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빗속에 생각하며 글 짓고
성도를 한번 다녀온 뒤 그리움은 깊어만 가고
뜰의 꽃은 빗방울에 뒤섞여 진눈깨비처럼 날리네
처마 밑 까치 소리에 꿈을 깼는데
꿈속에 돌아오던 길이 실낱같이 생생하네
雨中書懷
一別成都惱遠思 庭花如雨滴霏霏
簷鵲數聲慵罷夢 夢中歸路細如絲
*우중서회
일별성도뇌원사 정화여우적비비
첨작수성용파몽 몽중귀로세이사
▶ 이른 봄
실비에 젖은 안개가 저녁나절 개이고
참새들은 좋아서 처마를 애워싸고 지저귀네
만물이 숨 쉬고 초목은 무성한데
물 퍼붓고 싶은 심정이 강산을 새로 씻었네
무심히 바느질을 하다가 보니 성가시어
맥없이 있다가 문득 책장을 이리저리 살피네
봄 시름은 날마다 게으름과 함께 쌓이는데
꽃바람이 성에 가득 불어오면 어이하나
早春(조춘)
細雨和煙向晩晴(세우화연향만청) 喜晴鳥雀繞簷鳴(희청조작요첨명)
潛滋卉木絪縕氣(잠자훼목인온기) 新刷江山灑落情(신쇄강산쇄락정)
針線無心從散亂(침선무심종산란) 床書慢閱任縱橫(상서만열임종횡)
閒愁日與春慵積(한수일여춘용적) 將奈風花취만城(장내풍화취만성)
김부용
(雲楚 金芙蓉, 1812년 이후 ~ 1860년 이전)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부용(芙蓉)이고 호를 운초(雲楚)라고 스스로 지었다. 가난한 유학자 집안 선비의 무남독녀로 평
북 성천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서 네 살 때, 글을 배웠고 열 살이 되기 전에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을 읽었다고 한다. 열살
에 아버지를 그 다음 해에 어머니를 잃었다. 부모를 일찍 여윈 환경 탓에 퇴기의 수양딸이 되어 열두 살 때,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리고 기녀가 되었다. 용모와 재능을 타고났고 16세에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여 성천 지방에서 한양에까지 이름을
알렸다. 송도 기녀 황진이, 부안 기녀 매창과 함께 삼대시기로 일컬어진다.
운초의 인생에 있어 획기적인 일이 그녀 나이 19세에 일어난다. 성천에 신임 사또가 부임해 오는데, 그는 연천 김이양의
제자이다. 운초는 성천으로 부임해 온 연천의 제자인 성천부사 유관준을 좇아 평양에 도착해 77세나 되는 평양감사 연천
(淵泉) 김이양 대감을 만나게 된다. 연천은 운초를 기녀로서 보다는 손녀를 대하듯이 또 풍류를 즐기는 시인으로 자상하게
맞이해 주었다. 그런 성품에 반한 운초는 나중에 그의 소실이 되었다. 일찍 부모를 잃고 기생이 되어 숱한 날들을 성천에
부임해오는 사또들의 연회장과 이런 저런 모임에 불려갔다. 수려한 용모에다가 가무와 시로 장단을 맞추고 있는 운초에게
반한 벼슬아치들의 숱한 구애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운초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연천과의 만남이 있기 전에 운초
는 줄곧 연천 어른의 명성을 자세히 들었는데 풍채가 뛰어나고 지체가 높은 분인 줄 잘 알고 있었다. 연천은 노령의 나이에
평양감사로 내려왔는데 이미 정2품 이상의 관직을 두루 거친 후다. 운초와 연천과의 나이 차이가 무려 59세나 되는데 운
초는 나이를 불문하고 존경하며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연천은 맏손자가 순조 임금의 명온공주에게 장가를 가서 곧 임금
의 부마가 되었다.
80세가 넘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 연천에게 순조는 '봉조하'란 벼슬을 내렸는데. '봉조하'는 물러난 뒤에도 국가의 행사
에 원로로 참여하고 평생 녹봉을 받는 벼슬이다.
연천은 운초를 한양으로 데리고 온 후, 별장 같은 '녹천정'에 머물게 했다. 이곳에서 봉조대감은 풍류객이 되어 운초를 비
롯해 시벗들과 유유자적하며 말년을 보내게 된다. 대감이 91세에 타계했는데 이 때 운초의 나이는 33세였다. 운초는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정확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데 50세 전으로 알려지고 있다. 운초는 죽기 전에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대감마님의 묘소 인근 산기슭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죽어서 봉조하대감의 무덤 근처인 충청도 천안 광덕산 언덕에
묻혔다. 세월이 흐른 지금, 봉조하 대감을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도 기생 운초 김부용을 기억하여 작은 무덤을 찾아가
기리고 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만 간다.
옛적 문학의 힘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세히 전해주고 있다.
/ 박연옥 옮김 그림『조선의 여류시인 미인도美人圖』에서
*퇴기[退妓] :전에 기생을 하다가 그만둔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