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존의 바닥에는 허무와 두려움이 있다. 인간 실존은 항상 분리와 비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있다. 생노병사와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선험적 한계상황은 삶의 의미를 상실한 극단의 허무에 이르게 한다. 허무의 밑바닥을 파면 팔수록 쓴 물만이 솟구친다. 트리노 광장에서 채찍에 맞아 쓰러진 말에 더 채찍하는 모습을 본 프리드리히 니체는 눈물로 그 말을 껴 안고 오열한다. 그가 껴안은 것은 말이 아니다. 주인의 명령에 거부하며 채찍 맞는 말은 바로 한계상황에 있는 니체 자신이었고 우리였다. 위버맨쉬의 발 밑에는 불안의 대지가 흔들렸고 주인의 도덕으로 무장한 권력의지 위에는 사정 없이 채찍이 내려지고 있었다. 차이의 반복으로 끊임 없이 창조되어야 할 삶이 결국 한발 한발 채찍을 맞으며 나갈 수 밖에 없는 반복의 연속임이 그를 오열하게 했을 것이다. 그가 흠모하던 예수의 마음으로 그 말을 껴안고 울었으나 토리노 성당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끝내 내려오지 않고 성당 안에는 예수의 수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결국 니체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놓고 위버맨쉬의 옷을 벗어 버리고 무아로 돌아 갔다. 우리의 실존은 이렇다. 폴 틸리히는 이러한 비존재의 두려움을 떨치고 한계상황을 건너간 새로운 존재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허무로 흔들리는 대지의 흔들리지 않는 정초다. 죽음이라는 비존재에 대한 두려움의 한계상황을 십자가에서 건너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이 우리의 실존은 제사장의 옷을 입은 영원 회귀의 위버맨쉬가 된다. 할렐루야🙏 2020. 6. 15. 평화 황호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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