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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82)

작성자하심|작성시간26.06.06|조회수18 목록 댓글 0

세종 연간인 15세기 전반 조선의 문화는 집현전의 학자들이 주도하여

이끌어 갔습니다,

이들은 중국의 고대사를 연구하였고 특히 공자와 맹자가 살던 춘추

전국새대의 사회제도 뿐만 아니라 사용하던 그릇의 기형까지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은 중국의 문화에 심취해 그 본질에 가까이 접근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중국 고대에 사용하던 그릇에 대한 연구 역시 중국 문화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의 일부였습니다,

당시 사대부들의 중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지극해지면서 중국 백자에

대한 선망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1440년대 들어 경기도 광주 퇴촌면 우산리 일대에서 비로소 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경상도 고령과 상주에도 백자 가마가 설치되었고 전라도

남원에서도 백자를 만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문신이자 장군으로 이름난 김종서(1390~1453) 1445년 도순사 관직에

재임하면서 고령 지역을 순시한 내용이 김종직의 “점필재집” “이존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령 현감이 베푼 주안상에서 본 고령산 백자가 매우 아름다웠다는 김종서의

이야기를 통해서 고령 일대에서 질 좋은 백자가 제작되었고 당시의

백자가 지배층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문헌을 보면 조선 초 남원에 현감으로 내려간 관리가 그곳 백자

원료의 가공 방식을 개선하여 더욱 질 높은 백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등장합니다,

조선 초 문헌 기록을 종합하면 경기도 광주 경상도 고령과 상주 그리고

전라도 남원 등 네 곳에서 백자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세종 때의 어기로 정성들여 제작한 백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아직 본격적인 생산 단계 이전인 1440년대의 백자는 상품의

왕실용 백자였을 것이고 그 제작지는 앞어 언급한 네 지역이었습니다,

지표 조사 등을 통해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광주와 고령 남원에서는

조선 초기 백자 가마터의 흔적이 발견 되었지만 상주에서만은 아직

가마터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15세기에는 왕실을 위한 백자 제기가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 제례를 중요하게 여겨 제기 사용이 잦아지자

많은 양의 제기가 필요하였습니다,

백자로 제기를 만들면 비교적 제작이 수월하여 제기의 수요를 감당할

수 있고 관리가 까다롭지 않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던 동을 대신하는 이점도 고려하여

백자 제기가 많이 많들어졌습니다,

1447년 세종이 문소전 휘덕전에서 사용되던 제기를 백자로 바꾸라고

지시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440년대 국내의 백토 생산지를 중심으로 차츰 백자가 만들어지는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아주 소량 생산되는 은을 조공물로 무리하게 요구하는

중국의 팽창을 경계한 명나라의 억지스런 은 조공 요구에 조선에서는

품목 변경을 요구 하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조선 개국 초기 왕실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식기는 고려의 경우처럼

은기였습니다,

은기는 독극물을 대하면 변색 되는 특질이 있기 때문에 조선 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왕실용 식기의 대부분을 은으로 만들어 사용하면서 조선에 은이 없으니

조공 품목을 변경해달라고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이 또한 은기를 대요할 수 있는 그릇이 절실한 이유였습니다,

은기의 빈자리를 담당한 것이 바로 백자 였습니다,

세종 임금이 백자를 왕실의 그릇으로 삼은 까닭에는 명과의 정치적

관계도 내포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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