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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81)

작성자하심|작성시간26.06.06|조회수15 목록 댓글 0

조선 왕조의 개창자는 이성계였지만 그 배경에는 정도전 조준 등의 선진

사대부들이 있었습니다,

조선 왕조의 총체적 설계도를 그린 정도전은 지나친 개혁 성향 때문에

이방원에게 참살되었지만 그는 조선의 기초를 닦고 수초 한양 틀을 잡았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조선의 정치 경제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숭유배불의 정책도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신진사대부들에 의해서 주창되었습니다.

이들은 조선 사회를 성리학적 이상국가로 만들고자 청렴결백한 군자 상

을 제시하였습니다,

따라서 황희와 같은 관리들이 청백리의 표본으로 추앙받는 등 청빈한 군자 상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 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왕실이라 하여 화려함을 추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왕실 또한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을 추구하였습니다,

 

주자학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죽을 이후의 삶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공자는 ”삶도 잘 모르는데 죽음까지 어찌 알겠느냐“하여 사후 세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옳은 삶인가“라는 화두야말로 성리학자들의

가장 큰 주안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으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 속에 성장하여 유학의 가르침을 통해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합격 후 벼슬길에 올라 입신하여 백성과 가정을 잘

다스리며 인정을 누리다가 자식들 곁에서 편안하게 세상을 마감하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극히 현실적이었던 바람들과 이것을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생활

윤리를 유학의 이념에 철저히 따랐습니다,

따라서 청렴결백한 군자를 하나의 이상화된 인간상으로 삼았습니다,

 

한편 목면의 재배로 무명옷이 실생활에 널리 보급되었던 것도 사대부들이

추구하던 이상에 맞는 의복이었기 때문입니다,

화려함보다는 실용성을 강조하는 사대부들의 가치관에 들어맞는 것으로

무명옷의 순백 색감은 사람들에게 청렴결백의 상징으로 다가왔습니다,

 

조선 초기는 고려 후기 상감청자의 여운을 이은 분청자가 널리 제작되던

시기였습니다,

분청자에서 백자로의 전환은 조선 성리학의 확산과 시기적으로 일치합니다,

태조부터 태종 대만 하더라도 중국과의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가

세종 연간인 1425년경에서야 양국의 국교가 새롭게 시작됩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 7년에 명의 홍희제가 ”조선에서 새로이 만든 백자 반상기

10탁 분을 바치라“하였고 이에 세종은 광주에서 만든 백자 250점 정도를

명나라에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1420년대 이미 백자가 생산되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뒤이어 중국에서 양질의 청화백자가 생사되던 선덕제 때인 1428년과

1430년에 조선은 뛰어난 품질의 백자와 청화백자를 명나라로부터 선물받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선덕제의 선물들 중에 청화 안료로 용이 그려진 큰

술항아리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건너온 백자들은 임금뿐만 아니라 당시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한

지배층 에게도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분청자에 익숙한 조선인은 청화백자를 보고 무척 놀랐을 것입니다,

명으로부터 전래된 청화백자를 계기로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 문화에

관심을 갖고 동경하게 되었는 지도 모릅니다,

 

14세기 후반 동아시아에서는 오랜 이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한시 한족

국가인 명나라가 세워지고 고려 역시 원의 간섭에서 독립하여 조선 왕실을 세

우고 문물을 정비해 나갔습니다,

조선보다 앞서 건국된 명은 나라의 기틀을 빠르게 잡아나갔고 조선은 사회

전반에 명의 통치 체계를 도입하였습니다,

이즈음에 중국의 백자와 청화백자도 조선에 유입되었습니다,

한편 세종 연간인 1430년대 류구(오키나와)에서 중국의 자기들을 조선에

선물로 보내와 조선 왕실을 또 한 번 자극합니다,

하얗고 눈부시게 빛나는 백자에 푸른색 안료로 아름답게 그려진 매화와 대나무

그린들이 선비의 고결함을 상징하듯이 느껴졌을 테지요. 청화 안료의 시각적

효과는 분청자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사시 이 시기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화백자는 현재에도 높은 가치를 인정 받으며

경매시장에서도 비싼 값에 팔리고 있습니다,

 

청화백자에 매료된 조선은 스스로 청화백자를 만들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에 주로 생산되던 분청자에 코발트 그림을 그려본들 시커멓게

발색되어 중국산 백자를 도저히 흉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청화백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경질 백자를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백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청화백자를 완성하려는 과정 속에서 만들저진 양질의 백자가 왕실의 도가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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