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한비문학 작가협회 감사> 한하운(본명 태영泰英) 1. 생애와 작품집 1920년 3월 30일 함경남도 함주 출생 1975년 2월 28일 사망(경기도 김포군 장릉 공원묘지 안장) 함흥 제일 공립보통학교, 이리 농림학교, 동경 성혜 고등학교, 베이징대학교 졸업, 전남 고흥군 도양면 소록도에 시비 건립 시집 《한하운 시초》, 《보리피리》, 《한하운 시 전집》등 대표 시 <보리피리>, <파랑새>, <가도 가도 황톳길 >, <여인> 등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등 어려서부터 객지를 떠돌았던 시인 한하운, 그는 인정만 있다면 어디든지 그의 고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인심은 야박했고, 고향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나는 옛날 성하던 계절에 서 있고 / 지금의 나는 여기 있는 것 같지도 않다」고 절규하면서 육신의 고향으로 상념의 나래를 펼치고는 했던 것이다. 자서전이라 할 <나의 슬픈 반생기>에 따르면 한하운은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태영(泰英)이었다. 부계(父系)의 가문을 살펴보면「대대로 선비 집안으로 과거를 3대나 계속하여 급제한 집안이며 함흥 지방에서는 떵떵 울리고 권세 좋게 살던 집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장남을 공부시키려고 그가 여섯 살 나던 25년 함흥으로 이사하여 나갔다. 이듬해 그는 함흥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예능 계통에 뛰어난 재주를 보이며 죽 우등생으로 다녔다. 그러나 그가 5학년이 되던 31년 봄, 몸이 무겁게 부어서 아버지를 따라 한 달 남짓 온천과 삼방(三防) 약수터를 다니며 요양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나병의 시초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는 32년 봄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의 의사를 좇아 이른바「내선공학(內鮮共學)」이라는 이리(裡里) 농림학교에 들어가 수의축산(獸醫畜産)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리농림학교는 입학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듯 함경남도청 관내 19명의 응시자 중 유독 그만이 합격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학교에서 1학년 때부터 장거리 육상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상급학교 수험 공부를 하라는 꾸지람 때문에 3학년 겨울부터 운동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발자크, 앙드레 지드, 헤르만 gpt세 등의 번역 소설을 탐독하고 시의 습작을 하기 시작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그가 나중에 월남할 때까지 그의 병고의 아픔을 같이 나누고 병간호를 했다는 R이라는 고향의 여학생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5학년 졸업반이던 36년 봄이었다. 몸 전체의 말초부 양역(陽域)에 콩알 같은 결절(結節)이 생기고 궤양이 끝없이 퍼져 나가자 여기저기 진찰을 받다가 성대(城大)(현 서울대) 부속병원으로 갔다. 「기타무라(北村淸一) 박사는 신경을 만지고 바늘로 피부를 찌르곤 하였다. 진찰이 끝나고 나서 조용한 방에 불러놓고 마치 재판장이 죄수에게 말하듯이 문둥병이라 하면서 소록도(小鹿島)에 가서 치료하면 낫는다고 하면서 걱정할 것 없다고 하였다. 뇌성벽력 같은 이 선고에 앞이 캄캄하였다.」 - <나의 슬픈 반생기>에서 - 37년 이리 농림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그의 병은 다소 낫는 듯했다. 그래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모든 걸 포기하고 귀국했다. 열심히 치료를 하면서 병은 또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중국 북경으로 가서 북경대학 농학원 축목학계에 입학했고, <조선 축산사(朝鮮畜産史)>라는 논문을 제출하고 졸업했다. 그것이 1943년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환부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귀국하여 일단 고향으로 간 그에게 아버지는 기분 전환을 하라고 함경남도청 축산과에 그를 취직시켰으나 집에서 다니기가 싫었던 그는 도내 장진군 개마고원으로 들어갔다. 황무지를 개척한다는 집념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은 추위에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는 다시 남쪽 지방을 지원하여 경기도 용인군으로 전근해 갔다. 1945년 봄이었다. 결절이 콩알 같이 스멀스멀 몸의 양역에 울뚝불뚝 나타나는 것이었다. 검은 눈썹은 자고 나면 자꾸만 없어졌다. 코가 막혀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말은 코 먹은 소리였다. 거울을 쳐다보니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문둥이 그 화상이었다.
직장의 상사마저 그가 나환자라는 것을 알아채었다. 그는 다시 함흥 중앙동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때부터 두문불출,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낮에는 이목을 피해 밤을 이용했다. 전신에 고름이 흐르고 방안에는 악취가 풍겼다. 1948년 그 무렵부터 그가 월남할 때까지 4년간이 가장 처절한 투병 기간이었다. 그는 죽음을 통해서 자유를 구가하려고 했다. 이름마저 본명을 버리고 하운(何雲)이라고 고쳤다. 한하운은, 문학 인생을 회고하면서「시가 나에게는 제2의 생명이다. 아니 전 생명을 지배하고 있다. 소망을 잃어버린 어두운 나에게 스스로 백광(白光) 같은 빛을 마련해 주고, 용기와 의지의 청조(晴條)길로 나를 인도한다.」라고 했다. 시 작업을 그의 모든 것과 일치시킴으로써 절망과 고독을 딛고 나병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보리피리>와 같은 한스러움이 넘쳐 차라리 아름다운 한국적 가락을 읊어내는 위대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1940년대 말 방랑 끝에 문득 문단의 국외자(局外者)로 등장했다. 그러나「유리(遊離)의 가두(街頭)」에서 하루아침에 시인이 되었던 그의 생애는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에 대한 의심을 받았고 나(癩) 시인이라는 선입관 때문에 홀대를 감수하기도 했다. 한국시의 전통적이고 서정적인 운율 속에 천형(天刑)의 절망과 슬픔을 담았던 시인 한하운, 그는 1950년대 전쟁 후의 황폐하고 암울한 시대 분위기와 한(恨)이 면면이 응결된 시가 문맥의 일치를 보여, 1960년대까지 폭넓은 독자층을 형성했다. 1949년의 첫 시집 <한하운시초>, 55년에 나온 <보리피리> 등에 수록된 그의 시들은 소월의 시에 근접한 가락을 지니고 있으며, 절제된 고통의 감정이 소박한 민요 형태로 전이되고 있다. 2. 한하운의 대표작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릴 때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닐리리 <감상> 이 시는 반복 구조로 되어 있다. 4연 모두 ‘보리피리 불며 피-ㄹ닐니리’로 되어 반복의 율조를 자아내며, 보리피리의 소리시늉말이 또 운율감을 준다. 시의 의미소(意味素)는 각 연의 2, 3행인데, 1연(현재-과거), 2연(과거), 3연(과거), 4연(현재)의 구조를 가지면서 현실에서 과거로 돌아갔다 되돌아오는 구조를 가진다. 과거는 긍정적 삶의 모습이요, 현재는 부정적 삶의 모습이다. 현실에 지친 화자가 그리워하는 고향은 따뜻한 인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곳이기도 하다. 봄 언덕 그리운 고향을 향하면 꽃 피던 청산이 그리워진다. 그런데 화자는 그런 청산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이다. 화자는 또한 인환(인간 세상)에서도 이탈된 존재이다. 사회 공동체에서 소외되어 있기에 그는 사무치도록 인간사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는 청산에서도 인환에서도 버림받은 존재로 방랑의 길을 걸었다. 이 ‘방랑의 기산하’를 눈물로 넘었으며 눈물의 언덕을 넘으며 ‘필-ㄹ닐니리’ 보리피리를 부는 것이다. 천형(天刑)의 인간으로서 가장 고고(孤高)한 심혼(心魂)과 더불어 강렬한 육혼(肉魂)을 함께 불사르며 시를 쓴 것이다.
시인 한하운이 천형의 문둥병을 앓다 죽어 간 사람임을 모른다고 해도 이 시의 문면에 드러나는 한(恨)의 소리는 독자들에게 소외받는 인간의 고독과 상처를 공감하게 한다.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감상> 이 작품은 구조와 내용이 단순하며, 초점이 명확하다. ‘나’는 죽은 뒤에 왜 파랑새가 되리라고 하는가? 그 자유로운 삶이 부럽기 때문이다. 이 점으로 보아 '나'는 지금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괴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작품은 아마도 한하운이 나환자 수용소에 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인 듯하다. 그렇기에 그는 푸른 하늘과 들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삶을 갈망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는 '파랑새'가 되겠다고 하며, 더욱이 '푸른 노래 / 푸른 울음'을 울겠다고 하는가? 이 점은 푸른빛의 색채 감각으로 이해해야 한다. 푸른빛이란 어딘가 슬픔이 깃든 빛깔이다. -어떤 심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우울한 사람들이 푸른빛을 좋아하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따라서 '푸른 노래 / 푸른 울음'이란 그가 지닌 슬픔, 한이 서린 노래와 울음이다. 현재의 삶이 너무도 부자유스럽기에 그는 이 삶이 다하고 나서 새가 되고 싶어 하지만, 지금의 슬픔과 한이 너무도 깊기에 새가 되어서도 '푸른 노래, 푸른 울음'을 울겠다고 하는 것이다. 단순한 구도와 적은 어휘를 반복적으로 써서 뼈저린 슬픔을 극히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절실하게 노래한 작품이다.
여인 눈여겨 낯익은 듯한 여인 하나 어깨 널찍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가를 거느리고 내 앞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스무 살 남짓한 저 여인은 뒷모습 걸음걸이 하며 몸맵시 틀림없는 저... 누구라 할까... 어쩌면 엷은 혀끝에 맴도는 이름이요! 어쩌면 아슬아슬 눈 감길 듯 떠오르는 추억이요! 옛날엔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 보지? 아니 아니 정말로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 보지? <감상> 방랑길에서 무심히 지나가는 한 여인을 우연히 만나, 잊었던 지난날을 회상하게 된다. 억겁을 두고 나눠도 남을 업고(業苦)를 짊어진 천형의 수인(囚人)이기에 추억 속의 여인을 ‘옛날에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 보지’ 하고 원망하다가도 이내 ‘아니 아니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 보지’ 하고 옛 여인의 행복을 축복하는 인정이 되살아나고 있다. 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찌까다비(地下足袋)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 리, 먼 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 <감상> 젊은 시절 나병과 투병한 시기를 대변하는 작품으로 '소록도 가는 길'이란 부제가 붙은 시 <전라도 길>이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라는 표현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극복의 자세가 엿보인다. 나병이 불치병이며 그 증상이 (특히 얼굴을)보기 흉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더 심해진다는 특성이 있다. 동 ∙ 서양을 막론하고 나병환자는 가장 저주받은 사람으로 취급되고, 또 정상인들과 어울려 살 수 없는 존재로 낙인찍혀 병자들끼리 모여 살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귀천이 따로 없다지만, 당시 지식인이었을 시인이, 자신이 그 나병환자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기는 너무 가혹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프고 병들었을 때 생명의 소중함이 절실해지는 법. 그 목숨을 끊을 수도 없고, 슬프다는 말로는 부족할 시인의 이런 한이 시편마다 절절이 표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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