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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숲

금강경 第三十二章 應化非眞分(解)

작성자호건|작성시간26.06.14|조회수0 목록 댓글 0

금강경 第三十二章 應化非眞分(解)

 


응화비진(應化非眞)은 응신•화신(應身•化身)이 참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眞如 法身은 참이지만 應化身인 色身의 몸으로 세간에 나투어 중생이 들을 수 있도록 속제(俗諦)의 有爲法인 속제 언어로 방편설한 것은 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色身은 연기실상의 世間에 나툰 몸이기에 自性이 없이 五蘊이 空한 假有이기 때문에 참이 아니다라는 뜻도 담겨있다.
이는 곧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 달은 아니라는 것과 같다. 사람을 위해 법을 설할 때 眞諦의 眞如涅盤을 드러내어 說해야 하는데 그 자리는 언어도단 심행처멸(言語道斷 心行處滅)이라 言說로 할 수 없으나 俗諦의 언설을 방편으로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중생들은 속제의 방편설인 언설에 속아 분별 취착 갈애에 빠져 정작 봐야 할 진제의 진리를 보지 못한다.
참이 아닌 응화신의 방편설을 타고 올라 참인 진여에 어떻게 이르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금강경 마지막 장인 본 경문에서 펼쳐 보인다.
금강경의 대요(大要)가 보살은 마땅히 무상(無相)으로 종(宗)을 삼고 무주(無住)로 체(體)를 삼고 묘행(妙行)인 보살행으로 용(用)을 삼는다고 육조 혜능이 밝혔다. 결국 어떻게 相을 버리고 머물지 않고 머물어 보살수행을 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금강경은 住•修•斷을 반복해 말 하고 있다.
無住修行 斷相修行 菩薩修行이 핵심이다.
제2장 선현기청분에서 수보리존자가 세존께 보살은 云何住 云何修行 云何降伏其心(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수행해야 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반복 되며 32장까지 온 것이다.
제32분의 앞부분은 이미 이전에 여러 차례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한 것을 다시 반복해 말하는데 상상불허의 보시(布施)를 한 사람보다 금강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스스로도 깨닫고 타인도 깨닫게 하는 보살이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을 위해 금강경을 강설할 때 어떻게 해야하는가? 세존께서는 일체 내가 가르친다는 法相을 짓지말고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하게 하라신다. 강설하는 내가 먼저 모든 선입견 고집 아상을 버리고 그 진리에 조금도 의심 없이 흔들리지 않아야 오롯이 진리를 전할 수 있다. 강설할 때 나부터 의심으로 흔들리면 듣는 사람은 더 흔들리니 흔들림 없는 금강반야 無畏心으로 法보시 하라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강설하는 言說 자체가 俗諦의 緣起實相 속 無自性의 空인 有爲法이기 때문에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하니 응작여시관( 應作如是觀 ) 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강설하는 모든 언설은 일체 유위법으로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다고 바로 보아 유위법인 相을 짓지 말라는 것이다. 그동안 금강경 각 장을 간략하게 解하면서 이웃집의 연장을 빌려 쓰듯 기독인들에게도 유용한 내용과 도구들이 있는지 있으면 어떻게 원융할 것인지도 살펴 보았다. 현시대를 사는 기독인들이 버려야 할 개념, 이름으로서의 相인 우상은 무엇인지,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머물게 하여 탐착에 머물지 않게 할 것인지, 실천적 과제로서 기독보살로 어떤 수행의 길을 가야 하는지 살펴 봤다. 비록 불자가 오르는 산과 기독인이 오르는 산이 다를지라도 오르는데 필요하고 정상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보여주는 금강경은 모두 같이 지녀야할 지도요 나침반인 것을 알았다. 이제 이 지도와 나침반을 들고 한 발 내딛는 것부터 시작하자.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도 주었다. 만유는 실체가 아니요 無自性 이기 때문에 서로 의지하는 緣起實相 속에 있어 그 自性이 空하여 假有로 존재해 아침 이슬 같다고 여실히 보는 눈을 떠 그 어느 것도 그 어느 邊도 分別하여 탐착 갈애를 일으키지 않도록 얼나로 솟나야 함을 깨우쳤다. 황호건이라는 이름과 겉모습이 늘 같아 보이니까 나를 늘 같다고 보는 착각에서 이름과 겉모습을 버리고 순간 순간 조건에 따라 변하는 나를 여실하게 보는 정견의 눈도 갖추었다. 경계를 만나 실체처럼 착각해 분별 취착 갈애가 일어나려 할 때 마다 卽非 是名의 공식에 대입해 저것은 저것이 아니다 다만 이름이 저것이다라고 온갖 相을 버릴 수 있는 유용한 도구도 발견했다.
무엇보다 우리의 수행은 만유가 무자성이기 때문에 연기실상 속에 있어 空하게 보는 正見과 기독보살로서 무주상 보시로 시작 되어 眞空妙有行을 해야함을 알았다. 그리고 오늘 경문에서 금강경을 강설할 때 아상 법상을 버리고 해야 하듯 아버지의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을 전할 때 아상 법상을 버리고 오롯이 말씀만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전해야 함을 알았다. 말씀을 전할 때 말씀에 덧입혀 자신의 말로 가르치고 싶은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 어떻게 들을까 두려워도 말고 오롯이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오롯이 아버지의 뜻을 전해야 함을 알고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상의 삶 속에서 금강경의 사구게라도 수지하여 독송 하듯 한 말씀을 화두처럼 붙들고 내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어떻게 가고 있는지 나를 깨워 照見하면 좋겠다. 성경을 대하든 불경을 대할 때 이제 관념적인 相으로 산자나띠(sañjānāti)사유를 하지 말고 비록 세간에 속해 있을 지라도 관념과 이름에 불과하여 空한 相을 버리고 그 너머의 진리에 접근하는 체험적 지혜인 아비자나띠(abhijānāti)사유를 하자. 금강경은 보살의 산자나띠를 아비자나띠로 전환 시키는 경이다. 젖소로 부터 우유를 얻으려면 소젖꼭지를 잡고 짜야 하는데 소뿔을 잡고 짜려는 것이 산자나띠요 거북이로 부터 털을 구하려는 것이나 손으로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 산자나띠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기독보살로 한 손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다른 한 손에는 붓다의 가르침을 들고 자유해탈과 평안열반을 향해 하나님나라 살림을 살길 소원한다. 나의 짧은 공부로 여기까지 解했으나 너무도 부족함이 많아 감히 회향한다 말 할 수 없으니 나머지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더 깊은 공부로 채우길 바랄 뿐이다.
★ 화두 처럼 붙들고 살자.
我相 卽非 我相 是名 我相
보살은 云何住 云何修行 云何降伏其心(어떻게 무주하며 어떻게 수행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릴까?)
無住修行
斷相修行
菩薩修行
🙏🙏🙏

댓글

 씨알

23.03.02 11:49

첫댓글 "보살은 마땅히 무상(無相)으로 종(宗)을 삼고 무주(無住)로 체(體)를 삼고 묘행(妙行)인 보살행으로 용(用)을 삼는다고 육조 혜능이 밝혔다." 육조와 장로님의 내공있는 해석을 통해서 금강경의 요체가 無相 無住 妙行, 住•修•斷의 이치를 알게 됩니다.
학문이 아닌 현실의 문제에 있어 어떤 像도 法도 功도 아무 것도 걸림이 없이 정진케 하심이 경의 가르침임을 깨우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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