년 이후 그의 작품에는 힘이 있고 일반적으로 세느 강 풍경이나 일-드-프랑스 지방의 경치를 소재로 하고 있다. 대전 후 블라맹크의 사실주의는 점차 강화되고 독일 표현주의와 네덜란드 자연주의적인 화풍에 근접해 갔다. 세상과의 교류도 없이 폭풍이 휘몰고 간 후 황량한 풍경을 탐색으로 표현 한 그 림을 그리며 여생을 마쳤다.
생 막시맹 전경(Vue de Saint-Maximin), 1934 by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파리 외곽의 샤투(Chatou)에서 태어난 앙드레 드랭(Andre Derain:French Fauvist Painter and Sculptor, 1880-1954)은 블라맹크를 만나 아틀리에에서 함께 생활하며 서로 큰 영향을 주 고 받았다. 독학으로 공부를 하던 그는 미술관을 거의 매일같이 다녔으며, 독서를 통해 미학적 인 감성을 키웠다. 1905년 마티스와의 만남을 계기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립한 그는 그 해의 [살롱 도톤전]에 출품, 가장 대담한 야수파 화가로서 주목받았으나, 2-3년 후에는 격정적인 색채를 버리고 긴밀한 구성을 가진 입체주의풍 그림을 그렸다. 이탈리아 근대 초기의 회화나 고딕 예술, 프랑스 옛 대가의 화풍 등에 심취하면서 독자적인 탐 구를 계속했고, 전통을 현대적 감성으로 승화시킨 신고전주의 화가로서의 위치를 확립했다. 또한 어두운 계통의 색채를 기조로 뚜렷한 명암과 섬세한 붓 터치로 현대적 감각의 회화를 만 들어냈다. 1930년에 프랑스 남부의 바르 지방에 머물 무렵, 앙드레 드랭은 생 막시맹이라는 마을을 발견 하게 되었다. 생트 마들렌 대성당을 둘러싼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마을의 풍경에서 그는 이상적인 풍경화의 구도를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이 마을을 멀리서 바라본 전경을 강조한 열 두 점의 풍경화 연작을 그리게 되었다. 특히 그는 <생 막시맹 전경>이라는 제목으로 각기 다른 관점으로 두 점의 그림을 완성했다. 거의 같은 크기의 화폭에 그려진 이 작품들 중 하나는 개 인 소장품이고 다른 한 점이 바로 풍피두센터에 소장되어 있는 바로 이 작품이다. 흙길, 중세 시대에 쌓아 놓았을 법한 방어벽, 중앙에 위치해 있는 대성당, 지붕들과 산, 하늘 등의 모티프들이 마치 하나로 이어져 있는 듯한 연속적인 구성으로 강조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시각적으로 중첩되면서 원근감을 탁월하게 표현해 주는데, 드랭은 바로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화폭의 정가운데 위치한 대성당의 신전을 중심으로 수평선을 연장함으로써, 세잔이 시도했던 지중해적인 관념을 보여주고자 했다. 모티프들이 오밀조밀하게 채워져 있는 원경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어 있는 듯하게 처리된 전경은 오렌지색과 초록색 등이 어우러진 색 조로 매끄럽게 처리했으며, 잘 다듬어진 느낌의 빛 처리를 표현함으로써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French Realist(Barbizon School) Painter, 1796-1875)가 그렸던 로마 풍경화를 연상하게 한다. 또한 길 위로 벽처럼 쌓여 있는 돌맹이들은 성지 순례의 장소였던 중앙의 대성 당과 그 주변의 마을 쪽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피렌체 빌라(Villas florentines), 1926 by 파울 클레(Paul Klee)
    파울 클레(Paul Klee:Swiss Expression‎‎ist Painter, 1879-1940)는 독일 국적의 스위스 화가로, 표현주의,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예술 형태의 영향을 받았다. 칸딘스키(Vassily Kandinsky)와 함께 독일 청기사파 활동을 했으며, 1912년 파리로 가서 로베 르 들로네(Robert Delaunay:French Cubist Painter, 1885-1941)를 만나 브라크와 피카소의 입 체파 회화를 경험하게 된다. 1914년 튀니지 여행을 계기로 색채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새로운 조형 방법을 만들어냈다. 추상회화의 시조로 불리며 간결하고도 어린아이 같은 그림으로 자신 의 상상력의 세계를 표현했던 그는 그림을 통해 당시 전쟁으로 얼룩진 어두운 세계에서 벗어나 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상형문자에서 영향을 받은 추상 언어를 사용한 그의 그림은 때 때로 구상의 범주를 벗어나 불명확하며 역설적으로 표현되었지만, 환상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닌 현실과 연결성을 지닌 작품들이었다. 파울 클레는 1920년대에 파리에서 활동한 작가들 중에서 가장 빨리 명성을 얻은 독일인이다. 그는 첫 번째 초현실주의 전시를 시작으로 하여 여러 전시회에 참여했으며, 1929년에는 성대한 회고전을 열기도 했다. 클레는 이탈리아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기 때문에 1926년 9월에는 아내, 아들과 함께 이탈리아의 제노바, 엘바 섬, 피사, 피렌체, 라벤나, 밀라 노 등지를 여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여행에 대한 기억들은 그가 그린 작품의 제목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중 하나인 이 작품은 두꺼운 석회 반죽 위에 깊고 얕은 선을 파내는 기법 으로 제작된 것이다. 위에서부터 아래 부분까지 많은 선들을 서로 교차시키고, 그 선들 위로 색을 칠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울퉁불퉁한 표면으로 인해 생긴 음영 속에 색이 칠해진 부분과 선이 새겨진 부분들이 섞이면서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 클레는 새로운 기법들을 끊임없이 고안해 냈고, 그것을 작품에 적용했다. 특히 1924년에는 분무기와 누르개를 사용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으며, 다양한 색의 변화를 만들기 위한 대범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행복한 시골 풍경, 1944 by 장 뒤뷔페(Jean Dubuffet)
    프랑스의 화가, 조각가, 판화가인 장 뒤뷔페(Jean Dubuffet:1901-1985)는 1950년대 서구 화단 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앵포르멜(Informel:추상표현주의)'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40년대에 기존의 미학과 조형 체계를 거부하는 거칠고 난폭한 반 문화적인 세련되지 못하고 미숙하여 심지어 꼴사나운 미술인 '아르브뤼(Art Brut)'를 발전시킨 사람으로 유명하며 유럽미술계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뒤뷔페의 그림을 설명하는 키워드 '아르 브뤼'는 프랑스어로 '조악한 미술'이라는 뜻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중요한 프랑스의 미술가인 뒤뷔페는 중반기에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인 한스 프린츠호른의 [정신병자들의 미술The Art of the Insane]을 연구하면서 정신병자들의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뒤뷔페는 그가 창조적 표현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본 정신병적인 작품과 순진한 작품, 원시적인 작품들의 데생과 회화, 낙서에 '아르브뤼'라는 이름을 붙였다. 초기의 입체파 미술가들이 오세아니아와 아프리카의 원시 조각을 발견한 것처럼, 뒤뷔페는 이 러한 양식의 미술을 연구하면서 그것이 인간의 감정과 인간적 가치들을 가장 진실되게 표현한 다고 생각해 거기에서 독특한 착상을 끌어냈다. 뒤뷔페의 그림들은 원래 스위스의 화가 파울 클레의 어린애 같은 미술에 영향을 받아 1940년대부터는 자신이 진정한 '아르브뤼'의 특징이라 고 생각한 진실성과 순진성을 강하게 띠었다. 초기 '아르브뤼' 작품은 밝고 화사한 색들과 세 련되지 않은 데생으로 인간성과 문명에 대한 어린애 같은 환상을 보여주고 있다. 후기 작품들 은 강렬하고 원시적이며 때때로 감상적이고 외설적인 경우도 있는데, 낙서와 정신병적인 미술 에서 끌어낸 형태들을 표현하고 있다. 두껍게 칠하는 임파스토 기법으로 그리거나 콜라주 기법 으로 구성한 이 작품들은 세부 묘사가 촘촘하고 표현이 강렬하며 활기찬 생명과 야수적인 힘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를 상쇄시키는 정열뿐만 아니라 시적 감흥과 유머도 종종 자아낸다. 장 뒤뷔페는 파리에서 공부할 당시에는 전통주의 그림에 대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24 년 그림을 포기하고 1930년까지 포도주 장사로 생계를 이어갔으며, 1940년대 초까지도 미술을 직업으로 삼지는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파 화가들을 이끌던 한 사람으로서 '아르 브뤼'의 기법과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아이들과 정신병자들의 그림 연구에서 유래한 '아르 브뤼'에서 딱딱하고 전통적인 그림에서는 찾을 수 없는 즉흥성과 생명력을 얻고자 했다. 이런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종종 타르, 자갈, 숯, 재, 모래와 같은 재료를 니스와 아교로 붙여 만든, 거칠고 두꺼운 투박한 표의적인 이미지를 새겨놓기도 했다. 그의 그림과 드로잉은 유치하고 편집적이며, 미완성된 듯이 보여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60년대는 작곡과 건축환경 조성을 함께 실험했다. 회화와 조각의 다양한 재료로 계속해 '아르브뤼'의 가능성을 탐구했으며, 말년에는 공공장소에 놓을 흑백의 유리섬유로 만든 대형조 각을 여러 개 만들었다. 이 그림은 <도시와 시골의 꼭두각시들>이라는 연작 속 하나인데 연작 속의 다른 모든 작품들이 가진 특징이 이 한 작품에 모여 있다. 마치 어린아이가 땅바닥에 그린 것처럼 서툰 솜씨를 의 도적으로 보여준다. 원근법을 완전히 무시한 채 사물을 정면에서 펼쳐 놓았다. 뒤뷔페는 당대의 예술 기법과 단절된 독창적인 표현을 새로운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했지 만 어떤 면에서 그의 작품은 당시의 미의식과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대표적인 화가인 파울 클레는 뒤뷔페의 이러한 천진난만하고 충동 적인 화법을 극찬하기도 했다.
탈곡(Depiquage), 1954 by 라울 뒤피(Raoul Dufy)
    라울 뒤피(Raoul Dufy:French Fauvist Painter, 1877-1953)는 1900년에 에콜 데 보자르에 입 학하여 그림 공부를 시작했으며 보나르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처음에는 인상주의풍의 그림 을 그렸으나 마티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야수파에 가담하게 되었고, 강렬한 색채와 붓 터치를 사용한 작품을 제작했다. 이후 입체주의에 관심을 가지면서 대상을 평면화하는 화면 구 성과 선을 중심으로 하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해 갔다. 해안이나 강가의 풍경, 일상적인 거리 풍경, 경마장 등을 묘사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특유의 감각적 색채와 장식적 선을 사용하여 대중적이며 상업적인 작가로 폄하되기도 했지만, 가볍고 경쾌한 느낌이야말로 다른 작가에게서 찾을 수 없는 뒤피만의 독창성이라 할 수 있다. '밀의 탈곡'이라는 테마는 1936년에 처음으로 라울 뒤피의 작품에 사용되었다. 그것은 바로 <전기의 요정La Fee electricite>(1936)이라는 작품으로 1937년 국제박람회의 전기 전시관을 위해 그린 것이다. 그 작품은 근대 공업과 전통적인 작업장, 현대 기술과 신화의 접목을 경축 하고자 하는 의도로 그려진 것으로, 작품 속에서 신화의 제우스 신은 화려한 세느 강변의 거리 중심가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도 이 '탈곡'이라는 주제는 그의 여러 작품들 속에서 새로운 모티프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48년부터 그는 이 주제에 또 다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아리에즈 지방에 위치한 생 리지에 농장에서 추수나 수확에 관련된 일을 돌보게 된 뒤피는 농촌의 광대하고 서정적인 풍경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활동들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농촌의 모습들로부터 받은 영감에 고대 로마의 서사시인인 베르길리우스의 목가적 사상을 결합하여 그린 작품이 바로이 <탈곡>이다. 뒤피는 이 작품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완성 작품이기에 그것이 표현하고자 했던 자애롭고 풍요로운 자연스러움이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르카디아에서는 죽음조차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다."는 니콜라 푸생의 메시지를 뒤피는 이 작품을 통해서 현대적으로 다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무가 있는 풍경(Grand paysage a l'arbre), 1957 발튀스(Balthus/Balthasar Klossowski de Rola)
    발튀스(Balthus)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발타사르 클로소프스키 드 롤라 (Balthazar Klossowski de Rola:Polish/French Modern Artist, 1908-2001)이다. 파리에 거주하는 폴란드 가계(家系)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베를린, 베른, 제네바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순수하게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고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나타냈다. 화가였던 그의 어머니와 연인 관계였던 시인 릴케는 그의 그림에 감명하여 12세 때 출판한 40 점으로 된 길 잃은 고양이 미추에 대한 소묘집에 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청소년 시절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 자주 들러 거장들의 그림을 연구했다. 특히 17세기의 화가 푸생의 작품 가운 데 <에코와 나르시스>에 관심을 가졌다. 30대 초기에는 성숙한 여인이 되기 전의 풋풋한 소녀 들의 모습과 도시와 농촌의 풍경을 그린 작품들로 몇 차례의 전시회를 열었고, 1944-1945년에 그린 <녹색과 빨간색의 작은 소녀> 등에서는 반대색을 이용한 실험적 그림을 그렸다. 1950년대에 들어 작품세계는 한층 밝아졌고 <생 앙드레 상가>와 같은 명작을 탄생시켰다. 1961년에는 로마에 있는 프랑스 문화원장에 임명되어, 작품 또한 국제적 인정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Andre-Georges Malraux)는 그를 프랑스의 "제2의 이탈리아 주재 대사"라고 칭찬했다. 회화의 전통적 범주인 풍경화, 역사화, 초상화 등을 20세기 회화에서 독 특한 화풍으로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개성적이고 환각적인 상상력이 담긴 작품들로 인 해 초현실주의로 분류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정원(Le Jardin de France), 1962 by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막스 에른스트(Max Ernst:German-born French Dada/ Surrealism Painter, 1891-1976)는 독일 쾰른 근처의 브륄 출생이다. 철학과 정신의학을 전공 했으나 화가로 전향하여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19년 쾰른에서 J. 아르프(Jean Arp) 등과 잡지 [통풍기(通風機)]에 의해 다다이즘을 일으켰으며, 1922-41년 파리에 거주하면 서 최초의 콜라주전(展)을 열었다. 이것은 이질적인 물상의 그림을 대비시키고 의외성에 의한 환상과 욕구를 자극하여 S. 프로이트가 말한 잠재의식에 대응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1924년 이후로는 초현실주의에 적극 참여하여, 1921년 파리로 이주, A. 브르통 등의 시지(詩誌) 《문학》의 시인들과 교유하고 1924년 이후로 초현실주의 회화의 중심적 존재로서, 브르통의 선언에 있는 [순수하게 심리적, 정신적인 자동법]을 실제 작품에서 추진했다. 1963년에 프랑스로 돌아온 막스 에른스트는 파리에서 2년 동안 머물고 난 후, 앙부아즈 근방의 루아르 강과 쉬농 사이에 위치한 '위즘'이라는 마을에 정착했다. 프랑스로 돌아오기 전에 그는 미국 애리조나에서 광물로 이루어진 날카롭고 메마른 풍경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는데, 이 와는 반대로 위즘의 완만한 지형과 신선한 공기는 안식처와 같은 편안함과 신선미를 느끼게 해 주었고, 이러한 영감의 결과가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나타나게 되었다. 이 작품은 루아르 강가 주변 풍경의 침체된 이미지와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여인의 시적인 조 합을 통해 표현되었다. 작품 속에서 누워 있는 여인의 다리를 감고 있는 뱀은 알렉산드리아의 꿈으로부터 나온 창조물처럼 보인다. 에른스트는 파리의 한 백화점이 철거될 때 버려진 아르누 보 스타일의 부조 작품 세 점을 자신의 정원으로 옮겨 놓았다. 이 부조는 마치 루아르 강 주변 의 부드러운 지형을 연상시키는 듯한 여성적인 곡선의 관능미를 표현하였다. 화면 중간에 누워 있는 여인은 알렉산드르 카바넬(Alexandre Cabanel:French Academic Painter, 1823-1889)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따온 것으로 콜라주 기법에 대한 그의 열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The Birth of Venus, 1863 by 알렉산드르 카바넬(Alexandre Cabanel)
    >> 되찾은 낙원(L'Arcadie Retrouvee) 이 부분은 현대적 아르카디아와 전통적 신화 속 아르카디아의 만남과 화해를 의미한다. 지우제페 페노네의 설치 작품인 <그늘을 들이마시다>로 대표되는 '되찾은 낙원'을 통해 1990년 대 현대화의 흐름 속에 나타난 자아의 추구, 오염되지 않은 자연으로의 회귀 속에서 근원을 찾는 것은 현재까지 끊임없이 재해석된 아르카디아가 결국 과거의 그것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 준다.
그늘을 들이마시다(Respirer l'ombre), 1999-2000/설치 작품 4가지 크기의 월계수 잎으로 채워진 200개의 철망과 '폐' 모양의 황금 브론즈 by 지우제페 페노네(Giuseppe Penone)
    지우제페 페노네(Giuseppe Penone:Italian Arte Povera Sculptor and Conceptual Artist, 1947- )는 공간과 인체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통한 활동으로 유명한 작가이다. 1947년 이탈리아 가레시오에서 태어났으며 현재는 파리 국립미술학교의 교수직을 역임하고 있 다. 1960년대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미술 운동이자, 예술을 통해 사회적 권위나 위계질서를 파괴하려는 전위예술을 추구하고, 조악하고 진부한 것을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아르데 포페라(Arte Povera)'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작품을 통해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임을 끊임 없이 얘기하는데, 특히 나무라는 매체를 통하여 동양에서 말하는 '물아일체의 세계'를 표현함 으로써, 인간과 자연 사이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자연과 인간의 조우, 자연 속에서의 삶 등 자연 친화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아비뇽 대성당에서 열린 [아름다움]이라는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 다. 당시 지우제페 페노네는 이 작품의 설치를 위해서 교황관에 마련된 전시실의 전체를 사용 했다. 전시실 사방의 벽에 마치 커다란 벽돌처럼 만들어진 직육면체의 월계수 잎더미를 차곡 차곡 쌓은 후 그 표면을 철망으로 덮었고, 그 위에는 궁륭 형태의 둥근 천장을 얹었다. 한쪽 벽의 중간에는 폐 모양의 조그마한 황금색 청동 조형물이 걸려있는데, 이 기괴한 브론즈 는 월계수 향기를 담고 있는 녹색의 벽과 대조되면서 불안감을 조성한다. 자신의 작품 속에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던 페노네는 아름다운 플라토닉 사랑을 노래한 14세기 최고의 이탈리아 시인인 페트라르카의 시에서 이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작품에 사용된 월계수 잎은 페트라르카의 시에 등장하는, 한없는 사랑을 받았던 신화 속의 여 인의 이미지와 연계되면서 그 자체가 시적인 상징물이 되었다. 아비뇽에서의 전시가 끝난 후, 이 작품은 퐁피두센터로 옮겨지면서 약간 변화된 다른 모습을 띠게 되었다. 우선 월계수 잎으로 둘러싸인 사방의 벽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그 위를 덮었던 둥근 천장은 사라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월계수 향이 점점 엷어지고 잎들이 마르면 서 그 색이 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을 연상시키고, 나아가 모든 사물이 노화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의미한다. 고요함이 부드럽게 흐르고 있는 이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관람자들은 벽에 걸린 작은 '폐' 모양의 조형물과 은은하게 퍼지는 월계수 향 기를 통해 스스로 호흡하고 있는 작품의 생명을 의식하게 되고, 그 숭고함에 감동을 느끼게 된다.
아르카디아 목자들(The Shepherds of Arcadia), 1627 by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 풍요(L'Abondance) 푸생은 두 가지 버전의 <아르카디아 목자들>을 그렸는데, 첫 번째 그림에서는 아르카디아의 풍요로움을 강조하기 위하여 실제로 그곳을 가로질러 흐르던 알피오스 강을 그리스 신화 속 강의 신인 '알페이오스'로 의인화하여 표현했다. 아르카디아를 상징하는 여러 가지 도상들 중 하나인 강물을 통해, 다시 한 번 아르카디아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다. 폴 세잔 이후 현대 예술가들에게 나타난 정물에 대한 관심은 한 세기를 거쳐 꾸준히 이어져 왔다. 이러한 정물화 속의 과일이나 음식들을 통해서 우리는 여유롭고 풍요로운 아르카디아 (낙원)의 또 다른 면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붉은색 실내(Grand interieur rouge), 1948 by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French Fauvist Painter and Sculptor, 1869-1954)
    1948년 봄에 완성된 이 작품은 앙리 마티스가 그린 <실내> 연작 중 마지막 작품일 뿐만 아니라, 마티스의 작품 세계가 가장 잘 표현된 총체적인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마티스가 화가로서 의 삶을 숭고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해 준 최후의 완성작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세심한 구성이 돋보이는 이 그림은 모든 소재가 한 쌍씩 짝을 이루고 있다. 벽에는 직사각형의 회화와 데생이 양쪽으로 걸려 있고, 바닥에는 두 개의 테이블과 두 개의 모피 양탄자가 있다. 이렇게 쌍을 이루고 있는 소재들은 서로 대조를 이루며 연결되어 있다. 오른쪽 상단에 결려 있는 그림은 마티스의 또다른 <실내> 연작인 <파인애플이 있는 실내>로 이 그림 속 탁자 밑으로 깔려 있는 모피 양탄자는 본 그림의 하단에 있는 모피 양탄자와 또 한 번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작품 왼쪽 상단에 그려진 검은색과 흰색의 그림은 창문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붉은색이 지배하고 있는 실내에서 마치 또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는 연결 통로와 같은 느낌을 준다. 이렇듯 서로 관계없이 배치되어 있는 각각의 소재들은 강렬한 붉은 배경색에 둘러싸여 하나로 연결된다. 이 강렬한 붉은색은 마티스의 또다른 대표작인 <붉은 아틀리에> 외에도 다른 여러 작품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가 즐겨 사용했던 색이다. 마티스는 이 작품을 통해 데생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면서 색과의 조화 또한 이루어냈다. 몇 개의 선을 이용해 원근법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스듬히 놓인 테이블과 의자를 통해 뛰어난 솜씨로 공간감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만의 붉은색이 모든 사물에 스 며들어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초록색 찬장이 있는 정물(Nature morte au buffer vert), 1928 by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앙리 마티스는 여러 번에 걸쳐 세잔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고, 그의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얻 었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이렇듯 강력한 세잔의 영향은 1899년 이후로 마티스의 모든 작품들 하나 하나에 깊숙이 파고 들었다. 예를 들어 이 그림 속의 소재는 세잔의 작품이 그러했듯, 이 국적이거나 과장된 느낌이 아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바둑판 무늬의 식탁보나 은은한 무늬가 새겨진 물병은 마티스가 니스에서 그렸던 초기 작품들 의 화사함과는 거리가 멀다. 일상적인 사물들에 대한 관찰, 각 사물들을 분명하게 분리하는 독자적인 표현법, 공간 구성에 대한 독창적 해석, 그리고 색조들의 조화는 바로 마티스가 세잔 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세잔에게 배운 모든 것을 차분하고 안정된 색조를 사용하여 공간 속에 적절히 배치했다. 그리고 1912년부터 1914년에 구사했던, 흰색과 검정색 테두리로 강조된 파란색과 녹색의 조화를 응용하여 마티스는 세잔의 화풍을 자신만의 새로운 스타일로 승화시켰다.
목련이 있는 정물(Nature morte au magnolia), 1941 by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카네포르(Canephore), 1922 by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카네포르> 연작은 꽃바구니를 들거나 이고 있는 반나체의 여인들을 그린 대작들이다. 광주리를 머리에 인 그리스 풍습에서 착상한 1920년대의 <카네포르> 시리즈에서는 고전적 세계 에 대한 동경을 나타내었으며, 또한 프랑스적인 아름다움의 소지자, 고전적 전통의 후계자로서 의 자각도 가지게 되었다.
과일그릇과 식탁보 위의 과일(Fruits sur une nappe et compotier), 1925 by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이 커다랗고 고전적인 정물화는 조르주 브라크의 1920년대 작품 세계를 종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수많은 수집가들이 탐을 냈던 작품이다. 악기와 악보, 과일 그릇 위에 놓인 과일 등 전통적인 정물화 소재들이 주름진 하얀 식탁보 위에 놓은 채 화면의 중심을 채우고 있는데, 하얀 식탁보로 인해 정물들은 화면에서 동떨어진 것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사물마다 얇은 하얀색 테두리 선으로 마무리를 함으로써 그 색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표현한 것도 특징적이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초록색 배경 무늬는 브라크가 입체주의 형식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공간을 재창조하고자 했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회색과 녹색을 절묘히 조합하여 나타낸 색채의 환상적인 조화와 역동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무늬 가 나타내는 리듬감은 작가가 그림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시적인 공간을 관객들이 마음껏 감 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붉은 원탁(Le Gueridon rouge), 1939-1952 by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이 작품은 원탁을 주제로 한 조르주 브라크의 작품 중 가장 늦게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의 배경은 마룻바닥과 잎사귀 무늬가 있는 붉은 벽지, 그리고 그 둘을 이어주는 나무색 연결 부분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화면의 중앙에는 검은색과 짙은 고동색으로 칠해진 별 모양의 식탁보가 있으며, 그 뒤에 여러 가지 정물이 밝게 그려져 있다. 식탁보는 마치 꽃다발 의 테두리처럼 원탁 위의 소재들을 둘러싸고 있고, 유연하고 날씬한 원탁의 다리는 마치 꽃다 발의 줄기와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크리스탈 물병과 유선형의 기타, 과일이 놓여진 접시와 흰 행주 위에 놓인 두 개의 멜론 등 정물을 배열한 화면 구성이 매우 독특하다. 정물 뒤쪽으로 그려져 있는 두 개의 직사각형은 창문을 형상화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는 작품 하단부에 검은색으로 칠해진 그림자로 미루어 볼 때, 직사각형으로 형성화된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라고 여겨진다. 브라크가 1936년에 완성한 <원탁>이 라는 작품과 비교해 볼 때, 이 작품은 좀더 단순한 구성으로 그려졌지만, 표현 방식으로 볼 때 는 복잡하고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브라크는 이 작품을 통해 기존의 전통적인 정물화가 지니고 있던 전형적인 주제들을 이질적인 요소의 삽입과 기괴한 형식을 통하여 깨뜨 렸기 때문이다.
악기(Musical Instruments), 1908 by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붉은 바이올린(Le Violon rouge), 1948 by 라울 뒤피(Raoul Dufy)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라울 뒤피는 작품 속에서 콘서트나 오케스트라의 세계를 즐겨 표현했 다. 그는 교향악단이나 실내악단, 전원 콘서트, 심지어 멕시코의 마리아치 악단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묘사했다. 뒤피는 음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신화의 인물들이 중세 이탈리아 의 즉흥가면극에 등장하는 어릿광대의 모습을 모티프로 자주 선택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리라를 들고 있는 오르페우스와 아폴론>이나 <어릿광대 옷을 입은 바이올리니스트> 와 같은 뒤피의 많은 그림들 속에서 바이올린이나 첼로와 같은 악기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뒤피가 페르피냥 지방의 베르나르 니콜로 박사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그린 것으로, 그의 바이올린 그림 연작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이 그림은 음악적 테 마를 사용한 정물화의 전통적인 예로서, 모차르트, 바하, 쇼팽, 드뷔시 같은 자신이 존경했던 음악가들에게 헌정하고자 만든 회화 작품들을 변형한 것이다. 펼쳐진 악보 위에 '그림(la peinture)'이라는 단어를 써 넣음으로써 자신과 음악, 작품을 일치시키고자 했던 그는 이 그림 을 통해 화가로서의 강한 자부심과 아이러니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과일이 있는 정물, 1953 by 모이즈 키슬링(Moise Kisling)
    폴란드계 프랑스 화가 모이즈 키슬링(Moise Kisling:Polish-born French Painter, 1891-1953) 은 크라쿠프 미술 아카데미에서 요세프 판키에비치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를 통해 인상주의자 들, 특히 보나르와 뷔야르(Edouard Vuillard:French Post-Impressionist/Nabi Painter, 1868- 1940)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 키슬링은 1910년 몽파르나스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유명 인물이 되어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Italian Expression‎‎ist Painter and Sculptor, 1884-1920), 샤갈의 친구가 되었다. 1911-12년 세레에 있는 예술가 그룹의 일원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피카 소, 브라크, 후안 그리스(Juan Gris:Spanish Cubism Painter:1887-1927), 시인 막스 자코브 (Max Jacob:1876-1944)가 참여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입체주의와 앙드레 드랭의 영향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외인부대에 자원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성숙기의 그의 양식은 매끈하고 우아한 소묘, 그리고 섬세하게 조율된 색채를 특징으로 하며, 그는 초상화가로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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