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리 도자기의 대량 수출로 다져진 일본 근대화 초석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조선은 많은 사기장들이 일본에 납치당했습니다,
일본의 역사책 중에는 그때 조선의 도공이 자진해서 일본에 왔다고 기록
되어있기도 하지만 이는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것만큼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억지 주장입니다,
일본인들은 납치해 온 조선의 사기 장인들에게 자신들이 꿈에 그리던 찻사발을
만들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초기에는 도기와 분청자 계열의 그릇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시기에 도쿠가와 막부의 지배 체계가 자리 잡고 조선에서 유입된 성리학의
영향이 커져 가면서 조선백자에 대한 관심과 백자를 만들려는 욕구도 함께 늘어납니다,
일본에 잡혀간 조선 사기장 중에서 오늘날 도신이라 일컫는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이삼평은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는 사가현 아리타의 이즈미야마에서 고령토를 찾아냈고 이 고령토로 백자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때가 1616년으로 일본에서 자기가 최초로 만들어졌습니다,
1616년부터 일본에서는 점차 완성도 높은 백자가 곳곳에서 생산되며 일본
도자는 발전 일로에 들어섭니다.
17세기 중국은 청나라의 등장으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할 수 없게 됩니다.
중국의 자기가 유럽에 소개된 16세기 이후 중국 도자기에 대한 유럽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던 시기 청나라는 모든 대외 수출을 금지해 버립니다,
중국의 경덕진이 불타고 자기 생산이 어려워지나 유럽인들의 자기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판로 개척이 시급합니다,
이때 유럽인들을 위한 새로운 자기 생산지로 일본이 급부상합니다,
유럽으로 수출된 많은 도자기들이 규수의 아리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소위
“이마리야키” 였습니다,
이삼평의 공덕비를 세우고 그를 도신으로 추앙하는 까닭은 그가 일본의 도자사를
새롭게 쓴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백자 원료를 발견하여 자기를 만들어낸 이삼평의 공로로 일본의 도자기 문화는
일대 혁신을 꾀합니다,
만녕 도자기 수입국에서 이제는 자체적으로 자기를 생산해내는 수출국의
입장으로 전환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대륙과의 교류가 번번하던 규수 지역을 중심으로 다수의 자기
가마가 자리를 잡습니다,
일본의 자기가 발전하는 또 다른 계기는 중국 경덕진의 채색자기 제작
기법의 전래입니다,
중국은 서양과의 교류를 통해 에나멜로 자기에 무늬를 표현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청나라 황실에서 사용되는 자기의 그름은 주로 서양의 선교사들이 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