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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숲

琺寶壇經 17 <돈오(頓悟)>

작성자호건|작성시간26.06.14|조회수0 목록 댓글 0

琺寶壇經 17 <돈오(頓悟)>

 

단경에서 육조 혜능이 경험한 두 번의 깨달음은 모두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인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묾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는 말을 이다. 처음은 “어느 때 한 손님이 나무를 사고는 여관까지 가져다 달라 하였습니다. 여관에서 손님이 나무를 가져가고, 저는 돈을 받아 문밖으로 나오다가 한 손님이 경(經) 읽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마땅히 머묾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는 경문(經文)을 한 번 듣자 곧 마음이 열려 깨달았습니다.” 다음은 이번 회차에서 처럼 “오조(五祖)께서 가사를 가지고 주위를 가로막아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시고서 <금강경>을 말씀하셨습니다. ‘마땅히 머묾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저는 그 말을 듣자마자 크게 깨달았는데, 모든 것이 자성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오조께 말씀드렸습니다.
‘자성이 본래 깨끗함을 어떻게 기대했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생기거나 사라지지 않음을 어떻게 기대했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완전히 갖추어져 있음을 어떻게 기대했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흔들림이 없음을 어떻게 기대했겠습니까? 자성이 삼라만상을 생산할 수 있음을 어떻게 기대했겠습니까?" 육조께서는 이 한 말씀 듣고 단박에 깨쳤다. 본문에서 '忍和尙'이라고 했는데 '弘'을 첨언하여 읽음이 마땅하다. 위에서와 같이 육조께서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깨달음은 말을 듣고서 곧장 깨닫는 것이었다. 이것은 ‘말을 듣고서 그 자리에서 곧장 깨닫는다.’라는 뜻으로 ‘언하변오(言下便悟)’라고 하니, 이것이 혜능의 돈오(頓悟)이다. 여기서 육조께서 말하는 깨달음은 마음작용의 緣起實相을 바로 보고 본래 그 自性이 無自性이기 때문에 空함을 체득해 無分別智로 일체 상(相 sanna)을 여의고 言下에 大悟한 것이다. 따라서 육조의 돈오를 바로 알려면 육조의 깨달음에 인연이 된 금강경을 먼저 공부 하는 것이 순서겠다. 육조단경에 담긴 육조의 마음공부의 핵심이 깨치신 뒤 쓴 금강경 해의 서문에 '대저 금강경은 무상(無相)으로 종(宗)을 삼고, 무주(無住)로 체(體)를 삼으며 묘유(妙有)로 용(用)을 삼는다'고 나타났기 때문에 금강경이 육조단경을 읽을 때 길잡이가 된다. 또한 자신의 돈오에 대해 "위없는 깨달음은 모름지기 말을 듣자마자 얻으니,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자기의 본성을 본다.” 그리고 "나는 홍인(弘忍) 스님이 계신 곳에서 한번 듣고서 듣자마자 곧장 깨달아 문득 진여(眞如)인 본성(本性)을 보았다.”고 말한다. 즉 연기실상의 相을 모두 여의고 그 生滅의 굴레에서 벗어나 본래 구족하여 如如한 구공(具空) 즉 空마저 空한 진여의 본성, 불성(佛性)을 본 것이다. 한 말씀이 經文이든 공안이든 할(喝)이든 듣거나 또는 방(棒)이나 주먹을 맞고 見性하는 돈오(頓悟)를 단 한번에 완전히 깨달음을 얻는다는 오해를 해서는 안된다. 육조도 나뭇짐을 지고 初見性을 해 발심한 뒤 홍인대사를 만나 크게 깨달은 것이다. 마치 물이 99도에서 끓지 않다가 마지막 1도가 가열되면 끓는 임계점 처럼 깨달을 수 있는 인연이 선업으로 쌓이고 쌓여 마지막 임계점에서 확철대오(廓徹大悟)의 돈오를 하는 것이다. 마지막 1도가 가열될 때 머리를 굴려서 따지지 말고 그냥 문을 열고 나가라는 말이다. 절대 오랜시간 머리굴려 알음알이로 見性할 수 없다는 가르침의 한 방편으로 돈오의 가르침을 편 것이다. 진여 본성의 견성을 가르키는 손가락인 돈오를 가지고 돈오 점오 논쟁을 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돈오라 해서 꼭 문자를 떠나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경허선사만 하드래도 경문에 밝은 학승으로서 대강백을 지내며 물을 끓이다 인연이 되니 그 경서를 다 태우고 칼끝을 턱에 대고 죽음을 불사한 禪을 행하던 중 동자의 콧구멍 없는 소 이야기 한 마다에 몰록 견성하여 문을 박차고 나온 것이 아닌가. 깨달음은 인연의 계기조건이 되면 순간에 이루어 진다는 가르침이다. 육조께서는 99도 까지 끓이는 과정에서 주의 해야할 두 가지를 본문에서 말한다. 바로 법박(法縛)과 변견(邊見)이다. 법박은 경문으로 설한 法에 얽매이는 법집(法執)과 법상(法相)이 망념으로 작용해 오히려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이고 변견은 分別心으로 일어나는 변계소집(遍計所執)에 의해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실재한다고 분별하여 한 변에 집착하는 허망한 분별(虛妄分別)’로 선악, 유무, 래거, 생멸등의 한 변에 집착하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공부에 방해 된다는 것이다. 이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생각속에 생각이 없게 하고 마음 속에 마음이 없게 하는 무념(無念) 상태를 유지하는 깨어 알아차림하는 禪 또는 명상이다. 곧 바로 마음으로 들어가 알아차리는 사띠로 사마타(止)와 위파사나(觀)해서 法相과
遍執이라는 망념을 사라지게 한다. 일상에서도 머리가 잡념으로 어지럽고 불쑥불쑥 화가 치밀고 까닭없이 눈물이 나거나 스트레스 상황이 오면 손님이 왔구나 하고 즉시 알아차린(사띠 念) 후 잠시 멈춰서(止) 조용히 그 상태를 바라본다(觀) 그러면 그 손님은 알아서 떠난다. 이것이 바로 육조께서 말하는 일행삼매(一行三昧)다. 코를 만지 듯 쉽다. 우리도 모두 일상의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 念•止•觀을 해보자. 하다 보면 언제 벼락치듯 돈오할지 모르고 이미 한통 했을 수도 있고... 쓰다 보니 돈수(頓修)를 못썻는데 이는 깨달음 후의 설겆이로 보면 되고 섰을 때 넘어질까 조심하는 것이다. 아제아제바라아제 모지 사바하🙏🙏🙏

 씨알
23.04.27 07:11
첫댓글 "듣고서 그 자리에서 곧장 깨닫는다.’라는 뜻으로 ‘언하변오(言下便悟)’라고 하니, 이것이 혜능의 돈오(頓悟)
우리도 모두 일상의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 念•止•觀을 해보자. 하다 보면
언제 벼락치듯 돈오할지 모르고 이미 한통 했을 수도 있고."

돈오가 거저 찾아 오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들어가 알아차림과 탐색의 과정에서 찾아오는 선물과 같음을 알게 됩니다.
마치 혜능 스님의 열정과 탐구의 과정과 같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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