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난의 때를 如如히 건너사
(마태복음5장~7장) 「대나무 그림자 섬돌 위를 쓸어도」 평화 황호건 요즘 기독교계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하는 사순절로 지킵니다. 그 고난의 기록이 각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는 25장에서 27장까지 제자에게 팔리어 두번의 재판을 받고 사형언도를 받으며 조롱과 위해 등 고난 받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예수께서 어떻게 이 고난의 때를 건너셨는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볼까 합니다. 가룟유다에게 은30에 팔려 대제사장에게 넘겨진 예수께서는 두번의 재판을 받습니다. 처음 재판은 대제사장 가야바에 의한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성전모독, 조세거부, 메시아 참칭이라는 죄목으로 종교재판이 이루어 진 바 이는 사형판결을 정해 놓고 증언을 꿰 맞추는 확증편향적 재판이었습니다. 식민지 정치 구조상 산헤드린 공의회에서는 심문은 하지만 형집행권이 없기 때문에 집행권이 있는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에게 보내 선동반란, 왕명사칭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 사형판결을 내리게 합니다. 이 재판 역시 필라투스는 무죄 심증을 가지고 있었지만 비겁하게 손을 씻고 예수님을 사형에 처해달라는 여론과 타협하는 타협적 재판이 이루어 졌습니다. 이러한 확증편향적이고 타협적인 재판은 아직도 일부 정치편향의 판검사들에 의해 자행되어 인권을 유린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두번의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증거가 불충분한 상황에서 억울하게 죽음으로 몰고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심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왕인 메시아임만을 밝혀 더 불리해 질 뿐 어디에도 법적 다툼이나 자신을 변호하는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재판 과정에서 많은 조롱과 위해가 있었지만 거기에 대해서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실존적 한계를 지닌 인간으로서 상황에 따라 원시적 본능적 반응을 하지 않고 지극히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반응을 하지 않으신 것은 이미 공생애 전 광야 40일간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3년간은 假有로서의 인간 예수로 사시다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그 인간 예수마저 온전히 비워 아버지께 맡겼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비워 그리스도 메시야로서만 남은 주님의 마음을 어떠한 무엇도 상황도 흔들 수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송나라 때 금강경 오가해 중 하나의 주석을 쓴 야부도천(冶父道川) 선사의 게송이 생각납니다. 竹影掃階塵不動 죽영소계진부동 月輪穿沼水無痕 월륜천소수무흔 대나무 그림자 섬돌 위를 쓸어도 티끌 움직이지 않고 달빛 연못을 뚫어도 물엔 흔적이 없네. 어떻습니까? 마치 위 게송에서 처럼 먼지가 일지 않는 섬돌과 달빛에 뚫려도 흔적 없는 물과 같이 이 상황을 다만 메시야인 주시자로서 바라 보고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여여(如如)함을 보이신 것 같지 않으십니까? 사도신경에 보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대목이 있는데 고난의 의미가 퇴색될 수도 있고 그 아내를 봐서라도 그리고 사랑의 기독교가 이천년 가까이 그를 저주하듯 계속 불렀으니 이제 그를 놓아주면 어떨까요? 그리고 제자에게 팔려 두번의 재판과 침뱉음, 뺨맞음, 채찍 맞음 등 조롱과 위해라는 모든 고난 당하심을 축약해 "그 고난의 때를 如如히 건너사"라고 하면 어떨까요. 주께서 여여(如如 : tatahta) 하게 고난의 때를 건너신 것은 온전한 자기비움( Kenosis κενοσις) 즉 공(空)의 지혜로 假有였던 인간 예수 마저 비우고 오직 그리스도로서 중관(中觀)의 지혜로 自他, 善惡, 生滅, 去來, 常斷, 一異를 여의여 어느 하나에 着하지 않았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건너신것이 아닐까요. 주께서는 자신을 비워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온전히 맡기고 다만 그리스도인 주시자로서 상황을 지켜볼 뿐이였습니다. 이렇듯 케노시스로 탐진치(貪嗔癡) 삼독을 멸하여 걸림이 없어 두려움이 없고 꿈에서 깨어 생사가 둘이 아닌 열반 해탈의 하나님 나라와 아버지와 하나 되어 자유와 평화,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사는 하나님 나라를 반야용선을 타고 건너는 바라밀을 몸소 보이신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렇게 케노시스로 인간실존의 소외를 극복하고 새로운 존재로서 고난의 때를 건너신 것입니다. 실존의 소외가운데 비존재의 두려움에 떨던 우리에게도 희망의 빛이 비친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께 고대하던 메시아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새로운 존재로 건너실 때 같이 건너면 됩니다. 새로운 존재에 믿음으로 참여하면 됩니다. 이제 우리 또한 주의 바라밀 그 반야용선에 같이 타 새로운 존재로 소외를 극복하고 건너 하나님나라를 사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여기에서 이원적인 의식의 틀, 제도, 시스템을 초탈하여 아버지의 면전 그 현존을 경험하며 대나무 그림자 드리운 섬돌처럼 달빛이 뚫은 물처럼 如如하게 하나님 나라를 건넘이 진정한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주께서 그 고난의 때를 如如히 건너신 것처럼 모두 깨어 주의 바라밀로 階塵不動하고 沼水無痕하듯 如如한 마음을 내어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과 용서로 주께서 선포하시고 살아내신 그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고 건너시기를 소원합니다. Tatahta! 🙏 2021. 3.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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