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후 재개된 일본과의 교역에서 일본이 조선의 통신사들에게 처음으로
요구했던 물품도 찻사발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조선 사기장들에 의해 시작된 일본 자기의 출발이 찻그릇이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도자기가 식기로 사용된 시기는 17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일본 내에서 자기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보급이 확산되면서 백자에 이어
청화백자와 채색 자기까지 다양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오늘날 일본이 도자기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대는 물론 자신들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조선의 분청자 제작 기술을 전해준 장인들의 힘이 컸습니다,
도자기는 일본의 근대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도자기의 종주국이던 중국의 명 청 교체기에 해금령 때문에 더 이상 유럽으로
자기를 수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부적 안정을 꾀하고 청조에 반대하는 남부의 한족 해양 세력의 통제 등을
위해 바다를 통한 교류를 봉쇄한 것입니다,
이때 중국 도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새로운 공급처로 등장한 나라가 일본입니다.
일찍이 일본에 진출했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이 이로에 자기를 유럽에
소개하였습니다,
일본은 나가사키에 무역 창구를 만들어 네덜란드와 광범위한 교역을 시작했고
유럽에 일본 도자기를 충분히 공급하기 위해 도자기 가마들을 우후죽순 세웠습니다,
이미 포화상태였던 자국의 시장만으로 존립이 어려웠던 일본의 도자기
장인들에게 유럽이라는 새로운 공급처가 개척된 것입니다,
유럽에 현존하는 100만 점이 넘는 일본 자기의 수량은 일본이 유럽과의
무역을 통해 10여 년간 누린 막대한 부를 짐작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 메이지유신의 성공도 유럽으로의 자기 수출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일본인들이 숭상하는 찻 그릇들 중 단연 으뜸은 조선의 분청자와
백자였습니다,
도쿠가와 막부에서 100여 년간 전해온 조선의 백자다완이 일본
다이도쿠지에 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 역시 일곱 겹의 포장지로 켜켜이 싸인 이 찻사발을 보
고 무척 감동을 받은 모양입니다,
무네요시는 지극히 소박한 그릇도 부여된 의미에 따라 큰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다이도쿠지 고호안에 소장된 이도(井戶) 기자에몬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국보가 된 작품입니다,
훌륭한 작품을 뒤로하고 조선 16세기의 찻사발에는 빙열이 나타나며
물레 자국이 강하게 들어나 있습니다,
유약은 원래 회청색이지만 500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색이 누렇게
변하였습니다,
기자에몬 다완을 보고 만지기만 해도 엄청난 행운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현재 진해 웅천의 찻사발로 알려져 있는 이도 다완의 원형에
해당하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1570년대 일본 문헌에 따르면 우리나라 경남 지방에서 제작된 기자에몬을
일본으로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기자에몬에서 보이는 물레의 힘찬 자국을 오늘날의 장인들은 만들지 못합니다,
이도 계통의 찻사발은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독특한
맛을 자아냅니다,
“와비사비”를 잘 표현한 조선의 다완에 대한 일본인들의 지나친 욕구가
임진왜란 발단의 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도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자류롭다“은 의미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서 경제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부단히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마음의 행복과 평안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무엇엔가 속해 있고 그 사실 때문에 가끔은 스스로를
자유롭지 못한 존재라 여깁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현대 예술이 지향하는 목표 중 주요한 하나가 자유로움입니다,
우리가 분청자에서 발견하는 예술성은 형편에 굴하지 않는 자유로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칠거나 투박하지만 나름의 맛이 느껴지는 분청자의 자유로운 멋에 감명을
받는 이유는 분청자의 세계를 닮고 싶은 우리 내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