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 실존인가 신화인가?
- 역사적 예수는 교리적 배타와 독선을 용납하지 않는다 -
그리스도교란 글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종교'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교의 중심이며 그 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과 방향이 결정된다.
그러면 그리스도(문자적으로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신의 권위를 부여받은 자, 즉 이스라엘과 인류의 구원자로 신이 보내신 자)라고 고백되는 예수는 누구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정통도 되고, 이단도 된다.
1. 역사적 예수와 '카더라 통신'
예수가 누구인지 객관적 정답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천년 전에 살았다고 전해지는('살았던'이 아니라) 예수에 대해 학자들도 자기들이 해석하는 예수를 말할 뿐, 자기 주장이 절대로 옳다고 증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물론 "성경책에 다 나와 있다.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오류 없이 사실이다."라고 믿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것 역시 카더라 통신일 뿐이다. ('카더라 통신'이란, "사람들이 ~라고 하더라"는 말로, 증명되지 않은, 또는 증명할 수 없이 떠도는 말을 가리키는 은어다.)
성경이 카더라 통신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독실한 기독교인들에게 괴로운 일이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후 성서가 각국 언어로 발간되고 그 내용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성서 안에는 수많은 모순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독실한 신앙인들 중에서 절망감과 허망함, 두려움을 넘어서고 이 '거룩한 책'을 이성과 과학에 의해 분석하기 시작한 용감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진실된 노력의 결과로 오늘날 대부분의 지성인들은 '성서의 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손에 전해진 성서는 모두 사본에 의존한다는 것, 원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그 사본들은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점도 있고 인위적으로 삽입된 흔적이 발견되는가 하면 심지어 당시 종교 조직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성서 원본은 오류가 없을까? 원본 자체는 하느님의 말씀을 오류 없이 그대로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마태복음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그 책은 마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예수 사건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서기 30년경으로부터 50년이나 지난 80~90년대에 기록한 책이다. 그 50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다고 전해지는 말과 그가 행했다고 전해지는 행적을 기억에 의존하여 말로 전하다가(전승의 단계), 어느 시점부터는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단편적인 기록의 단계).
마침내 마태공동체 사람들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미 존재해있는 다른 자료를 참고해서 그들의 복음서를 엮어냈다. 그들이 참고한 자료는 서기 70년경에 기록된 마가복음과 그보다 좀 더 앞서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Q자료(Quelle라는 독일어의 첫 자로, 자료라는 뜻)>, 그리고 마태공동체만이 소유했던 또 하나의 고유자료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들은 하느님께 어떤 계시를 직접 받는다는 생각이 아예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이것이 예수의 복음이라고 하더라."고 전하는 자료에 의존하여 복음서를 기록했다. 즉 마태복음의 원본 역시 '카더라 통신'이라는 얘기가 되겠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손에 쥐고 있는 성서라는 책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얘기가 전해지고 전해진 전승을 거친 다음에, 또 다시 이사람 저사람 손을 거쳐 온 '카더라 통신'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역사적 예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신앙의 출발점이 되어야
그러면 카더라 통신일 뿐인 성서가 우리 기독교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그 카더라 통신인 성서를 통해서도 예수와 만날 수 있고, 그와 교제하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넘치는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종교생활 또는 신앙생활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은 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에 빠지게 되고, 그 거짓을 감추기 위한 세뇌와 맹신의 악순환에 끝없이 말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에 눈을 뜨는 것은 괴로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세뇌와 맹신의 굴레가 만들어낸 거짓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기에 나는 신학자들 뿐 아니라 일반 교우들도 역사적 예수를 반드시 알아야 하며, 그 역사적 예수의 기반 위에 우리의 신앙이 세워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래야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이 진실의 토대 위에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면 할수록 그 분의 존재와 그 흔적에 대한 전통적인 확신은 더욱 사라지게 된다. 지금 역사적 예수 연구의 첨단을 걷고 있다고 평가되는 미국의 예수세미나 학파 사람들도 예수의 실존 여부는 거의 확신하고 있지만, '성서에 기록된 예수'와 '역사적 예수'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반면에 기독교 내에서도 여전히 예수의 실존에 의문을 품는 학자들도 많다. 예수세미나 사람들보다 앞서 역사적 예수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와 불트만 등은 역사적 예수의 실체를 완벽히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그 분의 실존 자체를 의심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은 포스트 불트만 학자들은 미국의 예수세미나 사람들이 도달한 역사적 예수론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들이 발견했다는 역사적 예수는 '이천년 전의 갈릴래아의 예수'가 아니라 '20세기 캘리포니아의 예수'라고 비꼬기도 한다.
3. 진실의 토대 위에 새로운 신앙 구축하기
"역사적 예수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말이 "역사적 예수의 실체를 밝힐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현대 신학은 역사적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안했는지, 존재했다면 개인이었는지 다수였는지, 역사적 예수를 '인물'로 보아야 할지 '사건'으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 논박하는 지점에까지 와있다. 하지만 바로 그 점, 역사적 예수의 실체조차 확신할 수 없다는 '역사적 예수의 진실'을 알고 받아들여야 진실된 기독교 신앙이 가능해진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기록이, 기록된 그대로 사실이 아니라 신화나 전설, 또는 문학에 의한 서술이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이천년 동안 세계를 지배했던 그 무섭고도 어두운 교리기독교가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구축된 허구였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깨달음 위에 화려하고 근사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진실된 기독교 신앙의 가치를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객관적인 연구를 통해 역사적 예수의 실체를 밝혀내고 그 진실의 토대 위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를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우리는 춘향전의 작가가 누군지 모른다. 춘향전에서 이몽룡과 성춘향이라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또는 실존했던 인물을 모델화한 것인지, 작가에 의해서 창의적으로 설정된 모델이었는지, 아무 것도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몽룡과 성춘향이라는 인물을 등장시켜서 당시 사회의 계급에 도전하는 작가의 정신은 분명히 살아있다. 춘향전이라는 작품이 존재하는 한, 그 작가의 정신을 부정할 길은 없다.
그러나 만일 춘향전이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작가의 기본 정신을 무시한 채 이몽룡과 성춘향의 말 하나 행동 하나에 얽매어 그들의 신앙과 삶의 절대기준으로 삼는다면,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도 그 기준에 의해 살도록 강요한다면 문제가 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춘향전이 문학작품이며 그 뜻과 의미를 새겨야지 사실로 받아들여 문자와 부분에 매여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되겠다.
이렇게 춘향전에 대한 바른 이해가 형성된다면, 그 다음에 춘향전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양반과 상놈으로 갈라진 계급을 비웃고 탐관오리에게 매타작을 놓으며, 당시에는 금기시된 성문화를 호쾌하게 개방하는 춘향전의 정신은 작가가 누구든 상관없이, 주인공의 존재 유무와도 상관없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마땅하다.
4. 예수운동의 기원과 절정
<춘향전>을 감히 <성서>와 비교하느냐고 화를 내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춘향전이 역사적 서술이 아니라 문학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전하는 가치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 것처럼, 성서에 나타난 예수정신과 예수운동의 가치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약성서 전체가 예수의 정신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예수에 대한 기록이 설화를 바탕으로 한 기록이건 사실을 바탕으로 한 기록이건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는 빼앗긴 자, 약한 자, 소외된 자 편에 서서 가진 자, 빼앗은 자, 억압하는 자에게 저항한다.
성서의 예수는 특히 종교권력에 저항한 레지스탕스였다. 그의 외침과 행동은 그대로 저항운동, 민중운동, 혁명운동이었고, 이런 기독교의 독특한 저항운동은 구약의 예언자 정신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서기전 8세기의 예언자 아모스에서부터 뚜렷이 나타나는 이 예언자운동의 절정이 바로 예수정신과 예수운동으로 꽃피운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아름답고 역동적인 운동은 성서 안에 예수 설화와 문학 서술로, 또한 그 가운데 녹아있는 저자와 편집자의 신앙고백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비록 여러 가지 상징과 비유로 기록되었지만 예수를 '신앙의 그리스도'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의 서술이기에 그가 하셨다는 말씀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신화, 그가 베풀었다는 기적 등 모든 자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사실과 문학적 서술을 구분한다.
그 예수는 비록 권력자와 종교지도자들의 야합에 의해 스러졌을지라도(십자가), 그 정신과 운동은 스러질 수 없는 것이기에(부활), 전승과 기록을 통해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역시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여전히 소중한 고백이요 따르고 살아내야 할 모범이다. 또한 그 분이 꿈꾸었던 하느님의 나라는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꿈이요 이상임과 동시에 기필코 이루어내야 할 목표이기도 하다.
이렇게 '역사적 예수'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신앙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성서의 인물들(등장인물 뿐 아니라 저자, 편집자 등을 포함한)이 경험했던 감동과 부활의 정신을 계승한다. 이렇게 21세기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새로운 단계로 이동하여 우리의 신앙을 역동적으로 이끌어주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정신과 운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5. '역사적 예수'에 기반을 둔 신앙은 배타와 독선을 용납하지 않는다
역사적 예수를 파헤치고 해부하는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성서 전체를 흐르는 예수정신과 예수운동의 맥이다. 나는 교리기독교는 점차 소멸의 길을 걸을 것으로 예상하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지만, 예수정신과 그 운동은 인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사라질 수 없을 것으로 본다.
현대신학이 기독교가 나아갈 방향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미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개인의 실존 여부를 넘어서 그의 이름으로 성서의 기록에 녹아 흐르는 정신과 운동이다. 그 정신과 운동은 너무도 보편적이고 인류애적인 것이기에 독선과 배타가 끼어들 틈이 없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바른 이해는 교리기독교의 독선과 배타를 돌파하고 극복하여 너그럽고 풍요로운 신앙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 신앙은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동반자 역할을 해온 과학과 합리주의, 휴머니즘, 아름다운 이웃종교들과도 충분히 벗이 되며 상생한다.
* 2009년 2월 21일 작성.
* 2011년 4월 30일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