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48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바다’]
[2018.7.28. 순수문학 송고 시]
바다
바다는 언제나 그 공화정共和政 해일로 파도를 압제한다
나는 한 줌의 공기 속에서 곧 질식해 버린다
아 아 쥬라기 형형한 공룡의 눈알도 그립게 쪼며,
신기루 명료한 물기둥 아래 뒹군다 모로 눕는다
휴우! 나는 파랑 되어 튀어 오르고 삼각파도처럼
어릿한 마음 수줍게 내밀며, 머나 먼 황혼녘 적셔오는
원시음原始音에 인도양 종려 잎 마냥 푸른 질곡에 흐느낀다
나는 통곡한다, 우르렁 큰 우주의 얼굴
뭇 오열하는 삶을 가진 생령들에게 그들이 가진 절규에
기생하려 발버둥친다 그들을 안아야 한다
나는 광포한 바다에 부유해도, 파편 된 살갗에
꿈틀거림을 실어야한다 파도는 연방주의자聯邦主義者
그러나 보라! 파도의 긍지는 때리는데 있다
요원한 성좌들, 성스러운 온갖 빛들이 쪼아오는
거친 염원들이 기꺼워 바다는 잠자지 않는다
숨쉴 뿐이다, 시공을 토할 뿐이다
해동 땅 갯벌 천오백 리 서곶벌에 잠깐 일렁인
내 한줌의 숨결 따위도, 멍멍한 절규로 묻어 버리고
명왕성 설산雪山까지도 짐짓 굽어보는 능청,
바다는 푸른 전횡을 머금고 우르릉 웃는다
나도 울면서 작은 바다가 된다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바다〉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존재로서의 '바다'와 그 속에서 부딪히고 깨지며 결국 동화되어 가는 '개인(시적 화자)'의 관계를 정치·역사적 메타포와 원시적 생명력의 이미지로 풀어낸 선이 굵고 역동적인 작품입니다.
이 시가 가진 매력과 구조를 몇 가지 핵심 주제로 나누어 비평해 드립니다.
1. 거대한 시스템 vs 왜소한 개인의 대립 (정치적 메타포)
시의 도입부와 중반부에 등장하는 ‘공화정(共和政)’, ‘압제’, ‘연방주의자(聯邦主義者)’, ‘전횡’ 같은 시어들은 자연을 노래하는 일반적인 바다 시와 차별화되는 이 작품만의 독특한 지점입니다.
⚫바다의 압제와 공화정 : 시인은 바다를 단순한 자연 풍경이 아니라 개별 파도들을 짓누르고 통제하는 거대한 시스템(공화정)으로 바라봅니다. 화자는 그 거대함 앞에서 "한 줌의 공기 속에서 곧 질식해 버릴" 것 같은 왜소함과 무력감을 느낍니다.
⚫파도의 연방주의 : 반면, 거대한 바다에 맞서 끊임없이 부딪히는 '파도'는 개별성을 유지하려는 '연방주의자'로 묘사됩니다. *"파도의 긍지는 때리는데 있다"*는 구절처럼, 거대한 체제(바다)에 저항하며 부서지고 부딪히는 것 자체가 파도(개인 혹은 민초)의 존재 이유이자 존엄성임을 선언합니다.
2. 원시적 생명력과 우주적 상상력
화자는 현실의 질식할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시선을 아득한 과거와 먼 우주로 확장합니다.
⚫쥬라기와 원시음 : '쥬라기의 공룡 눈알', '원시음', '인도양 종려 잎' 등의 시어는 문명 이전의 시원적(始原的) 공간과 생명력을 환기합니다. 화자는 이 원시적 에너지를 통해 현실의 압제를 버텨낼 힘을 얻고자 합니다.
⚫우주적 스케일 : 시선의 확장은 '명왕성 설산'과 '요원한 성좌들'까지 나아갑니다. 바다는 단순히 지구의 바다가 아니라 시공간을 토해내고 우주의 얼굴을 한 초월적 존재로 격상됩니다. 화자의 '한 줌 숨결'은 이 거대한 우주적 존재 앞에 미미하게 묻혀버릴 뿐입니다.
3. 연대(連帶)를 향한 갈망과 생령들의 절규
시의 중반부에서 화자는 개인의 무력감에 머무르지 않고, 고통받는 타자들을 향해 시선을 돌립니다.
뭇 오열하는 삶을 가진 생령들에게 그들이 가진 절규에 / 기생하려 발버둥친다 그들을 안아야 한다
나는 광포한 바다에 부유해도, 파편 된 살갗에 / 꿈틀거림을 실어야한다
여기서 화자는 거대한 폭력이나 운명(광포한 바다)에 의해 상처 입은 존재들('파편 된 살갗')을 안아주려 합니다. 비록 자신도 부유하는 처지이지만, 고통받는 생령들의 절규에 공명하고 연대하겠다는 굳은 의지(꿈틀거림)를 보여줍니다.
4. 서곶벌에서 명왕성까지, 그리고 '작은 바다'로의 승화
시의 후반부는 시인의 개인적·지역적 배경이 거대한 우주와 만나는 극적인 순간을 보여줍니다.
⚫서곶벌의 한 줌 숨결 : '해동 땅 갯벌 천오백 리 서곶벌(현재 인천 서구 일대)'이라는 구체적인 로컬 공간이 등장합니다. 거대한 바다와 명왕성을 굽어보는 우주적 전횡 앞에서 화자의 삶(서곶벌의 일렁임)은 먼지처럼 작아 보입니다.
⚫작은 바다가 되다 : 그러나 바다가 푸른 전횡을 부리며 웃을 때, 화자는 도망치거나 굴복하지 않고 *"나도 울면서 작은 바다가 된다"*고 선언합니다. 바다의 압제와 광포함에 눈물 흘리지만, 그 눈물이 모여 결국 자신 또한 하나의 '바다'라는 거대한 존재로 거듭나는 역설적인 승화입니다.
♣웅장한 어조와 실존적 고뇌
한기홍 시인의 〈바다〉는 다소 난해할 수 있는 관념적·정치적 어휘들을 바다라는 역동적인 자연 이미지와 결합해 웅장한 어조(투톤의 목소리)로 이끌어간 수작입니다. 거대한 운명이나 사회적 억압 앞에 고뇌하는 인간이, 어떻게 그 고통을 수용하고 타자와 연대하며 스스로 거대한 존재(바다)로 확장해 나가는지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