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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숲

금강경 제29장 威儀寂靜分(解)

작성자호건|작성시간26.06.14|조회수3 목록 댓글 0

금강경 제29장 威儀寂靜分(解)

 

29장은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이다. 여기서 위의(威儀)란 사위의(四威儀)[이리야파타 īryāpatha]로 행주좌와(行住坐臥)를 말하나 본 장에서는 래거좌와(來去坐臥)를 말한다. 적정(寂靜)은 생사의 괴로움을 여읜 진여(眞如) 그대로인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空마저 空한 俱空을 성취한 상태다. 여래는 진여의 진리 당체인 법신이기에 래거좌와(來去坐臥)의 위의(威儀)가 적정(寂靜)하다고 말한다. 분명 우리 눈에는 색신인 붓다가 일상에서 오고 가며 앉고 눕는 것으로 분별 하지만 와도 오는 바가 없고 가도 가는 바가 없기에 이를 여래(如來)라고 한다.
여래의 威儀는 함이 없이 하는 眞空妙有로 보는 것이다. 禪家에서는 일상의 삶을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하라고 말한다. 육조 혜능선사는 "어떤 경우라도 가고 머무르며 앉고 누움에 순수하고 곧은 마음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진정한 맑은 경지를 이루면 그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고 했다.
서론인 앞 절에서 여래를 威儀로 분별하여 보면 모든 佛說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말한다.
그 이유를 후반 사구게
何以故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여래는 어디로 부터 온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제5장 여리실견 분에서도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 非相 則見如來(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라고 한 바 있어
여래의 威儀 또한 여의여할 相이다. 진리의 당체인 법신 여래는 중생제도를 위해 일상의 삶을 사는 化身과 별개가 아니니 威儀 相으로 분별하면 수 많은 법문을 잘못 안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또 相을 분별함이 천길 낭떨어지로 떨어 뜨림을 본다. 分別하면 惑을 일으키고 惑은 탐진치 삼독에 물든 苦를 야기한다. 여래의 위의 또한 無自性하여 무엇에 의지하여 緣起되는 空한 실상이기에 위의를 분별하여 취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진리에 계합하는 중도의 삶은 相을 여의고 분별하지 않는 正見으로 부터 시작된다. 어떤 사람이 한 집에 들어가 '여보시요 여기 누구 없소?' 물으니 안에서 '없소'라고 답하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말은 '없소' 했으나 있는 것이 자명하다. 말에 속아 한 생각 일어나면 너도나도 천길 낭떨어지로 떨어지는 것이다.
있다 거나 없다 거나 한 생각 분별심이 일어나면 그것이 번뇌요 망념(妄念)이다.
無自性의 緣起實相 속 모든 일상을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 처럼 無常하고 無我며 苦로 觀한다. 이 苦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붓다와 예수께서 진리의 당체로 이 땅에서 한 생을 우리에게 주셨다. 여래의 相에서 相으로 보지 않듯 예수의 相에서도 相으로 보지 않음이 正見이다. 예수의 相은 무엇인가? 새로운 존재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각자의 욕망이 투사된 예수의 相이다. 그 相을 여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새로운 존재로 드러난다. 분별로 채우려면 못채운다. 분별로 제 눈에 좋은대로 믿고 빠지면 못나온다.
지금 여기 그리스도 안에서 住•修•斷,붓다의 길, 그리스도의 길을 간다.
오늘도 걸림 없고 행복하길...

 씨알
23.02.19 07:01
첫댓글 무소종래 역무소거 無所從來 亦無所去
무래역무거 無來 無去 亦無住
내가 그들이 있기 전에 먼저 있었다는 말씀이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요 8 : 56-59)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예수)때 볼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50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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