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第二十六章 法身非相分(解)
| 전등록에 보면 저녁노을을 뜻하는 단하(丹霞)라는 멋들어진 이름을 가진 단하천연(丹霞天然)선사의 단하소불(丹霞燒佛)이라는 일화가 전해진다. 단하가 목불을 불태웠다는 뜻이다. 어느 겨울 단하천연(丹霞天然)선사가 낙양(洛陽) 혜림사(惠林寺)에서 좌선 중 추워지자 법당에 모셔져 있는 木佛을 가져다 쪼개 불을 때고 있었다. 이를 본 살림 살던 원주( 院主) 스님이 놀라 “어찌하여 목불을 태우는가?”하며 크게 꾸짖자, 단하는 막대기로 재를 헤치면서 “나는 부처를 태워 사리(舍利)를 얻고자 하오”라고 대답했다. 이에 원주가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단 말이오?”하고 비웃었다. 그러자 단하는 “사리 없는 부처라면 나무토막이지 어찌 부처이겠습니까? 나머지 두 보처불(補處佛)마저 태워 버릴까 보다” 하였다. 그 후로 원주는 눈썹이 다 빠졌다고 한다. 어찌 목불이 부처 이겠는가? 본 장에 등장하는 여래(如來)는 붓다의 10가지 명호(名號) 중의 하나이며 범어의 따타가따(tathāgata)를 번역한 것이다. 眞如涅盤을 깨닫고 그 진리로 부터 진리가 육신으로 와서 진리를 전하는 자, 중생의 無明을 밝히기 위해 진리의 빛으로 온 자를 如來라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서 익숙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렇다. 진리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어두운 세상을 밝힐 빛으로 오신 예수, 이 분을 如來로 불러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 않은가? 그 如來를 法身이라 한다. 여래가 인간과 다른 모습을 지닌다는 믿음 아래 여래의 형상을 표현한 32가지 모습과 80가지 외적 특징을 삼십이상 팔십종호(三十二相八十種好)라고 한다. 오고 감이 없는 不來不去를 말 하면서 如來라 하고 相을 여의라 하면서 三十二相을 말한다. 이러한 言說의 한계를 끝까지 타파 하려는 因明이 금강경이다. 出世間은 시간(世)과 공간(間)을 초월한 언어 넘어의 세계인데 언어 없이 그 세계를 들춰내 보일 수 없으니 世間인 俗諦의 언어를 방편으로 사용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내가 보는 이 法이 속제를 말하는지 진제를 말 하는지, 속제를 비유로 진제를 말하는지 잘 구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늘 모순 속에 헤매인다. 이 지혜면 왜 法身이 相이 아니며 여래를 三十二相으로 알 수 없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相을 보통 금강경에서 말하는 我相과 같이 개념적 相인 산냐(Sk. samjñā, Pali. saññā), 명상할 때 나타나는 心相인 니밋따(nimitta), 어떤 대상만이 가지는 독특한 相인 락샤나(laksana)로 구분해 사용하는데 여래의 三十二相은 특상인 락샤나(laksana)다. 이렇게 한자로 똑 같이 相이라 번역 했지만 원어로 보면 다르다. 어떠한 相이 되었든 우리의 의식에서 떼어내 버려야할 각자(却者)다. 보살이 되었다고 인가 되어도 아직 버리지 못한 각자(却者)가 남아 있다면 相의 찌꺼기들이 탐진치를 일으키기 때문에 이름만 보살이다. 각자(却者)하는 실질적인 住•修•斷의 과정과 방법이 티벳 전통의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에 체계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깨달음으로 가는 준비운동 부터 해탈•열반에 이르는 단계 단계의 修行方法과 내용이 체계적으로 정리 되어있다. 기독교는 뛰어난 신학체계가 있고 불교에는 뛰어난 수행체계가 있어 학문적으로 원융통섭이 되면 기독교는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구원이라는 도깨비 방망이에 머리와 팔다리가 달린 산믿음으로 장성한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 까지 달려갈 네비게이션이 마련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지난 2016년 한 개신교 신자가 경북 김천 개운사의 법당에 들어가 우상을 파괴한다고 불상을 훼손한 사건이 있었다. 불상과 우상. 기독교인이라면 한번쯤 생각해 볼 주제다. 성서에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출애굽기 20:3~4)"라고 십계명의 첫째와 둘째 계명이 기록되어 있다. 우상(偶像)을 한자로 풀어 보면 사람 인 人과 원숭이 우禺가 합쳐진 짝 우( 偶)로 원숭이가 사람을 닮은 가짜 허수아비란 말과 사람이나 물건의 형체를 본떠서 만들거나 그린 것을 뜻하는 모양 상(像)이 합쳐진 말로 사람이 神을 섬기기 위해 새기거나 그리거나 만든 형상(idol)이다. 히브리어 로는 새긴 우상을 페셀 (פֶּסֶל), 만든 우상을 마세카 (מַסֵּכָה)라 부른다. 헬라어로는 모두 영어의 ldol의 어원이 되는 이돌론(εἴδωλον)이라고 부른다. 성서에서 말하는 우상은 모두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주체가 섬기는 주체 밖의 객체로서 표현된다. 이렇게 성서의 우상이 나의 밖에 있다면 불교는 섬기는 神이 없기 때문에 어떤 모양으로 든지 이미 인식되어 형성된 相(산냐)이다. 김천 개운사의 불상을 훼손한 사건도 불자들이 신으로 섬기는 불상이 아니라 진여여래의 법으로 보기 때문에 때로는 쪼개서 땔감으로 쓸 수도있어 우상이 아니기에 무지에서 온 소치이다. 손원영 목사는 훼불사건을 사과하고 불성을 복원할 보상금을 모금하려다 재직 중인 신학대학에서 해직 당한 얼척 없는 일을 당하기도 했다. 예수께서도 예수의 겉모습인 색신만을 본 사람들은 고향에서 배척했으며 정치적 메시야로 여겨 예수의 길에서 진리에서 생명에서 멀어졌다. 예수를 믿는 자들이 또 다른 예수 우상을 섬기고 없이계신 하나님의 像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들이 종교간의 이해와 평화를 추구하던 손목사를 해직한 것이다. 해직한 자들이 섬기는 종교권력과 교리라는 우상부터 깨 부술 일이다. 기독인인 우리의 내면 깊숙히 자리잡고 휘두르며 굴복 시키고 섬기게 하는 이 시대의 우상은 무엇일까? 바알도 아니고 아세라도 아닌 돈 바로 맘몬이 아닐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일 모양으로 나를 보려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능히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기독교인도 불자들도 모두 相(산냐)를 내면화 된 우상으로 가지고 있다. 이 우상을 타파하지 않고는 이 장애로 텅 비었으나 꽉찬 자리인 없이계신 아버지께 다가 가고 함께할 수 없으며 법신인 여래를 볼 수 없다. 우리가 어떻게 어디에 마음을 머물게 하며(無住), 어떻게 기도와 말씀으로 삶을 닦고(修行), 어떻게 우상인 相을 여읠 것(斷)인지 깨달아 없이계신 아버지의 나라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오신 진리의 빛 그리스도 안의 평안과 자유 그리고 생명을 누리길 소원한다. |
댓글
씨알
23.02.14 09:01
첫댓글 주신 말씀으로 하여금 26장 법신비상분의 뜻을 헤아려 봅니다.
"김천 개운사의 불상을 훼손한 사건도 불자들이 신으로 섬기는 불상이 아니라 진여여래의 법으로 보기 때문에 때로는 쪼개서 땔감으로 쓸 수도있어 우상이 아니기에 무지에서 온 소치이다. 손원영 목사는 훼불사건을 사과하고 불성을 복원할 보상금을 모금하려다 재직 중인 신학대학에서 해직 당한 얼척 없는 일을 당하기도 했다. 예수께서도 예수의 겉모습인 색신만을 본 사람들은 고향에서 배척했으며 정치적 메시야로 여겨 예수의 길에서 진리에서 생명에서 멀어졌다. 예수를 믿는 자들이 또 다른 예수 우상을 섬기고 없이계신 하나님의 像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들이 종교간의 이해와 평화를 추구하던 손목사를 해직한 것이다."
우리 진달래에 천사로 오신 손목사님과 아홉사제를 기억합니다.
묵직한 돌직구 같은 말씀이 심금을 울리고 또한 경종을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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