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백자의 틀이 성립되다
1464년 세조 연간 강진 현에서 청철을 채취해 바쳤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있으며 예종 원년인 1469년에는 강진 현의 회회청으로 시험 삼아 백자에 그림을
그려보니 그중 일부가 청화백자와 발색이 흡사하여 이를 바친 자들에게 관직이나
포 오십 필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1470년대 성종 연간이 되면서 토청에 관련된 기록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시기에 명나라와의 관계가 호전되어 청료의 수급이 원할해 진데다가 더욱이
명 성화 연간 절강성에서 중국산 청화 안료를 발견하여 청화 안료의 공급이 보다
확대되었습니다.
소선은 고가의 청화백자를 중국에서 들여오기보다 당시 공급량이 늘어났던 청화
안료를 직접 수입하여 광주의 분원에서 자체 생산하려 했습니다,
1469년 이후 토청에 국내 채취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 수입산 청화안료를
사용했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코발트 매장량이 매우 적다는 사실이 훗날 밝혀졌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벌인 대규모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지질은 코발트가 거의
생산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토청에 대한 기록이 사라지는 것은 우리나라 땅에 청화 안료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성종 연간인 1470~1480년대가 청화백자의 성립기라 할 수 있습니다,
발색이 뛰어난 상품의 코발트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 백자에 그림을 그릴 때는
한양의 도화서 화원이 분원까지 내려와 번조관의 감독 아래 그림을 그릴 정도였습니다,
1486년 “동국여지승람”“광주목조”에 화원이 백자의 그림을 그렸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증명하는 유물이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는 백자청화
“홍치이년” 명송죽문항아리입니다.
15세기 후반 화원이 그렸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 작품은 아름다운 필치가 돋보이는
조선시대 문인화를 백자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원래 전라남도 구례의 화엄사 각황전 불단에 꽃을 꽂는 항아리로
전해졌습니다,
그러던 중 1960년대 도난으로 안타깝게 파손되었고 이후 동국대하교박물관에서
보관해 왔습니다,
이 항아리를 통해 당시 분원에서 마들어지던 청화백자의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최상품의 청화 안료는 관청 소용의 청화백자에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청화백자는 깊고 짙푸른 청화 발색이 나는 최상품과 푸른 발색이 덜하고
균일하지 못한 차등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청화백자의 수가 많지않은 것은 청화 안료의 수입이 원활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비싼 수입 품목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15~16세기의 경우 청화백자는 왕실용 자기를
제작하던 광주시 우산리, 도마리, 번천리, 가마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한국 도자사를 배우는 중에 자주 등장하는 도마리가 바로 16세기 초반
왕실을 위한 청화백자를 제작하던 가마였습니다,
아래쪽 유물은 중국산 청화백자로 어깨에 있는 대명선덕연제(大明宣德年製)라는
명문으로 보아 15세기 전반에 제작된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 아래로 연판 무늬가 베풀어졌고 중앙에 연화당초무늬를 가득 채워넣었습니다,
이러한 양식의 호가 세종 연간 여러 점 조선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조선 왕실은 청화백자를 보고 매우 자극을 받았습니다,
백자의 색은 눈의 빛깔처럼 희고 멀리 아라비아에서 수입된 청료로 그려진
문양은 가을 하늘과같이 깊은 푸른색을 띠었습니다,
이 시기 청화 안료는 철분이 포함되어 있어 발색이 부분적으로 짙거나 여리게
표현되어 마치 종이 위에 먹으로 그림을 그린 듯 문양이 번지는 효과를 나타냅니다,
이는 당시 중국 백자에 그려진 수입 청료의 특징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대부들은 이러한 청화백자를 선망하여 중국 청화백자의 형태와
구도를 그대로 우리의 청화백자에 도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