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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영성

어떤 젊은이의 근심

작성자호건|작성시간26.06.14|조회수1 목록 댓글 0
어떤 젊은이의 근심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어떤 젊은이와 예수님께서 대화를 나눈 기사가 있다.(마19:16~22) 성경에서는 이 젊은이가 큰 부자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젊은이가 예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이 질문을 겉으로 보면 젊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예수께 찾아온 것에 대해 영적으로 깨어 있고 높은 의식을 가진 것으로 착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젊은이가 영원한 생명을 무슨 선한 일의 대가로 또 부유함에 더해 얻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고 욕심이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선한일이나 부유함은 유한한 속제(俗諦)의 것이고 영원한 생명은 유한한 속제 너머에 있는 무한한 진제(眞諦)다. 유한한 것을 더하거나 연장해서 무한한 것이 될 수 없고 유한의 잣대로 무한을 잴 수 없다. 예수께서는 젊은이의 오해와 의식을 들여다 보고 네가 선한 일을 해서 영생을 얻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젊은이는 매우 경건했던 것 같다. 계명을 다 지키고 있으니 무엇을 더 해야 되느냐고 묻는다. 이에 예수께서는 결정적으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젊은이는 침울한 표정을 하고 돌아간다. 다른 번역에 보면 풀이 죽어 근심하며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젊은이의 근심은 무엇이었을까? 이 젊은이의 근심이 우리의 근심은 아닐까? 젊은이는 혹 때러 갔다가 혹을 더 붙인 꼴이 되였다. 예수께서는 그의 소유문제는 건들지 말았어야 했다. 이 욕심 많은 젊은이는 풍요와 경건함 위에 영생을 더하려 했는데 당장 모두 포기하라니 그 것을 포기하고는 영생도 의미가 없고 소유를 놓을 수 없기에 풀이 죽어 근심하며 돌아 갔다. 고대로 부터 영생은 제왕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들은 누리는 권력과 부를 영원히 누리고 싶은데 그 것을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이 죽음이였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죽음과 싸워 이겨야했다. 진나라 시황은 오랫동안 불로초를 찾아 헤메었고 영생의 무덤을 준비했다. 고대 근동의 수메르 유적으로 이라크에 지구라트가 남아 있고 이집트의 피라밋 안에는 미라로 만든 파라오들이 혼이 돌아와 영생하길 기다리며 누워있다. 큰 부자였던 젊은이 또한 이런 생각으로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건 아닐까? 우리도 젊은이 처럼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고 놓지 못한 것들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로 인한 근심은 없는가?
莊子의 內編 第三篇 養生主 1에 보면 "吾生也有涯(오생야유애) : 우리의 삶은 언젠가 종말이 있으나
而知也无涯(이지야무애) : 지식은 끝이 없다.
以有涯隨无涯(이유애수무애) : 각자에게 부여된 유한한 삶의 시간 동안 끝이 없는 지식을 추구하면
殆已(태이) : 오직 위태로울 뿐이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는
유한의 잣대로 무한을 재려는 어리석음을 깨우치라는 글귀다. 인간은 실존적 한계로 죽음이 있고 이 죽음으로 유한성의 제한을 가져 삶은 유한한데 지적욕구는 무한하여 삶이 다하여도 채울 수 없기에 종국에는 여한으로 남아 위태롭다 말한다. 우리 또한 삶을 규정하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자원은 유한한데 마치 오늘 살 듯이 내일도 살 듯 영원히 살 것처럼 추구하는 것은 없는가? 젊은이 또한 어떤 선한 일이라는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영생을 추구하려 했다. 이래서는 얻을 수 없기에 근심만 쌓여 위태롭게 된다는 것이다. 유한한 것에 유한한 것을 아무리 더해도 무한이 될 수 없다. 부질 없는 짓이다.
한 편으로 젊은이가 큰 부자였다는 점에서 어떤 한계를 살펴보자.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이 그의 저작 『소유냐 존재 냐』에서 자아와 세계가 관계를 맺는 두 가지 방식으로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을 말하고 있다. 소유양식은 인간이 소유한 물질이나 권력이나 지위 그리고 지식 등으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자신의 삶과 존재를 평가하고 규정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소유양식은 인간의 밑도 끝도 없는 탐욕과 집착에 기반한 삶이기 때문에 유한한 자원으로 무한한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자원만으로 안될 때 타인의 자원을 취할 수 밖에 없기에 끊임 없는 갈등과 다툼이 있게 되고 채워야할 걱정과 근심속에 살아간다.
겉으로 볼 때는 자신이 그러한 것들을 소유한 주인인 것 처럼 보이나 그 속을 헤쳐 보면 소유한 것들이 주인이 되어 오히려 소유자는 노예화 되고 소유한 것들로 제한됨을 알 수 있다. 푸른색으로 보이는 것은 다른 색들은 흡수(소유)하고 푸른 색만을 반사(놓음)하기 때문에 푸르게 보이는 것 처럼 존재양식은 소유양식인 비존재를 감소 시키는 만큼 드러 난다. 즉 클리어가 될 때까지 빛을 방출 함으로 온전한 존재양식이 드러난다. 존재는 그렇게 모두 버림으로써 놓음으로써 드러난다. 이 것이 방하착(放下着)이다. 육조혜능은 남악회양에게 법을 인가하며 5조 홍인으로 부터 받은 발우와 가사를 전하지 않았다. 敎外別傳 直指人心을 禪風으로하여 敎學도 소유와 집착의 대상으로 보기에 法統을 잇는 상징물인 발우와 가사 또한 공부에 걸림이 되는 소유와 집착의 대상으로 여겨 전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대상과 자아에 집착하는 만큼 존재에서 멀어진다. 무한한 탐욕을 극복하고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유한의 잣대로 무한을 잴 수있는 길이다. 부자 청년의 근심은 소유양식을 버리고 존재양식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음에 대한 근심이다. 소유양식 안에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무한한 베품과 사랑 그리고 비움의 존재양식으로만 상대적이고 유한한 소유양식의 강을 건너 영원의 세계로 갈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자인채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만큼 어렵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께 그러면 구원을 얻을 사람이 어디있겠느냐는 물음으로 절망감을 나타낸다. 이에 예수께서는 가장 기쁘고 위로가 되며 실현 가능한 답을 말 하신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다 못해 기어다닐 힘이라도 있어야 먹고 살 수있는 소유가 삶의 기반이니 속제에서는 불가능한 한계를 인정하고 그 너머에 무한으로 없이계신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 분은 우리의 믿음의 채널을 통해 이뤄내신다.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따를 때 가능해 진다. 그 안에서는 어떤 젊은이의 근심 따위는 없다. 그 안에서 용서할 자와 용서 받을 자의 경계가 사라졌 듯 그 안에서는 무한한 그분만이 충만하기에 더 이상 소유와 무소유라는 경계가 있을 수 없다. 모두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다 이뤄졌으니 이제 그 분과 하나 되어 그 모든 경계를 벗어나 무한한 자유와 평화와 영생을 누리시길...🙏
2020. 11. 22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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