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백자는 장식무늬 소재나 기형 등에서 양식이 규격화되고 새로운 형태도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묘지합입니다,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조상의 무덤이 훼손되는 모습을 많이 보아온 조선인들은 비석이 파손되었을 경우에도 피장자의 신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행적을 담은 지석을 함께 묻었습니다,
효사상을 높이 숭상하는 조선 사회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연적과 같이 선비들의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문방구류가 18세기에 널리 제작됩니다,
천도복숭아를 모델로 만든 연적은 16세기부터 계속 만들어졌는데 삼천 년에 한 번씩 열린다. 해서 장생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9세기에 만들어지던 백자 연적은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합니다.
우아한 곡선으로 동체를 만들고 그 끝을 강조하기 위해 안료를 칠한 복숭아 연적도 보이고 해태와 맹꽁이 모양의 연적도 등장합니다,
당시 선비들은 움직임이 느린 두꺼비에게서 여유를 배우기 위해 두꺼비 모양의 연적을 늘 가까이 두곤 했습니다,
필자가 목도한 바에 따르면 고 최순우 선생도 우연히 집으로 들어온 두꺼비에게 먹이를 주고 추운 겨울에는 큰 독에 모래를 채운 보금자리까지 마련해 주며 두꺼비의 점잖았음을 여러분도 잘 아는 바일 겁니다.
이 외에도 사각형의 연적 위에 두 마리의 학을 마주 보게 배치한 모양도 눈에 띱니다,
이렇게 다양한 연적들이 국내에 약 천여 점이 남아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모두 제각각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돋보여 19세기 조선 문화의 폭넓은 다양함과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수성과 희소성 때문에 조선 후기의 연적은 현재도 매우 고가로 여겨집니다,
조선 후기에는 이처럼 문방구류를 주조로 한 도자 문화가 나름의 특징을 가지며 다양하게 발전해 갑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백자투각연환문 필통은 각은 고리를 이어 붙여 만든 우아한 필통입니다,
당시 분원에서 제작된 백자의 특징이 잘 녹아든 이 작품은 동체의 크기와 그 동체를 이루는 작은 고리의 비례가 적절한 경조 높은 작품으로 백옥을 표현해 내려 했던 백자 본연의 제작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단아함 속에서 언뜻 느껴지는 화려한 모습까지도 담아보려던 조선 선비들의 취향이 바로 19세기 문화를 만들어낸 중심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