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더 늦기 전에 내가 해 보고 싶었던 일에 도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드니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 기억력도 떨어진다. 그리고 두려움은 커지고 용기는 작아진다.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도전해 보는 게 맞다 싶었다.
직장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상대방이 위로를 받았다며 고마움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 역시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곤 했다.
‘아,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적성에 맞구나’
퇴직을 하고 계획한 건 상담대학원 진학이었다. 3년 정도 공부를 하고 상담 경력을 차근차근 쌓아가면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막상 공부를 해 보니 내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직장 생활이 힘들다는 후배들의 고민과 비슷한 정도의 어려움을 가진 내담자를 만날 거라는 생각 자체가 착각이었다. 우울증이나 자살 위험군으로 분류되는 이들도 내담자로 만나게 될 텐데 내가 과연 그들과 대면할 수 있을지 현실적인 고민을 하게 되니 자신감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런 의심 없이 인생 후반기 나의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걸 놓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빠른 결정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상담 공부를 그만두었다.
‘아무것도 해 보지 않고 포기한 건 아니잖아’
하지만 성격 자체가 극단적인 계획형인 ‘파워 J’인 내 앞에 '계획'이 사라지고 나니 순간 인생 후반기 전체가 공중에 붕 뜨는 듯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냥 좀 쉬면 될 일인데 해야 할 게 사라지니 안절부절못하는 시간 속에서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전 드라마 작가 교육원 과정을 지원했다. 상담의 꿈을 접고 그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게 뭔가 생각해 보니 글쓰기였다. 직장생활을 하며 받은 스트레스를 글쓰기로 달래던 경험을 떠올리며 지원서를 제출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그런데 결과는 불합격.
메일에 쓰인 ‘불합격’ 이란 글자를 확인하고 한참 동안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거실에 있는 식물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식물에게 줄 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받아진 물에 영양제를 탔다. 습도 측정기를 식물에 꽂아 상태를 확인하고 식물을 화장실로 옮겨 물을 주었다. 한참 동안 이 과정을 반복하며 물을 주고 나니 1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다시 의자에 앉아 불합격 메일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지원 동기’와 드라마 작가로서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보는 게 선정 기준이란다. 내가 쓴 지원서를 살펴보았다. 지원서에는 다른 교육원 수강경력과 방송활동경력을 적는 란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작성한 유일한 경력은 2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한 경력 단 한 줄 뿐이었다. 지원 동기 역시 “퇴직 이후 드라마 작가를 해 보고 싶습니다” 수준이었다. 절박함이나 절실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심사위원이었어도 안 뽑고 못 뽑았을 것 같네’
이렇게 냉정한 자기 객관화의 시간을 갖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가득 쓰인 다이어리를 책상 서랍에 집어넣었다. 언제 다시 꺼낼지 알 수 없지만 당분간이라도 아무 계획 없이 지내보려고 한다. 퇴직한 지 3년이 흘렀는데 무계획으로 지내보자 마음먹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마음이 자유롭고 가볍고 안온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