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1592년과 1597년에 닥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조선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전란을 겪은 혼란과 시련으로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이 요구되었으나 이미 보수화된 성리학은 아무것도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섬겨왔던 민주족과 여진족이 17세기에
중국을 통합하여 청나라를 세우면서 조선의 세계관은 급격하게 변화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인가 무릎을 꿇고 청에게
항복하는 굴욕을 조선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유학의 본령으로서 자존심이 무너지고 성리학적 이념을 추구해 온 조선의
사대부들은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놓이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당장 오랑캐 나라인 청을 섬겨야 하는 처지에 놓인 조선의 방황과
고민은 깊어만 갑니다,
병자호란 이후 효종 때는 “청을 없애고 명을 부활시켜 공맹의 세상을 되찾자”는
생각으로 임경업 장군을 내세운 북벌론이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강성한 청의 위력 앞에서 북벌론의 현실성은 의심받았고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적절한 사상적 대안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우암 송시열을 영수로 한 서인 사대부층은 중국에서의 성리학은 죽었다고 판단하고
조선에서 성리학의 정통을 유지해 가고자 하였습니다,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실현 시킬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인 조선에서 보다 성리학적
사상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한 영향으로 조선 사대부는 점차 보수적인 성향을 띠며 청의 오랑캐 문화를
경시하고 외교 단절까지 선언하였습니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요?
“징비록” “임진록” 등과 같은 문헌을 바탕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조선에서는
잔흑하고 문화적으로 열등한 일본과 상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국책의 논의 끝에 일본을 교화해 가자는 의견에 따라 단계적인 허용의
차원에서 일본에 조선통신사를 파견합니다,
이는 통신사를 통해서 일본 지도층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알아내어 미리 경계하자는
의도가 다분했습니다,
이렇듯 여러 자지 전황으로 미루어볼 때 조선이 스스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가 강조되면서 우리 것에 대한 인식이 높아집니다,
오늘날 한국적이라고 일컫는 많은 요소 들의 뿌리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인데
대표적인 예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중국의 산수를 모델로 성리학적인 이상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던 당시
화풍과는 달리 조선의 산천을 누비면서 조선 사람과 자연을 화폭에 담으려 한
노력이 드러나 있습니다,
주체적인 인식의 변화는 우리의 역사와 지리를 연구하는 저술에서도 나타납니다,
17세기 후반에 태동하여 18세기에 꽃피운 실학사상은 학문과 문화의 발전에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조선적 자의 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흥부전” “춘향전” 등의 한국 소설과 판소리 시가 등 우리의 춤과 노래를
즐기는 풍조가 유행하는 한편 풍속화와 민화 목기 그리고 도자기 부분에서
서민의 생활상이 투영되는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생활 공예의 폭이 확대된 것이지요. 이것은 자기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의
변화로 사람들이 보통 어떤 일을 계기로 철이 드는 것처럼 조선은 전쟁을 겪으면서
점차 자기 세계를 찾아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