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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라이킷29
나도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현수적 사고
by현수의 미향
Jun 8. 2026
흔히 말하는 전화 공포증, 콜포비아의 유행. 그 시절을 통과하며 화면 뒤로 숨어버린 사람들의 문장 속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온기가 빠르게 증발하곤 했다. 온라인상에서의 예의 없음이 당연한 기본값처럼 번져가던 시절이었다.
문득 스마트폰의 오래된 문자메시지 함을 맨 아래부터 정리하다가, 먼지 쌓인 번호 하나를 발견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담임선생님.
그 시절 담임선생님께서는 문자 메시지로 공지사항을 자주 보내주시곤 했는데 나는 그 문자를 받을 때마다 일종의 엄격한 프로토콜을 가동했다.
첫 줄은 무조건 ‘안녕하세요, 선생님.’
마지막 줄은 감사할 상황이 아니더라도 기승전 ‘감사합니다.’
그게 학생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당연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아이들을 크게 혼내신 적이 있었다. 메시지로 공지를 보내도 읽고 씹거나, 대뜸 본론만 툭 던지는 아이들의 무례함에 그간 참아왔던 서운함을 털어놓으신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그러셨을까.
아무튼, 이 고귀한 선비 정신은 대학교에 가서도 힘을 발휘했다. 어느 전공 수업에서 받은 처참한 학점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밤새도록 모니터 앞에서 엄청난 고민과 고뇌를 거듭하며 메일을 써 내려갔다.
시작은 당연히 정중한 인사말. 내가 수업을 들으며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고,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아주 예의 바르고 조심스럽게 담았다. 억울함을 토로하는 투정이 아니라, 순수한 궁금증임을 어필하기 위해 마지막엔 ‘ㅇㅇㅇ 올림’이라는 클래식한 마침표까지 찍었다.
이튿날, 교수님에게서 뜻밖의 (아니 예상대로) 장문의 답신이 왔다.
원래는 학점에 항의하며 막무가내로 메일을 보내는 학생들이 많아서 절대로 피드백을 안 해주는데, 내 메일을 보고는 정말 꼭 알려주고 싶으셨단다. 어느 부분에서 감점이 되었는지 세세하게 적힌 글을 보며, 비록 학점은 그대로(팩트다)였을지언정 묘한 안도감이 스쳤다. 예의를 갖춘 내 말투가 교수님의 굳게 닫힌 마음의 안테나를 건드린 셈이다.
자타공인 초슈퍼울트라 INFJ인 나는 타인의 말 한마디는 물론, 내가 하려는 말 한마디에도 수많은 생각과 깊은 마음을 담아내는 피곤한 성격의 소유자다. 이 문장이 상대에게 어떻게 읽힐지 혼자 방구석 상상을 풀가동하다 보면, 정작 타이밍을 놓쳐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속으로는 거의 유교 경전 급의 고결한 문장을 완성해 놓고, 세상 밖으로는 그저 "허허" 하는 영혼 없는 헛웃음만 출력하는 식이다.)
그래서 사소한 일이라도 상대가 기분 나빠 보였거나 내가 아주 미세한 실수라도 한 것 같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날 해가 지기 전에, 아니 그 사람과 '헤어지기 전에' 사과를 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초슈퍼울트라 INFJ인 나는 타인의 무심한 말투나 작은 실수 하나에도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내적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INFJ들은 200% 공감할 것이다. 낮에 들은 말 한마디가 밤에 누웠을 때 천장 위로 자막처럼 지나가고, 새벽 2시에 갑자기 억울하고 서러워서 눈물 찔끔 흘리는 그 지독한 알고리즘을 말이다.
내가 그 지옥 같은 밤을 밤새도록 앓아봤으니, 감히 남에게는 그 뾰족한 밤을 선물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밀린 숙제를 끝낸 것처럼 내 마음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이쯤 되면 두 다리 쭉 뻗고 편안하게 잘 자리를 선점하기 위한 이기적인 평화주의에 가깝다.)
이렇다 보니, 일상에서 ‘감사합니다’와 ‘죄송합니다’라는 당연한 말을 타이밍 맞춰 제때, 제대로 뱉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다. 나는 저울질하느라 삼키기 바쁜 그 쉬운 말을, 그들은 제때 던질 줄 아는 단단함을 지녔으니까.
작년에 내가 일하는 근무지에서 문득 펼쳐 든 책 한 권이 있었다. 그 속에서 심장을 쿡 찌르는 구절을 만났다.
‘때문에’라는 말 대신, ‘덕분에’라는 말을 사용하라. 는 것이다.
누군가를 탓하고 원망하는 ‘때문에’의 시선을 거두고, 나에게 온 모든 상황을 긍정으로 바꾸는 ‘덕분에’의 마법. 요즘 유행하는 밈으로 치면 원영적 사고, 아니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완벽한 ‘현수적 사고’의 시작점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너 때문에 학점이 이 모양이야’라고 교수를 탓하기보다, ‘교수님 덕분에 제가 부족한 부분을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마음을 바꿔 먹는 것.
‘선생님 공지 때문에 귀찮아 죽겠네’가 아니라, ‘선생님 덕분에 중요한 정보를 놓치지 않았습니다’라고 첫 줄에 인사를 건네는 것.
말투라는 건 결국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예의를 생략하는 것이 쿨한 것으로 포장되는 세상 속에서, 굳이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를 꾹꾹 눌러 담는 수고로움.
그래도. 이 다정한 말투 덕분에 누군가의 차가운 하루가 아주 미세하게나마 따뜻하게 흔들리지 않았을까.
... 이렇게 생각하며 뿌듯한 마음으로 카카오톡을 열어보았더니. 웬일이야. 정작 내 채팅방들은 ‘안녕하세요’로 시작한 적이 거의 없네.
고고한 선비 정신은 메일함에나 두고 온 모양이다. 화면 가득한 ‘ㅋㅋㅋ’의 향연을 보며 조용히 카톡 창을 닫았다. 타인의 말투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 내 안의 예의 안테나부터 긴급 수혈이 시급해 보인다.
역시 인간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요. 남의 무례함에 정색하기 전에, 내 손가락의 오만함부터 먼저 단속해야겠다는 아주 기분 좋은(?) 패배감이 밀려오는 밤이다.
아니, 잠깐만. 이대로 고고하게 패배를 인정하기엔 억울해서 도저히 발이 안 떨어진다. 슬그머니 카톡 창을 다시 열어 뒤끝 가득한 조사에 착수했다.
비록 내 대화의 시작에 ‘안녕하세요’는 가뭄에 콩 나듯 할지언정, 무언가를 받았을 때의 ‘감사합니다’ 만큼은 스팸 메일 급으로 투척해 왔다는 사실을 간신히 찾아냈다. 누군가 커피 한 잔이라도 사주면 현장에서 입이 닳도록 고맙다 하는 건 기본이요, 헤어진 뒤 카톡 창에 기어코 ‘오늘 커피 잘 마셨습니다!’라며 영수증 인증샷 마냥 감사를 꾹꾹 눌러 담아 보냈던 것이다. 베푼 사람의 지갑 마일리지가 아깝지 않게 하려는 나름의 눈물겨운 철칙이랄까. (농담이다.)
그저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고 뿌듯해지지 않나. 어려운 일도 아닌데, 그렇게 다들 잠깐씩이나마 기분 좋으면 좋은 거지 뭐.
고마움의 지분만큼은 확실히 챙겼으니 이만하면 꽤 괜찮은 선비 아닌가.
구차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정신 승리다.
아니, 완벽한 ‘현수적 사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