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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영성

현재(νῦν)를 땅에 묻은 종

작성자호건|작성시간26.06.14|조회수0 목록 댓글 0

현재(νῦν)를 땅에 묻은 종

(마25:14~30) 달란트 비유

                              평화 황호건

옛 말에 사람이 공을 던지면 강아지는 공을 쫒아가 물어 오고 호랑이는 공을 던진 사람을 문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마태복음을 다시 대하며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성격, 그 작동방식 그리고 나와의 관계와 누림에 비추어 말씀을 새겨왔습니다. 마치 강아지가 공을 쫒아가듯 여러 신학적 논쟁이나 해석을 쫒아가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나라 복음의 본질을 찾아 스스로 정리하고자 힘을 기울였습니다.

오늘 같이 살펴볼 마25:14~30의 말씀도 이 달란트 비유가 가르키는 것이 무엇인지 호랑이 입장에서 보고자 원합니다.  종말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그 시기에 있어 '이미'와 '지금'과 ' 아직'으로 나뉘어 전개 되어 왔고 현재적 선취로서의 종말론까지 다양하게 등장하게 되였습니다. 여기서는 이러한 신학적 논쟁이나 '재능' 또는 '충성' 그리고 '삶의 결산'이라는 키워드로 해석하는 것을 떠나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크로노스적 영원한 현재의 하나님 나라와 은총의 현존을 경험하며 살아낼 것인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달란트비유를 'No risk No gain'  'High Risk  High Return' 어쩌구 하며 자본시장이나 실물시장의 논리로 접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곧 모순에 봉착합니다. 어느 시대건 no risk의 시장 상황은 없기 때문입니다.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리스크가 커지는 상황에서는 작은 기회비용을 감수 하고서라도 땅에 묻어 위험을 최소화 한 종이 칭찬을 받을 것이고 투자해서 배를 남겼든 세배를 남겼든 그 종들은 무모하다고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투자환경에 따라 상대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거시기합니다. '재능'이나 '충성' 또는 '삶의 결산'으로 해석하는 것도 2차적인 지엽의 문제 들입니다. 저는 1달란트 받은 종에 촛점을 맞춰 이 비유의 비밀코드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왜 이 종은 밖에 버려져 슬피울며 이를 가는 형편이 되였을까요. 

현생 인류 이래로 우리의 뇌는 현재 어떠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 생존확률을 높히기 위해 과거의 유사 사례를 기억으로 부터 색인해  860억개의 뉴런과 1000조개의 시냅스가 연합하여 순식간에 최적확률을 계산해서 살아 남을 수 있는 행동을 예측하여 행동하도록 시스템화 되어 있습니다. 이 예측시스템은 인간에게만 특화되어 유전적으로 전해지는 고유의 기능입니다. 여기에 1달란트를 받은 종이 왜 1달란트를 땅에 묻었는가의 답이 있습니다.

유추해 보면 종이 1달란트를 받는 순간 이 1달란트를 어떻게 할 것인가 판단하고 선택하는 일련의 의식활동 중  먼저 예측을 위해 기억을 색인해서 인출하는데 제일 먼저 강하게 인출된 기억은 주인에 대한 부정적 기억이였습니다. 종의 주인에 대한 기억은  '씨를 뿌리지도 않은 곳에서 거두어들이고 심지도 않은 데서 모아 들이는 인색하고 매정한 분'(마25:24a)이였습니다. 이러한 기억을 참조해 1달란트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예측하니  ' 이익을 남기더라도 빼앗아 갈 것' 것이라고 예측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결과에 따라 종은 '다만 땅속에 감추에 두었다가 그냥 가지고 온다'라는 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김니다. '(마25:24b) 주인을 인색하고 매정한 분으로 오해한 기억샘플링의 오류로  미래예측을 할 때  불안 공포때문에 1달란트를 땅에 묻어 버린 것입니다. 흔히 의식이 미래에 갖히면 불안장애를 가져오고 과거에 갖히면 우울증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1달란트 받은 종은 미래에 대한 예측오류로 공포에 떤 나머지 1달란트와 함께 모든 가능성과 기회의 현재를  땅에 묻어버린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본능적 생존시스템에 의해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먼저 현재에 깨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깨어 있다는 것은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닌 꼬집으면 아프고 보고 듣고 맛보는 모든 생생한 지금의 경험을 말합니다. 이렇게 현재에 깨어 잡중하면 생각이 과거나 미래로 달음질 하지 않고 현재의 경험만이 있습니다. 현재에 깨어 머무는 육체적인 거친 깨어남의 경험 속에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신성에 대한 자각이요 아들이라는 자각이요 숨가운데 현존하는 그분의 생명을 경험하는 영적 깨어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재에 영적 깨어남의 경험이 다윗을 골리앗 앞에 서게 했고 돼지 사료인 주염열매를 먹던 집나간 작은 아들의 발길을 집으로 돌려 놓았습니다. 

한달란트 받은 종은 과거의 주인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혀 현재에 깨어 있는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현존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여기고 있습니까? 전쟁의 신, 심판 주, 보면 죽이는 신, 변덕이 심한 신, 무관심한 신은 아닙니까? 내가 만든 우상을 신으로 섬기지는 않습니까? 내가 경험하는 신이 어떤 분인지 알고 기억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 여호와를 기억하라 기억하라 애굽에서 구출한 나 여호와를 기억하라"고 신신당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에 영적 깨어남의 첫발입니다. 숨님께서는 지금 이순간 판단하고 선택하고 실행하는 의지는 삶의 욕구를 채우는 본능적 의도와 의지가 있고 그 너머에 영적 의도와 의지가 있으며 영적 의도와 의지는 믿음으로 표현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맞습니다. 그 믿음의 의도와 의지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인식과 경험을 증명해 주는 말씀으로 영적 깨어남이 이루어져 자랍니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에 잠들어 현재를 땅에 묻은 자에게는 그러한 은총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열처녀의 비유에서 깨어 있으라 말씀하셨고 달란트비유에서는 현재에 깨어 올인하라 하시며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는 지금 깨어 돕고 섬길자를 보고 도우라 말씀하십니다. 현재를 땅에 묻지 않고 영적으로 깨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자원을 하나님나라의 작동방식에 따라 영원한 현재에 올인 하는 것을 충성, 열정, 저돌적, 무모, 미쳤다  등등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현재에 현존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며 저는 현재를 경험하고 있고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읽으며 현재를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만이 실재입니다. 지금 이순간 현존하는 그 분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앉아서 말씀을 묵상하며 생명의 숨에 집중해 보거나 조용한 숲길을 천천히 걸으며 바람이 스치듯 주어진 모든 것들과 섬세하게 만나보십시요. 살 떨리도록 소름 돋고  기쁜  현존의 경험속에서 아버지의 무한한 자원을 올인해 내 도전과제를 향해 한 발자욱을 내 디디고 세상을 향해 팔벌리시기를 소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21.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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