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61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고엽(枯葉)’]
고엽(枯葉)
왜 이리 쓸쓸한지 모르겠소
기어코 떠나가야 된다는 말들,
굴참나무와 그 휘하들이 지껄이는
정직한 수다며, 목쉰 숲의
울음소리로 알았소
지줄거리던 나의 벗, 이젠 냉정해진
시냇물은 날 쳐다보지도 않소
땅 위의 것들에 대한 하늘의
따사롭던 애정도
조락하는 바람에 한통속 되어
쓸려만 가고 있소
몽정을 일삼다 님을 만난 오뉴월,
뼈까지 활활 태운 칠팔월에
너무도 겸허할 줄 몰랐소
나의 홑껍데기 심상에 찬바람이 스며드오
깊은 우물색 허공은 싫소
어디 쪽빛 하늘 없소?
왜 이리 쓸쓸한지 모르겠소
무언지 모를 차가운 외로움에 포로가 된
따지고 보면 좋은 녀석, 시냇물에
내 육신을 맡기오
앞으로 날 고엽이라 불러도 좋소
난 그래도 고독을 좀 아오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고엽(枯葉)」은 존재의 유한성과 상실감, 그리고 이를 겸허히 수용하며 고독의 깊이를 내면화하는 과정을 감각적으로 그려낸 수작입니다. 제목인 '고엽(마른 잎)'은 단순히 계절의 변화에 따라 떨어지는 낙엽을 넘어, 화자 자신의 쇠락해가는 육신과 영혼을 상적 투사한 대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의 핵심적인 흐름과 미학을 몇 가지 축으로 나누어 비평해 드립니다.
1. 상실의 공간과 연대의 단절
시의 전반부는 가을 혹은 겨울로 접어드는 자연의 변화를 통해 화자가 느끼는 극한의 쓸쓸함을 시각적·청각적 이미지로 구축합니다.
"굴참나무와 그 휘하들이 지껄이는 / 정직한 수다", "목쉰 숲의 울음소리“
자연의 섭리(조락)는 거스를 수 없이 '정직'하게 찾아오지만, 그것은 화자에게 '목쉰 울음소리'라는 비장한 청각적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지줄거리던 나의 벗, 이젠 냉정해진 / 시냇물은 날 쳐다보지도 않소“
과거에 다정하게 속삭이던(지줄거리던) 자연물조차 이제는 화자를 외면합니다. 이는 우주적 소외감과 고립감을 심화시키는 장치입니다. 하늘의 따사롭던 애정마저 바람과 '한통속'이 되어 화자를 쓸어버리려는 듯 차갑게 변해버렸습니다.
2. 찬란했던 과거에 대한 반성과 겸허
시의 중반부에서 화자는 뜨거웠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현재의 조락을 필연적인 결과로 받아들입니다.
"몽정을 일삼다 님을 만난 오뉴월, / 뼈까지 활활 태운 칠팔월에 / 너무도 겸허할 줄 몰랐소"
'오뉴월'과 '칠팔월'은 생명력이 정점에 달했던 화자의 청춘이자 전성기입니다. '몽정'과 '뼈까지 활활 태운'이라는 관능적이고 강렬한 시어를 통해 삶을 뜨겁게 불태웠던 순간을 극대화합니다. 하지만 화자는 그때의 풍요로움에 취해 '겸허할 줄 몰랐다'고 고백합니다. 현재의 쓸쓸함과 찬바람은 과거의 오만함이나 불꽃 같았던 열정에 대한 대가이자, 비로소 도달하게 된 존재론적 자각의 시간입니다.
3. '고엽'으로의 명명과 고독의 내면화
후반부에 이르러 화자는 절망에 머무는 대신,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초연한 태도로 전환합니다.
"깊은 우물색 허공은 싫소 / 어디 쪽빛 하늘 없소?“
'우물색 허공'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죽음과 소멸의 어둠이라면, '쪽빛 하늘'은 화자가 마지막까지 갈망하는 생의 푸른 생명력 혹은 영혼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시냇물에 / 내 육신을 맡기오“
전반부에서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다며 원망했던 시냇물을, 후반부에서는 "따지고 보면 좋은 녀석"이라며 화해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그 차가운 시냇물에 몸을 맡깁니다. 이는 흐르는 시간과 소멸의 순리에 자신을 온전히 던지는 행위입니다.
"앞으로 날 고엽이라 불러도 좋소 / 난 그래도 고독을 좀 아오“
이 시의 가장 빛나는 결구입니다. 화자는 스스로를 '고엽'이라 명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껍데기만 남은 쓸쓸한 존재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고독을 좀 아는' 주체적이고 성숙한 존재로 거듭납니다. 고독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로서 포용하는 단단한 내면이 돋보입니다.
♣ 총 평
한기홍의 「고엽」은 자연의 순환(춘하추동)을 인간의 생로병사와 정신적 성숙 과정에 완벽하게 중첩시킨 작품입니다. 뜨겁게 타올랐던 '칠팔월'이 있었기에 찬바람 치는 '고엽'의 계절이 더욱 쓸쓸하게 다가오지만, 시인은 이를 영탄조의 슬픔으로만 끝맺지 않습니다.
자신의 육신을 시냇물에 맡기고 스스로를 고엽이라 부르며 고독을 긍정하는 마지막 태도는, 소멸 앞에서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품위와 겸허함이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보여줍니다. 홑껍데기 심상에 찬바람이 스며드는 이들에게 쓸쓸하면서도 기묘한 위로를 건네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