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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나는 풍경보다 아들을 더 오래 바라 봤다

작성자나*도|작성시간26.06.08|조회수30 목록 댓글 0

여행을 다녀온 후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여행이란 일상을 잠시 떠남으로써, 이곳에 매여 있던 나 자신을 분리해 내는 과정이다. 똑같은 루틴, 다르지 않은 매일, 프레임 속에 갇힌 단조로운 삶이 지속되면 매사에 미온적인 나를 마주하게 된다. 지루함이 밀려오는 그 순간 떠날 수 있다는 것은, 나를 이 프레임 밖으로 데려가 새로운 공기를 수혈하는 일이다. 들숨으로 들이마신 새로운 공기는 온몸을 통과하며 신선한 자극을 주고, 이내 깊은 날숨이 되어 나온다.

 

살아가면서 알게 되는 진실 중 하나는, 결국 과거의 하루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오늘의 내가 된다는 사실이다. 오늘 내가 본 것들이 나의 눈빛이 되고, 오늘 먹은 것들이 나의 몸이 되며, 오늘 읽고 쓴 것들이 내 안의 결이 된다. 피부로 쏟아지는 햇살도, 스쳐 지나가는 바람도, 눈앞의 풍경도 동행자와 함께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이다.

 

이번 여행에서 참 많은 풍경을 담았다. 낯선 이국땅의 공기를 머금은 공항과 기차역, 지하철과 버스는 물론이고, 각 나라의 화려한 랜드마크와 길가의 사소한 풍경들,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남겼다.

 

여행 중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돌아와서 사진첩을 정리할 때야 비로소 발견하게 된 '나도 모르게 반복된 시선'. 그것은 풍경 속에 담긴 아들의 모습이었다. 세계적인 랜드마크의 화려한 풍경보다, 유독 아들의 뒷모습과 어깨, 그리고 씩씩한 걸음걸이에 내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아들의 이름을 불러 세웠을 때, 돌아보며 짓던 그 어설픈 미소의 순간까지. 이토록 아들의 모습을 쫓아다니며 기록하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아들의 유년 시절 이야기였고, 사춘기를 지나며 아들은 점차 카메라 앞에 서지 않았고, 그렇게 우리 사이의 렌즈는 잠시 멀어지는 듯했다.

 

그랬던 아들의 성인이 된 모습은 조각조각 남아있던 기억 속 유년의 잔상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마지막 학기 복학을 앞둔 청년. 그 서글서글한 미소 뒤에는 복학 이후 마주해야 할 막막한 진로 고민이 묻어나 있었다. 앞으로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만큼이나 아들의 배낭과 어깨는 묵직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미지의 세계를 향한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눈빛은 여전히 반짝였고, 그 곁에는 엄마의 체력을 배려해 슬며시 늦춰 잡던 다정한 발걸음이 있었다.

 

아들이 어릴 때는 내가 늘 앞장서서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때 나의 시선은 늘 뒤를 향해 있었다. 아이가 다치지 않고 잘 따라오는지 확인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길을 찾을 때 앞장선 것은 보통 아들이었고, 나는 그 든든한 등을 보며 걸었다. 어느새 아들은 내가 뒤처지지 않는지 살피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그 과정을 가만히 돌이켜보니, 그 서툰 걸음걸음마다 세심한 배려가 녹아들어 있었음을 비로소 알겠다. 젊은 청년이란 자고로 제 속도에 취해 앞만 보고 가기 쉬운 법인데, 아들은 끊임없이 뒤돌아보며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기다려주었다. "엄마, 괜찮아?"라고 다정하게 물어주던 그 모든 행위들이, 이제 우리의 시선이 역전되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 중 아들의 심장을 가장 세차게 뛰게 했던 곳은 스페인 광장이다. 광장을 감싸 안은 반원형의 거대한 건축물과 그 아래를 흐르는 인공 운하, 그리고 타일 하나하나에 새겨진 그들의 역사. 그 압도적인 풍경 앞에 서자마자 아들은 마치 소중한 보물을 발견한 아이처럼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들이 광장의 분수와 화려한 타일 장식을 담기 위해 셔터를 누를 때, 내 렌즈가 향한 곳은 광장의 웅장함에 매료되어 붉게 상기된 아들의 얼굴이었다.

 

 

세비야 스페인 광장의 건물 벽면을 따라 줄지어 선 48개의 화려한 타일 벤치에는 스페인 각 주의 역사적 사건과 지도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즉, 이 광장을 한 바퀴 걷는 것 자체가 스페인이라는 거대한 하나의 세계를 탐험하는 일인 셈이다. 아들은 그 타일 지도를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으며, 앞으로 자신이 홀로 밟아나갈 거친 땅을 미리 상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교한 지도 위를 미리 달리는 청년의 열정이 그 옆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100년 전에 지어진 이 고풍스러운 광장은 영화 *<스타워즈>*에서 지구를 넘어 미지의 우주 공간인 '나부 행성'의 왕궁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위대한 감독들이 이 오래된 회랑에서 아득한 미래의 우주를 발견해 냈듯, 내 아들 역시 엄마가 만들어둔 안온한 프레임을 넘어 자신만의 무한한 행성을 상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세비야의 눈부신 햇살에 감탄했고, 오래된 건축물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눈부셨던 것은 "와, 진짜 멋지다"라고 조용히 중얼거리던 내 아들의 작은 목소리였다. 나에게 이번 여행의 진정한 '랜드마크'는 스페인 광장이 아니라, 그 광활한 광장 한복판에 서서 자신만의 지도와 우주를 기록하던 아들의 곧은 옆모습이었다.

 

아들은 그날 스페인 광장의 무엇을 그토록 간직하고 싶었을까. 자신이 담은 영상 속에 엄마의 시선이 이토록 길게 머물렀다는 것을 아들은 알까. 아들이 담아낸 것은 스페인의 역사였지만, 내가 담아낸 것은 한 청년이 세상을 향해 마음의 닻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엄마의 카메라 렌즈는 세상에서 가장 편파적이다.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운 풍경도 내 아들을 거쳐 갈 때 더 특별해진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눈부신 풍경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한 청년으로 당당하게 성장한 아들의 눈부신 '계절'을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아들은 남미의 낯선 땅 어딘가에서 홀로 자기만의 세상을 기록하는 중이다. 비록 지금 내 렌즈는 그곳까지 닿지 못하지만, 세비야에서 확인했던 그 뜨겁고 순수한 시선이 아들의 앞길을 외롭지 않게 밝혀주고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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