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언제 퇴직해요?"
미용실 원장이 얇은 니트릴 장갑을 낀 손으로는 부지런히 내 머리카락 구석구석 염색약을 바르면서, 시선은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10년이 넘는 오랜 단골이라... 내가 몇 개월 전 퇴직을 했고 남편도 곧 퇴직을 할 거라는 우리 부부의 은퇴 계획을 대충 아는 사람이다.
"글쎄요, 아마 6개월, 길면 1년쯤 뒤에?"
"퇴직하시니 얼굴이 좋아 보여요."
"네, 좋네요. 지금은 그냥 집에 드러누워만 있어도 좋네요. 남편도 얼른 같이 놀면 좋겠는데...."
"예? 무슨 말씀을... 미치도록 사랑해도 그건 안 되는 거예요. 혼자 노는 게 얼마나 좋은데요! 우리 남편 퇴직해서 집에 있는 이후로 제가 얼마나 일찍 출근하는데요."
"흐흐흐"
"큭큭큭"
서로 시선이 마주치며, 서로의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누가 이 대화를 듣기라도 하는 듯, 조용히 킥킥거렸다.
예전 직장 선배들을 만났다. 15년도 넘은 모임 멤버들인데, 낮시간 모임이 불가능한 현역들은 빼고, 나를 포함해서 퇴직한 네 사람만 처음으로 낮시간에 만났다. 우리 지역 내의 비싼 아파트들이 밀집한 주택가에서 낮시간의 카페는 내 나이 또래 50~60대의 주부들로 넘쳐나고 있었다.(평생 일하느라 낮시간에 카페 못 가본 사람의 눈에는 그조차도 생경한 풍경이었다.)
"쉬니까 좋지?"
"일하겠다는 사람 뭐 하러 빨리 퇴직하라 그래? 끝까지 다니라고 해. 본인이 원하는 만큼..."
"남편들은 갈 때가 없어. 맨날 놀아주는 거 얼마나 힘든 줄 아냐?"
"혼자 쉬는 그때가 제일 좋은 거야. 집에 있는 사람 밥걱정 안 해도 되고..."
오늘도 남편 점심상을 차려주고 나왔다는 선배언니들은, 빨리 남편과 같이 놀고 싶다는 철딱서니 없는 후배인 나에게 당신들이 먼저 겪는 동반퇴직 이후의 생생한 경험담들을 풀어놓으며 정신 차리라고 쓴소리를 했다. 진심인 듯 아닌 듯 그 잔소리 끝에는 다 같이 웃었다. 사랑하는 배우자이지만 너무 붙어있지는 않고 싶은 그 마음이 네 마음이도 하고 내 마음이기도 하니까....
우리 부부는 사이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비교적... 많이...
내 마음의 큰 사랑이 아이에게로 옮겨가는 경험이 없어서인지, 남편을 향한 마음이 결혼 초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싸울만한 외적인 갈등 상황도 없었고, 둘 다 일하느라 바빠서인지 크게 마음이 상할 만한 기대나 실망도 별로 없었고, 그저 평안하게 25년 넘게 지내오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너무 늦기 전에, 다리에 힘 빠지기 전에 퇴직도 자발적으로 해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여행도 가는 꿈을 그려 왔다.
우리가 퇴직을 계획했던 해(나는 만 55세, 남편은 만 56세}가 되었고, 나는 예정대로 먼저 퇴직을 했다. 일단 출근만 하면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그건 그냥 오랜 습관 내지는 관성이었을 뿐이었다. 아침마다 출근길 나서기가 지긋지긋한 마음이었고, 무엇보다 내 일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 자부심이 차디차게 식었다. 나는 마지막 몇 개월은 '일하기 싫다'라고, '출근하기 싫다'라고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뇌뇌이면서 다녔다.
퇴직을 하고 나니, 한 때는 천직이라 여겼던, 25년 이상 본업이었던 그 일은 안 해도 된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시간이 자유롭게 펼쳐졌다. 도서관에 가서 책도 읽고, 글도 끄적거리고. 주민센터의 운동프로그램도 다니고, 오랜 로망인 피아노도 배우고.... 내가 관심과 의욕만 있다면 할 거리는 너무도 많았다. 일단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운동으로, 피아노학원으로, 도서관으로, 때로는 소파 위로... 아무도 독촉하지 않아도 혼자 좋아서 종종거리며 다닌다.
아침은 남편과 함께 하는 밥상을 차리지만 점심은 먹는 것도 먹지 않는 것도, 김밥을 사 먹든 찬밥을 물 말아먹든 나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다. 남편이 현관문을 나서는 9시부터, 다시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8시까지는 온전히 나만의 세상이 되었다. 게다가 몇 개월이 지나면서 나만의 루틴이 생겼다. 간혹 평일에 남편이 연차로 쉬는 날이면 남편을 배려해 나의 일정을 빼거나 조정하며 같이 놀/아/주/는 일정의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혼자만의 오롯한 평화에 남편으로 인한 작은 소용돌이가 생긴다. 내 스케줄을 조정하며 남편과 '놀아주는'날이 생길수록, 미용실 원장님의 킥킥거림과 선배언니들의 쓴소리가 마음 구석에 슬며시 떠오른다. 나 역시 선배언니들처럼 혼자만의 고요한 자유에 길들여지고 있나 보다.
이제는 새로운 몇 가지 깨달음을 얻는다. 한 가지는, '여보야, 얼른 퇴직해서 같이 놀자'라고 하는 말은 섣불리 입 밖으로 내지 않으려 한다. 남편의 중요한 인생의 고비에 내 강권이 들어가서, 혹시라도 본인이 퇴직을 후회하거나 아쉬워할 때 ' 너 때문이다.'라는 생각이 들게 해선 안될 것 같은 조심스러운 마음도 들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인생의 선배들이 하신 말씀대로 '따로 또 같이'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려 한다. 함께 여행을 다니자는 우리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고, 속히 이루고 싶은 꿈이다. 다만 이제는 현실적으로 알겠다. 부부가 은퇴해서 함께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각자의 동굴과 독립된 우주는 필요한 법이라는 것을... 하루 종일 얼굴을 맞대고 서로가 부담스러운 사이가 되지 말고, 각자의 세계를 즐기고 저녁 식사자리에서 오늘의 하루를 조잘조잘 나누는 사이가 되어 한다는 것을.
그렇게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이자 가장 편한 휴식처로 함께 늙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