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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영성

영혼의 근저(根底 grunt)

작성자호건|작성시간26.06.14|조회수1 목록 댓글 0

영혼의 근저(根底 grunt)

 

영혼의 근저(根底 grunt)
「영성의 길」
(히 2장~4장)에서


기독교 신앙인들이 영성의 길을 찾아 간다고 하면 보통 제도권 교회에서는 이단 삼단 논쟁에 휘말리거나 종교재판을 당하기 십상이다.   따지고 보면 성서 자체가 신의 언어를 우리말로 컨버전하여 초월의 세계에서 현실세계로 던져진 신비 덩어리다. 그리고 시공을 초월한 무한하고 영원한 절대적 神性으로 부터 유한하고 상대적인 세상으로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신 것 보다 더 신비스러운 일이 있을까? 히브리서 2장에서 4장을 보면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관계에서 구원의 서정을 두가지 길로 보여준다. 그 하나의 길은 도그마로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 아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내셨고 죄 없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죽음의 공포로 부터 구원한다는 구속사의 길이다. 또 하나의 길은 하나로부터 나와 하나로 돌아 가는 歸一의 신비로서 우리와 예수께서 한 하나님으로 부터 나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는 한 형제가 되였고 한 형제라는 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참여하여 우리안에 하나님께서 거함으로 하나님과 하나되는 歸一이며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궁극의 구원인 하나님의 安息에 참예하는 영성의 길이다. 성서에서는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히 2:11 )하셨다. 이 탄생에 대하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Johannes Eckhart  1260-1327)는 궁극적 실재인 없이계신 그 一者의 텅빈 신의 근저에서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고 그 신의 근저에서 우리도 같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히 2:11b)고 말씀 하신다. 
한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우리이기 때문에 신의 은총으로 그 그리스도에 참여하여 그리스도께서 텅 비워 초탈하심 같이 우리도 텅비워 초탈함으로 그 신의 근저에 다달으면 우리 영혼의 근저에서 그리스도께서 태어나 우리를 그리스도로 채워 그 힘으로 신의 근저와 우리 영혼의 근저가 맞닿은 그 근저를 돌파해 들어가 온전히 아버지와 하나되는 일치와 신의 안식을 경험을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탄생은 항상 현재적 사건 즉 영원한 현재의 사건이라 말한다. 이 영성의 길에서의 관건은 근저(grunt)에 어떻게 다다라 어떻게 돌파할 것이냐에 달려있다. 그 근저(grunt)는 가장 내적인 것(intimum), 숨겨져 있는 것(abditum), 본질(essentia)로서 모든 것으로 부터 벗어나 있고 텅 비워진 숨겨진 어두움이라고 말한다. 그 근저의 핵심은 텅 비움 (케노시스)이다. 자아(에고)를 깨 부숨이고 벗어남이 텅비움의 시작이다. 흔히 에크하르트의 궁극적 실재인 없이계신 一者의 無와 비움의 영성을 불교의 논사인 인도의 니가르주나(용수보살)가 논한 空과 같이 말하는 경우를 보는데 이는 다르다. 에크하르트의 無와 비움은   神께서 스스로 자신의 일부를 비워 제한하여 창조한 자비의 성품이며  예수께서 神의 본체를 비우고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신 사랑의 성품이다. 이 성품은 우리도 본래 가지고 있어 우리를 신의 아들 그리스도의 형제인 신적 존재라고 한다.  이에 비해 용수의 空은 부파불교시대의 한 부파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아공법유(我空法有)라 하여  ‘나’라는 존재는 무상해서 공(空)이지만, ‘나’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정신적 제(諸)요소인 법체(法體)는 과거ㆍ현재ㆍ미래 삼세에 걸쳐 항상 존재한다고 봤는데 이런 法有說은 아트만을 인정 하는 것과 같아 붓다 본래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오온(五蘊 : 色受相行識)은 緣起에 의해 조건에 따라 모이고 흩어져 변하기 때문에 스스로 항상하는 自性이 없으므로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空하다는 我空法空을 논한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이 空하니 한쪽에 치우쳐 집착함을 끊고 中道로 나아가 열반에 이르는 방편설로 건너 다다르면 버려야할 빈 배다. 에크하르트의 영혼의 근저라는 텅빔과 근저에 이르기 위한 텅빔은 수단이 아니라 회복되어야 할 본질적인 신의 성품인 목적지다. 이제 한번 신의 근저에 다가갈 영혼의 근저로 내려가 보자.  일상에서 떨어져 조용히 앉아보자. 척추를 바로 세워 지구의 중심에 맞춘 뒤 손을 무릎위에 가볍게 놓거나 단전 밑에 포개 놓는다. 그 다음 아집과 완악의 상징인 앙다문 얼굴의 악근을 풀고 목을 한두번 돌려 기브스해 곧은 목을 푼다음  공격적 깡패기질로 긴장한 어깨의 힘을 쭉 뺀다. 다음은 배를 신으로 섬기던 탐욕의 가슴과 배 근육도 축 늘어 뜨린다. 이렇게 몸을 이완시켜 몸부터 비우는데 이완이 거의 되면 모든 무게가 손에 모여 무거워 지다 점점 몸이 사라져 가는 가벼움을 느낀다. 이 상태에서 의식을 숨이 드나드는 코와 입술 사이 인중에 집중한다.  숨이 드나들 때 마다 내 쉬며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들이쉬며 '아버지여 불쌍히 여기소서'를 속으로 반복한다. 집중이 잘 안되면 소리를 내어 기도한다. 얼마 되지 않아 온 몸을 벗어버린 것 처럼 이완 되며 생각의 불꽃이 꺼지고 깊은 어둠과 고요함에 잠길 것이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비워지는 초탈로 모든 것이 그친 그 고요함과 어두움 가운데가 내 영혼의 근저이며 신의 근저와 맞닿아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다시 태어 나는 곳이며 영혼의 불꽃이 타오르는 곳이다. 에크하르트는 그렇게 텅비워져 숨쉬는것 마저 잊어지고 그 고요함 가운데 아버지와 대면하고 하나되는 기쁨과 평안함과 자유 그리고 모든 것이 그쳐버린 안식이 나의 전부가 된다고 말한다. 그때 영혼의 불꽃 즉 신의 뜻을 아는 최고의 지성 최고의 지혜인 성령께서 우리를 사랑과 자비의 길 가난의 길로 안내하고 내 몬다고 한다. 이렇게 영혼의 근저에서 깨어나  알아차리고 하나님나라에 머물며 누리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그 동안 소유하고 누렸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어떤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그 또한 내것 이니라'라는 말씀을 듣고 나면 두려움 없이 지혜로 정리될 것이다. 바울은 포기해져야 되는 것들을 분뇨로 여긴다고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초탈의 일상화요 신의 의지에 따라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것이다. 때로는 고요히 앉아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던 텅빈 신의 근저를 향해 내 영혼의 심연으로 초탈해 잠겨 고요한 평화로 안식하는 하나님나라를 경험할 때  때로는 폭풍우와 노도가 몰려오는 삶의 한 복판에서 테바를 타고 오직 믿음 하나의 돛을 올려 건너갈 때 친구되신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고 아버지의 은총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2021. 5. 2.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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