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용서할 수 있을까?
해체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 7. 15. ~2004. 10. 9.)는「용서하다」라는 책에서 홀로코스트에 관한 장켈레비치의 주장을 가져와 인간의 처벌 범위를 넘어선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해야 용서라는 난제로부터 지난한 용서의 문제를 풀어나간다. 누구나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기에 용서-불가능한 일을 용서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에야 비로소 용서의 가능성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피해의 ‘회복 불가능성’은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용서의 시간성을 환기한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수용소에서 용서가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데리다는 ‘용서(pardon)'라는 단어의 음절(par-don)에 포함된 의미를 성찰하면서 용서 행위에 포함된 논리적 난점들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용서를 빌지 않는 자를 용서해야 하느냐‘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서부터 ’피해자 각자가 아니라 집단을 상대로 용서를 구할 수 있느냐, 그럴 권리가 있느냐, 그것이 과연 용서의 의미에 부합하느냐‘는 문제,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대신해서 제삼자나 국가가 가해자를 용서할 권리가 있느냐’는 문제, 유대인 학살처럼 ‘저지른 죄가 너무 커서 ‘인간의 한계’를 넘었을 때에도 용서가 가능하냐‘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철학적·윤리적으로는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고 온전한 용서는 불가능함을 성찰한다. 성경에서는 나에게 죄지은 자를 몇번이나 용서 하리이까? 일곱 번이라도 하리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마18 : 21~22) 굳이 데리다와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해는 할 수 있는데 용서는 할 수 없다라든지 약자가 강자를 용서 할수 있는가 또는 용서의 당사자들이 죽어 없을 때 용서는 어떻게 되는가 용서는 완전히 잊는 것이라든지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난제인지를 나타내는 질문들이다. 결국 용서의 횟 수나 용서의 질이라는 측면으로 볼 때 용서를 말하면 할 수록 용서의 불가능성에 더 가까워진다. 여기 까지 이어진 용서 문제의 지난함은 세상의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진 도리인 속제(俗諦)에서 용서 받을 자와 용서 할 자가 절대 타자로서 이항대립의 관계에 있다는 점과 불가능에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일곱번에 일흔번이라도 용서해야 마땅하다는 윤리적 철학적 종교적으로 강요 되는 규범, 그리고 각자가 안고 있는 분노와 상처 서운함 응어리 들이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을 넘어 俗을 건너간 자리인 진제(眞諦)에서는 모두가 하나 되는 불이(不二) 평등이기에 용서 받을 자도 용서 할 자도 사라진다. 진정으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랑과 자비로 하나된 자는 더 이상 용서 받을 자도 용서 할 자도 아니다. 흔히 용서는 세월에 따른 망각 속에 있다고 하지만 그 것은 언제든 조건만 만나면 다시 터져 나올 휴화산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분노와 상처 억울함 수치를 맑게 알아 차리고 멈춰서 지켜봄으로 치유되고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나길 소원한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가 용서를 여의게 할것을 믿는다. 이 믿음으로 추수감사절에 우리의 묵은 분노와 상처 응어리를 제물위에 얹어 드리고 스스로 족쇄를 풀어 용서의 강을 건너 진정한 평화를 누리고 교회공동체가 바로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